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두말 쌓아 ‘형제경영’ 전통기록

▲ 매헌 박승직 창업주.

상인정신의 장수기업사
[두산그룹 가업 120년]
‘박승직 상점’ 이래 창업주 4대 승계
한말, 두말 쌓아 ‘형제경영’ 전통기록

창업 이후 대대로 수성(守城)에 성공한 장수기업사(長壽企業史)가 소중하게 여겨진다. 서구사회에는 수백 년의 장수기업이 수두룩하다는데 왜 우리나라는 100년 기업사마저 희귀할까.
국내 최고(最古)기업 두산(斗山)그룹이 창업 120주년을 기록했으니 한국 기업사로 보면 거의 국보(國寶)급 기록으로 예우돼야 할 판이다.

3대 종로 거상 중 유일한 장수기업

▲ 1934년 당시 2층으로 증축해 새롭게 단장한 박승직 상점의 1층 소매부 모습.

두산 지주회사가 지난 3월 24일 주총에서 창업주의 4대인 박정원(54) 회장을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함으로써 그룹 총수 자리에 올라섰다. 신임 박 회장은 창업주 증조부 박승직(朴承稷), 조부 박두병(朴斗秉), 부친 박용곤(朴容昆) 명예회장의 장남이니 두산가의 적통을 승계한 국내 최장수 상인가문의 가업(家業) 4대이다.
두산가의 120년 기업사와 4대 혈통 승계가 왜 소중한 기록으로 평가될까.
한국의 기업사는 옛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선비사상 아래 상공업이 천시되어 민족기업의 발상이 서구 산업사회에 비해 한참 늦었다. 또 동양권 내에서도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장수기업이 드물어 100년이 넘는 기업사라야 겨우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구한말 개화기에 근대 직물공업의 선구인 태창(泰昌)그룹이 크게 번창했었지만 당대에 무너졌고 일제하에 종로의 일본상인들을 압도했던 조선 갑부 박흥식(朴興植)의 화신백화점도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으니 장수기업의 유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 경제사의 대가였던 조기준(趙璣濬) 박사의 ‘한국기업가사’(1974, 박영사)에 따르면 한말 서울 종로의 3대 거상이 백윤수(白潤洙), 김윤면(金潤冕), 박승직 상점이었다. 백윤수 상점은 청국 비단장사로 고관과 귀족들을 상대로 번창했고, 김윤면 상점은 면포 중심으로 상권을 장악했지만 대물림에 실패했다.
3대 거상 가운데 보부상 출신의 배오개 상인 박승직 상점만이 끈질긴 상인정신으로 후계에 성공하여 오늘의 두산그룹으로 발전하고 있으니 얼마나 귀중한 기업사 인가.

창업주의 상인정신과 가업정신 DNA

▲ 1936년 경, 연지동 자택에서 두산 일가 가족들의 기념사진 촬영. 앞줄 오른쪽 의자에 앉은 이가 매헌 박승직 창업주, 아기를 안고 있는 이가 부인 정씨,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연강 박두병 회장, 부인 명계춘 여사.

박승직 상점으로부터 두산그룹으로 발전해 온 장수기업 DNA를 더듬어 보면 창업주의 가업(家業)정신과 상인(商人)정신이 원동력이다. 박승직은 국권이 쇠퇴하고 있던 한말의 난세를 겪어보고 개항(開港)이후 일본상인들의 상권침탈과도 맞서 부지런히 발로 뛰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근자성공’(勤者成功)의 신념으로 치부하고 이를 다시 후계 양성의 지침으로 삼았다.
창업주가 40대 후반에야 얻은 장남 박두병에게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가 주판을 알고 돈의 귀중함을 익히게 한 후 박승직 상점 후계자로 선임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또 박두병이 옥호를 ‘한말 두말 쌓아올려 산을 이룬다’는 두산(斗山)으로 바꿔 그룹을 축성한 것도 선대의 상인정신 계승이었다.
창업주는 상인이 정치 쪽을 기웃거리면 망하게 된다는 확신으로 자녀들을 엄격히 훈육했다. 연강 박두병이 경성고상(현 서울대 상대)을 나와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4년을 근무 후에 박승직 상점에 입사한 것이 바로 선친의 뜻이었다. 이어 박두병도 많은 자녀들에게 상업학교와 은행근무 후 두산그룹에 입사토록 똑같이 훈육했다.
창업주 매헌(梅軒) 박승직은 일본상인들과 경쟁하며 한성상업회의소 상의원으로 활동하고 포목상조합을 설립하여 조합장을 맡아 조선인 상공업계를 대변해 왔다. 이 같은 선대의 내력마저 대물림하여 박두병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고 그의 3남 박용성 회장,

▲ 조선은행 재직시절의 연강 박두병 회장.

