600년 수도사상 첫 순직 도(悼) 함

조선조 개국 일등공신
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
600년 수도사상 첫 순직 도(悼) 함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태조실록 제9권 병자년 2월 28일

봄이 오자 성을 쌓는 역부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동대문 부근은 지세가 낮아서 밑에다 돌을 포개어 올리고 그 위에 성을 쌓으므로 그 힘이 배나 들어 이 구역을 맡았던 안동과 성산부 사람들이 아직 역사를 마치지 못했다. 이에 경상도 관찰사 심효생이 10여일 더 두고 마저 끝낸 다음 돌려보내자고 건의 하였다.
그러나 정희계는 왕에게 아뢰기를
“백성들은 속일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씨 뿌릴 때가 되었으니 모두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게 하라. 하시어, 듣는 자들이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안동과 성산부 사람들만 남겨두면 그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마치지 못한 것은 지세가 그런 까닭이지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함께 돌려보내게 되었다.
여기서 관찰사의 행정편의주의 견해보다 균형을 잃지 않은 애민정신이 배인 판한성부사의 건의를 왕이 채택하였음을 읽을 수 있다.
이어, 7월 12일조에 그의 죽음을 알리는 기록이 나온다.
“판한성부사 계림군 정희계 졸(卒)하다”

600년 수도 수장 재임중 순직 최초

조선시대와 대한민국에 걸친 600년 수도, 한성과 서울의 수장으로서 재임 중 순직한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제2대 판한성부사 정희계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한성판윤으로 불리는 조선의 서울시장은 줄잡아 1,400여명에 이르는데, 그 중에서 첫 시장이 성석린이고 그 뒤를 이어 두 번째가 정희계인 것이다. 아직 쉰의 나이가 안 된 그가 오로지 개국 초기의 왕도 건설에 매진하다 세상을 뜨게 되었음이 아마도 태조 이성계의 마음을 못내 안타까움에 저리도록 하였을 것이다.
일찍이(1392년) 그는 남은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기로 결정한 교지를 선포하고, 배극렴·조준·정도전·김사형·이제·이화·이지란·남은 등 대소신료와 한량·기로들과 함께 국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에 나아가 왕위에 오르도록 추대하여 수창궁에서 임금으로 등극하게 한 개국공신의 한 사람이다.
정희계의 본관은 경주, 호는 양성헌(養性軒), 시호는 양경(良景)이며 아버지는 문하평리 월성군 휘(暉)이고 부인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질녀다. 관력으로는 공민왕 때 출사한 이후 대호군, 밀직사, 문하평리 겸 응양위 상호군을 거쳐 조선조에 들어 판개성부사, 좌명개국공신, 참찬문하부사, 팔상위 대장군으로 계림군에 봉해지고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역성혁명을 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정희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어땠을까? 도탄에 빠진 백성과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의 명분으로 목숨을 걸고 세상을 뒤집은 혁명동지로서 남다른 동지애가 있었을 터, 새 세상의 변화를 함께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크게 슬펐을 것이다. 유명(幽明)을 달리한 원훈공신에 대한 예우로 사패지를 내린 일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정희계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그 허물을 트집 잡아 봉상시에서 시호를 안황(安荒) 등으로 나쁘게 지어 올려 임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니, 왕은 특명으로 시호를 ‘양경(良景)’이라 하고 관련된 자들에게 장형을 가하거나 유배시켰다. 이 대목에서 이성계가 정희계를 각별히 아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는데, 아마도 신덕왕후 강씨(康氏)의 친정 조카사위라는 인척관계가 대업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두터운 신임으로 은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묘소아래 아파트공사 비례 아닌가

오늘날, 그 후손들이 오랫동안 보전해 온 땅이었던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의 버스공영주차장 뒤편, 새로 뚫린 도로 건너에 조선개국 일등공신(朝鮮開國一等功臣) 계림 부원군(鷄林府院君) 양경공 정희계(良景公 鄭熙啓) 묘소란 안내 표석이 있고 3분쯤 걸어 올라가면 묘소에 이른다.
묘소 아래에 후손들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재실 하나 짓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당국의 법적 불허로 이루지 못했다고 종중에서는 말한다. 이 고총(古塚:오래된 무덤) 자체가 서울의 역사를 징표하는 편린일진대, 옛 일을 추억할 전통 양식의 건축물 하나를 허락하지 못하는 당국의 편협한 처사가 매우 서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서 당국은 그 터에 아파트 신축을 허가하여 지금 망치 소리가 요란하다.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 연상되는 장면이라 하겠다. 고려 사회의 적폐를 혁파하려 했던 6백 년 전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이건 보통 비례(非禮)가 아니다.
동대문 바로 옆 성곽 아랫부분을 가 본 사람들은 안다. 성곽을 쌓아올린 네모 모양의 돌들에 당시 공사를 한 책임자들의 이름이 층층이 새겨져 있다. 그 일을 정희계가 지휘 감독하였다는 상상이 아파트 현장 앞에서 오버랩 되는 걸 어이하랴.
양경공 정희계의 묘소에 참배하고 내려오며 이런 변명을 입속으로 뇌어본다.
‘자동차 달리는 소리는 소음이 아니라 백성들의 노동가요 장단으로 들으시고, 신축 아파트에는 고달픈 서민들이 이웃으로 들었다고 그러려니 여겨 주십시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7호 (2016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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