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商의 얼굴 ‘마루한’

▲ 한창우(韓昌祐) 마루한그룹 회장

밀항소년이 50조 사업가로
[韓商의 얼굴 ‘마루한’]
韓昌祐(한창우) 한상드림 아일랜드 회장
돈버는 것은 기술, 돈쓰는 것은 예술

재일동포 기업인 한창우(韓昌祐) 마루한그룹 회장이 세계한상(韓商)지도자의 얼굴로 활약한지 퍽 오래됐다. (사)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회장으로 지난해 10월에는 속초시 마레몬스 호텔에서 제36차 세계한상지도자대회를 주재한 바 있다. 마루한그룹은 파친코, 카지노, 볼링 등 레저산업으로 매출 30조 원을 넘어 50조 원에 도전하고 있는 교포기업이다.

‘코리안 네크워크’의 대표 얼굴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는 지난 1993년에 설립되어 매년 세계한상대회와 세계한상지도자대회를 갖고 750만 해외동포사회와 조국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코리안 네트워크’이다. 현재는 세계 68개국, 246개 한인상공인 단체와 경제인들로 구성되어 한창우 회장과 수석 부회장단, 각국 대표 부회장단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지난해 36차 세계한상지도자대회는 정기 총회 후 모국투자 설명회를 갖고 세계한상드림 아일랜드 투자유치, 모국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해외인턴 및 취업촉진을 결의하는 성과를 올렸다.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차원의 드림아일랜드는 한창우 회장이 대표를 맡아 영종도 항만매립 부지에 국제 종합관광 레저 허브를 개발하려는 사업계획이다. 총 투자 2조400억 원에 일자리 창출 1만8천 명, 경제적 파급효과 27조 원을 내다보지만 국내외 여건 변동으로 투자자 모집이 부진한 실정이다.
이 사업은 지난 2012년 초 한인상공인총연합회가 국토해양부에 투자의향서를 제출한 후 항만개발 기본계획 고시,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설립, 외국인 투자기업 등록을 거쳐 국토부에 사업 제안서를 제출했다. 그 뒤 2014년 2월, 해수부가 경제장관회의에 드림아일랜드 개발계획 보고를 통해 2020년까지 호텔, 쇼핑몰, 리조트, 골프장, 컨벤션센터 등 글로벌 비즈니스 네트워크 핵심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드림아일랜드는 항만 재개발 준설토 투기장 96만 평(316만㎢)을 종합관광 레저 허브로 개발하겠다는 민간제안 사업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투자자 유치가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 영종도 드림아일랜드 조감도. (사진=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둥글둥글 ‘마루한’ 정신의 입신출세기

▲ 학생 시절

꿈이 많은 한 회장(1931년생)은 망국(亡國)시절 식민지 청소년으로 자라 8.15 해방공간에 진로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파친코사업으로 입신하여 오늘의 한상 지도자가 되어 모국투자에 열정을 쏟고 있다.
한 회장의 레저산업 성공기는 자서전 ‘16세 표류난민에서 30조 기업가로’ (2013, 서울문화사)에 요약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1947년 10월, 친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하여 1953년 호세대학 졸업 후 임시직으로 파친코점에 입사하여 이를 인수경영하고 1957년 클래식 커피숍으로 기반을 굳힌 후 1972년 볼링산업을 위해 ㈜니시하라산업을 설립했다가 1999년 ㈜마루한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법인명 ‘니시하라’는 일제하의 창씨개명을 상호에 올린 것이고 ‘마루한’은 둥글다는 마루에 한씨 성을 조합한 상호이다. 사업종목인 파친코 구슬이 둥글고 볼링공도 둥글지만 인간관계도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해야 한다는 의미다.