5남 박용만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계승했으니 결국 3대에 걸쳐 대한민국 상공인의 독보적인 얼굴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박승직상점 경영혁신과 동양맥주 인수경영

박승직 상점의 경영을 혁신하고 두산그룹을 일으킨 박두병 회장은 선대가 주주로 참여했던 소화기린맥주를 불하 받아 동양맥주(OB)로 개편, 발전시키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박 회장은 동양맥주 외에 두산산업, 두산건설, 한양식품 등 오늘의 그룹 기반을 축성한 의미에서는 제2의 창업으로도 평가된다.
일제하의 소화기린맥주에 조선인 주주로는 삼양사의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사장과 매헌 박승직 사장이 참여했지만 나중에 이를 불하할 때는 수당이 불참하여 박두병이 단독으로 인수했다.
8.15 해방으로 일제가 물러간 후 소화기린맥주는 미군정 하에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어 좌익계의 난동 속에 공장가동이 멎어 있었다. 이때 사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 매헌을 찾아가 관리인 역할을 요청했지만 이미 80세 고령이라 손을 내저었다. 다시 36세의 박두병에게 요청하자 역시 거절했지만 거듭된 간청으로 겨우 승낙을 받아 관리지배인을 맡았다.

▲ 연강 박두병 두산 창업주.

박두병은 일인이 남기고 간 원료 등을 수습하여 해방공간에서 첫 맥주를 생산하여 박승직 상점을 통해 판매했다. 얼마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박두병이 대표 취체역으로 본격 가동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6.25 전쟁으로 다시 영등포 공장이 폐허지경이 되었다.
박두병 일가는 피난을 못 가 인민군의 적치(敵治) 3개월을 숨죽여 지냈다. 그해 12월에는 경기도 광주로 피난했던 창업주가 86세로 별세하여 2일장을 치른 후 부산 피난시절을 거쳐 1952년 5월 정부의 귀속재산 불하 때 인수하여 그룹의 주력업종으로 발전시켰다.
박두병이 소화기린맥주 관리지배인 시절 사원으로 입사한 정수창(鄭壽昌)이 전문 경영인으로 성장하여 박두병 회장 시대 경영을 뒷받침한 영원한 두산인의 발자취를 남겼다. 정수창은 박두병의 경성고상 후배로서 대학 졸업 후 만주은행에 근무하다 8.15로 귀국하여 사원으로 입사, 좌익계의 폭동과 파업이 극심할 때 능통한 영어로 미군정 당국과의 대화와 협상 역할로 박두병을 보좌했다.
뒷날 박두병이 대한상의 회장으로 대외활동에 바쁠 때 정수창은 동양맥주 사장으로 경영을 맡고 박 회장이 62세의 한창 나이로 별세한 후에는 예상을 뒤엎고 두산그룹의 회장을 맡았다. 당시 정수창 회장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박승직 창업주의 상인정신과 박두병 회장의 두산정신을 받들어 그룹을 이끈다고 말했다.

장남 박용곤의 형제경영과 차남의 반란

▲ 정수창 전문경영인 전 두산 회장

정수창 회장의 전문경영 시기를 거쳐 창업주 혈통의 형제경영 전통이 시작됐다. 박두병 회장의 장남 박용곤(朴容昆) 회장이 1981년 3월, 49세 때 그룹 회장을 맡았다.
일제시에 태어난 박 회장은 6.25 때 해군으로 복무한 후 워싱턴대 상과를 나와 선대의 뜻대로 한국은행 조사부를 거쳐 두산에 입사하여 동양맥주 사장, 합동통신 사장 등을 역임한 후 그룹 총수가 됐다. 그러나 1991년 두산전자(PCB 원판제조)의 낙동강 페놀수지 오염사건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그룹 회장직을 사퇴해야 하는 큰 홍역을 치렀다. 이 기간 중에 다시 정수창 회장이 복귀하여 2년에 걸친 사죄, 보상, 기여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사건을 수습했다.

