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골 되어도’ 조국의 수호신

‘백골 되어도’ 조국의 수호신
골수반공 야전형 일생
朴定仁(박정인) 백골사단장, 88세로 별세
아들· 손자와 함께 3대 육사가문

‘풍운의 별’, ‘백골사단장’으로 불린 골수 반공주의 박정인(朴定仁) 장군이 지난 2월 3일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박 장군은 생시에 전화를 받을 때도 ‘백골’ 구호를 외치고 죽어서 백골이 되어서도 조국과 민족의 수호신이 되겠다고 맹세한 최강골 야전(野戰) 지휘관의 일생이었다.

아들·손자와 함께 3대의 육사가문

박 장군(88)은 우국충정 넘치는 원고를 정기적으로 경제풍월에 기고해 왔으며 매년 창간 기념행사에 참가하여 친북·종북세력 섬멸을 강조하는 야전 지휘관의 기백을 보여 왔다. 장군의 회고록 ‘풍운의 별’(1990, 홍익출판사)을 통해 6.25 참전기와 백골사단장 시절의 비사(秘史)를 알고 있는 참석자들과 시국을 이야기할 때 여든이 넘은 노장군의 열변이 장내를 뒤흔들기도 했다.
장군은 함남 신흥군에서 태어나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남하한 골수 반 김일성 반공주의자로 외아들 박홍건(63)이 육사 31기(대령 전역), 장손 박선욱(31) 대위가 육사 64기로 3대가 육사를 나온 군인가문을 이루었다.
장군은 뛰어난 전투 지휘력을 발휘해 왔지만 장군의 문턱에서 가장 늦게 승진하여 백골사단장에 취임했다가 1973년 북의 DMZ 기습사격에 즉각 사단포로 응징하여 김일성의 노발대발로 유엔군사령부 마저 문제를 삼아 해임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나 노환으로 별세하기까지 한 번도 우국충정의 일편단심을 변함없이 지켜온 외곬 군인정신의 삶을 살았다.

북진 길, 인접연대 구출작전중 포로

장군이 6.25 초전 후퇴를 겪고 북진 대열에 나섰을 때 1950년 10월 20일, 평북 상천에서 소령진급 전문을 받고 19연대 작전주임을 맡았다. 압록강을 향해 진격할 때 인접 제2연대 본부가 중공군에 포위됐다는 연락을 받고 구출작전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고 말았다.
백병전까지 벌인 전투 중에 연대장 박광혁 대령이 복부 관통상으로 전사하고 박 소령은 부하들과 함께 북쪽으로 끌려갔다. 도중에 중공군이 북한 정치보위부로 포로들을 이관하여 압록강변의 소학교에 수용되어 미군소령 등 유엔군 포로들을 만났다. 다시 벽동의 인민중학교로 이동하니 곧 만주로 끌고 간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11월 25일 밤, 부하 6명과 함께 인민군 복장으로 탈출하여 어느 산간 빈집으로 숨어들었다가 인민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인민군사령부로 끌려가 보니 중좌계급 자가 함흥학생사건 때 선전부장 녀석이었다. 그가 박 소령을 알아보고 “이남으로 도망 간 악질분자”라며 고문을 가해 실신했다. 깨어나 보니 인민군 1군단 정찰부 수용소로 국군 6사단 7연대 최영수 부연대장 등 수십 명이 먼저 끌려와 있었다.
영하 15~30도의 강추위 속에 2차 탈출을 감행하여 2월 28일 한탄강을 건너기까지 한 달간 수많은 사지(死地)를 넘고 넘었다. 운산에서 구정을 만나 산간마을로 접어들어 함경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인민군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의정부를 거쳐 3월 14일 서울로 들어와 한강변에서 미군 뉴스 촬영반을 만나 “나는 적지를 탈출한 국군 소령이오”라고 말하여 미 8군 사령부 정보처를 거쳐 육본에 도착하니 육사 동기생 유근국 소령이 반겨주고 인사국의 이인건 소령은 “유령이 살아왔느냐”고 했다. 박 소령은 이미 전사처리 되어 동기생들이 조위금 54만 원을 거둬둔 것을 내주어 한 달간 휴식비용으로 요긴하게 사용했다.
박 소령의 적진 탈출은 직선거리로도 360km에 달했다.