▲ 결혼식

한 회장의 사업전선에는 일본사회의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었지만 ‘마루한’ 정신에다 조직원들과 함께 ‘헝그리정신’, ‘하면 된다’는 일체감으로 기어이 성공한 것이다. 사업의 성공단계에 따라 주변과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글로벌 경영을 통해 국제사회에도 공헌하면서 재일한국상공회의소 회장이 되고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장으로 한상의 얼굴로 성공했다.
한 회장의 기업 공헌은 일본 총리로부터 곤주호상, 일본 정부로부터 수이호상을 받고 한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청룡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KBS의 해외동포상 수상 등으로 설명된다. 또 경남대 명예 경제학박사를 비롯하여 동아대 명예 법학박사, 부산대 명예 경영학박사, 서울여자대 명예 문학박사 및 중국 연변대 명예 국제정치학박사 등 명예를 쌓았다. 마샬제도 공화국 최고훈장, 캄보디아 왕국 1등 대십자상도 수훈했으니 기업가로서 온갖 명예가 넘친다고 평가된다.

파친코 가게 임시직에서 레저사업가로

한 회장이 일본으로 밀항한 것은 일제하에 노무자로 끌려간 형님 한창호 씨가 규슈의 벽돌공장에서 일하다가 패전 직전 귀국하여 일본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키웠기 때문이다. 삼천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구제중학 3학년생인 16세의 한창우 소년이 10년 연장의 형님 안내를 받아 밀항선으로 시모노세끼항에 도착, 여관에 숙소를 정해 놓고 외국인 등록 절차를 밟았으니 신분이 보장됐다.
이어 도쿄를 거쳐 인구 1,000여 명의 시골 모도마을에 도착하여 감자사탕을 제조하는 조선인 7~8가구 아이들의 한국어 교육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유학생 조직인 ‘조선장학회’를 통해 1948년 4월 호세대 전문부 3년, 경제학부 2년을 졸업했다. 학비는 형님과 자형의 도움을 받았다.
대학시절의 한창우는 막스, 레닌, 모택동 책을 탐독했다. 프랑스 유학을 목표로 제2 외국어는 불어를 배웠다. 그러나 졸업 후 일본사회의 취업난에 모국의 6.25 전란으로 파리유학의 꿈도 멀어졌다. 매형이 운영하는 미네야마 파친코 가게에 임시직으로 취업한 것이 인연이 되어 아예 가게 ‘센바’를 인수경영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7년에는 요정의 거리에 클래식 커피숍 ‘루체’를 개업, 밤늦게까지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니 소문이 퍼져 단골이 생겨 성업을 이루었다.
이 무렵 고배 슈쿠가와고를 졸업한 18세의 스즈키 나가코라 양을 소개 받아 평생의 반려로 결혼했다. 한국인이라는 고백을 듣고 처가에서 몽땅 반대했지만 둘 사이의 사랑이 깊어 간소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결혼 후 클래식 커피숍 ‘루체’의 인기로 영국제 자가용도 구입하고 가게도 확장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레스토랑 빌딩을 건축, 입구 자동문과 실내 에어컨에다 대만 전문요리사 등 레스토랑 인기가 퍼져나가자 결혼을 반대하던 처남들도 찾아와 사업에 동참했다.

1966년 12월, 미네야마 청년회의소가 발족한다기에 전화를 했더니 “니시하라씨, 당신은 한국사람이라 입회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 로타리 클럽에서도 입회사절이라는 거부를 당한 적이 있었다. 파친코를 풍속산업으로 분류 은행융자도 어려웠다. 같은 풍속산업인 요정에는 쉽게 융자해주니 역시 차별로 비쳐진다.
이럴수록 한 회장은 이를 악물고 차별을 극복해야겠다는 의욕이 넘쳤다.