▲ 1950년대 영등포 동양맥주 공장 전경

그 뒤 박용곤 회장은 복귀하여 1996년 12월 그룹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끝낸 후 둘째인 박용오 회장에게 총수직위를 물려줬다. 두산의 형제경영은 선대의 확고한 유지(遺志)였다.
박용오 회장도 선대의 훈육 따라 경기고, 뉴욕대 상과를 졸업한 상인교육 코스로 총수직을 맡아 두산타워 준공, 한국중공업과 대우종합기계 등을 인수함으로써 그룹의 기반을 크게 확충했다. 또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등 대외활동에도 눈부신 역할을 보여줬다.
그러나 회장직 10년 만에 가족회의의 뜻에 따라 3남 박용성 회장에게 총수직을 물려줄 차례에 불복함으로써 ‘형제의 난’이 표출되고 말았으니 두산가문의 수치였다. 박용오 회장은 당시 맏형 박용곤 명예에게 계열사 하나쯤 분리하여 독자경영을 희망했지만 가족회의가 반대하자 내부의 비자금 조성과 착복 혐의를 검찰과 언론에 고발했으니 돌출 악수나 다름없었다.
이 사건으로 두산가문은 검찰의 조사와 법원의 징벌을 받았고 고발 당사자는 투신자살로 마감했으니 선대에 대한 불효이자 그룹 기업사의 측면에서도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다만 형제의 난이 수습된 후 두산의 형제경영은 지금껏 순조롭게 이어져 오다가 올 들어 박 명예의 장남에게 총수직을 계승시켰으니 창업 120주년의 상인가문의 4대 경영의 지속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남 박용성, 5남 박용만 상의회장 계승

▲ 박용곤 회장
▲ 고 박용오 회장

두산가의 형제경영 세 번째인 3남 박용성 회장은 명쾌한 논리와 확고한 시대정신으로 그룹을 이끌며 대외활동에도 뛰어난 족적을 남겼다. 박 회장은 경기고, 서울대 상대, 뉴욕대 경영대학원, 상업은행, 한국투자금융 등 선대의 훈육 코스를 거쳐 동양맥주, 두산중공업 회장 등을 역임했다.
박 회장은 박식한 전문지식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가는 곳마다 소신을 자신 있게 피력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룹의 사업구조 조정기에 주위의 만류에도 알짜배기 흑자기업을 매각하면서 “우리한테 걸레는 남에게도 걸레 아니냐”는 말로 흑자이던 맥주도 팔고 코카콜라도 팔아 치웠다.
박 회장이 선대의 발자취를 쫓아 대한상의 회장을 맡은 것은 전임 김상하 회장의 강력한 추천이었다. 당시 김 회장은 박용성 회장을 두고 “머리통이 크고 영어도 잘하는 스포츠맨 신사 아니냐”고 말했다. 실제로 박 회장은 큰 머리통에 든 것이 많아 눈치 보지 않고 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자주 했었다. 또 유도와 역도 등 스포츠계에서도 활약하고 IOC 위원으로 스포츠 외교에도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대한상의 회장직을 끝낸 후에는 중앙대 이사장으로 총장 직선제 폐지, 학과 통폐합 등 대학개혁의 모범을 보였지만 의욕과 추진력이 넘쳐 반개혁 집단을 비판한 험구 몇 마디로 불명예 퇴진해야만 했다.
두산가의 4남 박용현 회장만은 상인가문의 특례로 상과대학을 마다하고 경기고, 서울대 의대, 하버드의대병원 전임의를 거쳐 서울대 병원장을 역임했으니 6남 가운데 유일한 외도에 속한다. 박용현 회장은 선친이 중병으로 입원했을 때 의사로서 진단에 참여했고 병원장을 퇴임한 후에는 선친의 뜻을 기리는 연강재단 이사장, 두산건설 회장을 거쳐 그룹회장으로 사업구조를 사업형 지주회사로 전환시켰다.
5남 박용만 회장은 경기고, 서울대, 보스턴대 대학원 등 형제들과 같은 코스를 밟은 후 두산건설 사원으로 출발하여 기조실장, 두산인프라코어어 사장을 거쳐 총수직을 맡아 열정과 추진력으로 수많은 M&A 성과를 이룩했다. 또한 대한상의 회장직마저 승계하여 국회에 경제활성화 관련 입법 청원을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대통령의 정상외교 수행 경제사절단 대표로 폭 넓은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박 회장은 때가 되어 장조카 박정원 회장에게 그룹 총수직을 넘겨줬지만 대한상의 회장직은 계속 맡고 있다.
두산가 6형제 가운데 막내 박용욱(56) 만이 형제경영 대열에서 빠져 그룹과 별개인 이생그룹을 독자 경영하니 특례이다. 제4대 그룹총수를 맡은 장손 박정원 회장은 고대 경제과, 보스턴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두산산업 평사원으로 출발하여 여러 계열사를 거쳐 장수기업의 대를 물려받았다.