대대장시절 고지탈환 후 중상 후송

1952년 11월 10일, 열망하던 37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하니 포로 신세로 겪은 학대에 대한 복수욕이 넘쳤다. 전선은 휴전을 앞둔 치열한 공방전으로 삶과 죽음이 눈 깜짝할 사이였다. 박 중령은 북한에서 넘어와 죽기 전에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5일간의 휴가를 얻어 12월 23일, 서울 동대문 조양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곧장 부대로 복귀하자 원통리 북방 812고지 탈환명령이 떨어져 거뜬히 탈환에 성공하자 신혼의 새신랑이 큰 전공을 세웠노라고 3군단장 강문봉 소장, 사단장 윤춘근 준장, 연대장 김재명 대령이 극구 축하했다. 그러나 얼마 뒤 OP의 수류탄 폭발로 하사관 셋이 사망하고 박 대대장도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급히 인제 이동외과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장기파열로 인공 항문을 내어 2차 수술이 시급했다. 헬기편으로 서울 중앙청 옆 36 육군병원에 입원했지만 병원 군기가 엉망이라 곳곳에서 환자들의 신음소리가 요란했다. 때마침 이승만 대통령의 병원 시찰을 맞아 박 중령이 직소하자 “병원장을 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박 중령은 다시 부산에 있는 스웨덴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끝내고 야전군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전투 잘하는 장군으로 울산지역 사령관

1961년 3월 대령으로 진급하여 5군단 인사참모로 5.16 전날에는 원주에 있는 1군사령부 창설기념 체육대회 선수단을 인솔했다. 이튿날 아침에 박정희 장군의 5.16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군 내부에 5.16에 대한 찬반양론이 퍼져 나왔지만 박 대령은 6월 24일 2사단 31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전투지휘관으로 용맹을 떨쳤다.
고참 대령으로 장군 진급심사 때마다 탈락하다가 막바지에 준장으로 진급하여 1968년 6월 파월 백마사단 부사령관 부임 날을 꼽고 있었다. 그런데 2군 사령관 문형태 중장이 1.21 사태 후 전투경험이 많은 박 장군을 울산 특정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키로 했다는 상부의 명령을 통보해 왔다. 대통령 훈령으로 울산지역 군·관·민 대간첩작전 통합지휘권을 맡게 됐다는 요지였다.
당시 박 대통령은 울산 공업단지를 자주 시찰한 후 박 장군을 만나 “왜 한 번도 돈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대통령의 시찰코스에는 민·관 가릴 것 없이 예산타령이었던 시절이었다. 박 장군은 오직 한 가지 통신망 확충이 애로라고 건의하여 즉석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당초 울산지역 사령관직을 꼭 1년만 맡긴다고 했지만 3년이나 근무해야만 했다. 그 뒤 경인지구 예비사단인 33사단장을 맡았지만 실미도 사건 관련 지휘책임을 이유로 조기 사임함으로써 야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72년 3월 3사단장에 취임했으니 장군의 소망이 성취된 셈이다.

백골사단시절 적의 도발 응징 신화

▲ 박정인 장군의 회고록 ‘ 풍운의 별’ (1990, 홍익출판사)

3사단은 월남한 반공 청년단이 주축을 이룬 백골정신 부대이다. 박 장군은 부임하자 예하 부대를 순시하며 무기고의 열쇠를 풀고 모든 화장실의 소변통을 적진을 향하도록 바꾸고 총검술의 표적도 북측으로 돌려 세우도록 명령했다.
백골용사 선서문을 작성하여 모든 장병들이 암송토록 지시했다. 백골용사 선언문은 북진통일의 선봉, 백전백승의 백골용사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명령에 복종하고 책임완수로 조국과 민족에 충성하자는 요지였다.
사단장 취임 얼마 후 1973년 3월 봄, 모든 절차를 거쳐 DMZ 표지판 보수작업을 북측에 통보한 후 작업을 완료하고 귀대할 무렵 북측 559 GP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아 대위와 하사가 중상을 입었다. 박 장군이 적진 559 GP를 관측시킨 후 155미리, 105미리 사단포를 동원하여 박살을 내고 부상 장병들을 구출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항의와 유엔군사령부의 권유로 1973년 4월 3일 사단장직에서 해임되니 불명예라기보다 골수 야전 지휘관의 명예로 기록되기에 이른 것이다. 박 장군은 전역 후에도 현역 못지않게 군인의 정신을 실천하고 좌경세력 추방과 호국정신 함양에 앞장서 “장군의 애국충정은 영원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보여 왔다.
고 박정인 장군의 명복을 기원하는 심정이 간절하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9호 (2016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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