볼링사업 확장후 각종 액운겹쳐 고난

이 무렵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볼링사업이 미래 레저사업으로 유망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1967년 12월, 최첨단 도요오카 프렌드 볼링장 16개 레인을 오픈했다. 도요오카 시장과 시 의원을 초청, 테이프 커팅을 하자 인기가 솟구쳤다. 곧이어 미네야마 프렌드 볼링장, 가이바라 프렌드 볼링장을 연속 오픈하여 교토호텔에 사장실을 두고 커피숍 루체, 카지노점, 볼링장을 진두지휘했다.
힘과 용기가 용솟음치는 38세의 혈기로 민단 교토지방본부 부단장도 맡았다. 볼링사업 전담 법인으로 니시하라산업을 설립하자 볼링이 인기 스포츠로 부상하여 연일 TV 프로로 소개됐다. 자신만만한 의욕으로 1972년 12월, 시즈오카시 중심에 120레인의 세신 프렌드 볼링장을 오픈하니 숙원을 이룩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1973년 세계적 오일쇼크가 볼링산업에도 타격을 미쳤다. 도요오카 카지노점의 화재사고가 나고 오사카 국세청이 미네야마 레스토랑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잘못된 탈세 혐의였다. 여기에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미국으로 홈스테이 갔던 장남이 사고사를 당했으니 액운이 한꺼번에 겹쳤다. 볼링장이 빚더미에 올라 휴업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10월, 오랜 휴업 끝에 세신 프렌드 볼링장을 60레인으로 재가동하며 ‘볼아피아’로 개칭했지만 빚을 갚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sankyo사가 개발한 신형 파친코 가게 ‘피버’가 인기폭발로 구원해 주었다. 1981년에는 연간 매출 30조 원을 돌파함으로써 은행 빚을 청산할 수 있었으니 지성감천 격이었다.

YS 방일시 궁중만찬 초대 영광

▲ 미네야마 야구장 기념비 제막식

이 무렵 미국에서 사망한 장남의 보험금 2억 원이 나와 8억 원을 합쳐 10억 원을 미네야마 공공야구장 건립기금으로 기부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교토시에 마루한 본사 빌딩을 건축하고 ‘니시하라산업’을 ㈜마루한으로 개칭했다.
이때부터 한 회장의 이름이 고액 납세자로 신문에 보도됐다.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도 이때 설립했다. 그러다가 민단 교토지방본부 단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상대방이 한 회장의 부인이 일본여성인데다가 아들들이 모두 일본 국적이라고 비난한 점이 가슴 아팠다. 한 회장은 낙선의 굴욕을 왕성한 사업욕으로 전환시켜 파친코 사업의 제패로 설욕할 수 있었다.

▲ 김영삼 전 대통령과…

때마침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 진영으로부터 일본특별 보좌관 및 후원회장 요청이 있어 수락했다. YS가 1992년 12월 대선에서 당선되고 한 회장은 재일한국인상공회연합회 제5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 회장이 취임한 후 이를 재일한인상공인회로 개칭했다.
YS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궁중만찬회에 초대받아 일왕과 악수할 수 있었다. 외국인 초대객에게만 일왕이 악수했다. 특히 한 회장의 부인이 한복을 입고 만찬에 참석한 것이 보람이었다. 참석자 모두가 일본의 전통복장이었지만 한복을 입고 참석한 사람은 손명순 여사, 민단중앙본부 정해룡 단장부인, 공로명 주일대사 부인 및 한 회장 부인 등 4명이었다.

돈 버는 것은 기술, 돈 쓰는 것은 예술

▲ 국민훈장 ‘ 무궁화장’ 을 받았다.

1990년경 마루한은 점포수 1위로 올라섰다. 이때 미국 오클라호마대를 나온 차남이 입사하여 개혁을 주도하며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오사카 흥업은행에 다니던 3남도 입사하고 엘리트 인재들을 스카웃 했다.
마루한 경영에 젊은 감각의 개혁을 도입하면서 시부야 마루한 파친코 타워를 오픈하고 전국 진출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마루한 매출 50조 원, 종업원 3만 명 시대 도전이었다. 마루한 정신인 노력, 신용, 봉사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 공헌해야겠다는 웅대한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한 회장은 돈 버는 것은 기술이나 돈 쓰는 것은 예술이라고 규정했다.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개발 계획도 한류라는 글로벌 아이콘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세계의 한상들과 함께 써내려가겠다는 꿈이다. 영종도 96만 평의 부지 위에 한상들의 성공신화를 가득 채워 후손들이 성공과 노력을 배우고 다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열정을 말해 준다.
비록 아직은 투자자 모집이 부진하지만 한 회장은 이를 기어코 완성하겠다는 의욕이 넘친다. 16세의 표류난민에서 30조 기업을 일으키고 50조 원 목표에 도전하고 있는 그의 집념과 확신인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0호 (2016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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