두산가의 장수기업 뿌리와 원류

▲ 박용성 회장
▲ 박용현 회장

두산가의 상인정신과 장수기업 DNA의 뿌리와 원류를 되돌아보면 창업주 매헌 박승직 상점 시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매헌은 선대 박문회(朴文會)의 다섯 아들 가운데 셋째로 농사꾼 팔자를 타고났지만 경기도 광주군에 인근한 송파(松坡)장을 다니면서 상인정신을 호흡했다.
타고난 건강 체질에다 천성의 근면 절약정신으로 매헌의 보부상은 전국을 제집처럼 나다녀 신용과 돈을 쌓아 30대 초반에 종로 4가 배오개에 ‘박승직 상점’을 열었으니 큰 성공이었다. 조기준 박사의 ‘한국기업가사’에 따르면 박승직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근면 대성한 면포계의 거장, 당대의 거상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박승직 상점이 개업할 무렵, 개항 물결 따라 일본상인들이 곳곳에 일본인 상업회의소를 만들어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박승직이 일본상인과 합작, 공익사(共益社)를 설립하여 일본으로부터 면포를 수입한 것도 일상들과의 경쟁이었다.
당시 조선인 상공단체로는 전국을 누비던 보부상(褓負商) 조직, 관청에 물자를 공급하던 공인(貢人)조합, 어용상점인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한 ‘시전인’(市廛人)조합 등이 있었지만 일상들과 맞서기에는 조직력이 미약했다. 이에 맞서 한성(漢城)상업회의소가 설립되자 박승직이 상임의원으로 선임되고 경성포목상조합을 만들어 조합장이 됐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1915년 10월 민족상인 조직인 한성상업회의소를 해산시키고 ‘경성상업회의소’로 흡수시키고 말았다.
이 시절 박승직이 민족상인 대표로서 활약한 상인정신의 집념과 강인한 체험이 뒷날 박두병에 의한 두산그룹 축성 및 대한상의 회장직 대물림으로 나타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 박정원 ㈜두산 지주회장이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되어 그룹 회장을 승계했다. (사진=두산그룹)

또 하나 두산가의 장수기업 요인에는 매헌의 재혼부인 정정숙 여사의 ‘상인가문형’ 부업(副業) 내조를 꼽을 수 있다. 정 여사는 나중에 며느리와 함께 화물운송업을 경영한 실적도 남겼다. 이보다 앞서 국산화장품의 효시로 꼽히는 ‘박가분’(朴家粉)을 정 여사가 가내 수공업으로 만들어 냈으니 상인가문형 내조 역시 장수기업에 일조를 했다고 보는 것이다.
박가분은 당시 신문에 ‘부인 화장계의 패왕’이라 소개되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박승직 상점에 혼숫감을 장만하러 오는 고객들에게 박가분 한 갑씩을 덤으로 주다가 입소문이 퍼져 나가 대량 생산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뒤에 납중독이 문제되자 박가분 생산을 자진 폐업하고 말았으니 화장품산업사로 보면 안타까운 실패에 속한다.
‘박가분’ 관련 또 다른 측면의 큰 의의를 전해준 이야기도 기억한다. 박가분의 ‘부업내조’ 동기가 청국산과 일본산 화장품이 기생세계를 독점하는 소문을 듣고 이를 국산화하기 위해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당시 일제는 독립운동 관련 지사(志士)들의 언동을 염탐하기 위해 화류(花柳)정책을 실시했다. 명월관 등 유명 요릿집에 평양기생, 일본기생들을 모아놓고 지주계급과 한량들의 동태를 감시한 것이 골자였다. 이때 기생들이 청국 화장품과 일본 화장품을 애용한다는 소문이 퍼져 나오자 배오개 상인의 부인이 박가분 생산 아이디어를 실행했다는 이야기다.
두산가의 상인정신과 장수기업 요인들을 더듬어 가면 수많은 일화와 사연들이 발굴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경제가 세계 10대권에 진입한 지금 한국형 장수기업사의 축적이 소망스럽다는 인식으로 두산 120년사가 영원히 발전하기를 소망하는 심정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1호 (2016년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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