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相春회장, 창업 39주년 도전성취
경영위기 때 거래 은행이 신용대출

▲ (주)에스씨엘(SCL) 이상춘 창업회장

성실·근면·신용자본
지성감천의 자수성가
李相春회장, 창업 39주년 도전성취
경영위기 때 거래 은행이 신용대출

자동차 부품 전문기업, 에스씨엘(SCL) 이상춘(李相春) 창업회장의 성공기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자수성가(自手成家)의 표본이다. 이 회장은 경북 김천시 대덕면 산촌서 자란 15세 소년으로 상경한지 올해로 45년, 창업한지 39년만에 창업 1세대의 도전과 성취 목표를 거의 달성했노라고 자부할 수 있다. 이 회장은 올해 쉰아홉으로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다.

스프링을 창업종목으로 첨단부품까지

이 회장의 창업 종목은 손톱크기의 볼펜용 스프링으로 보잘 것 없었지만 각종 자동차 부품을 비롯한 산업용 가전용 첨단 부품전문으로 크게 성장했다. 동업계에서는 SCL의 국내외 제조공장과 공급망 전반을 글로벌 경쟁력에 앞서가는 선두그룹으로 꼽는다.
그가 굳은 입지(立志)의 꿈을 안고 맨손으로 상경하던 1971년 겨우 15세 소년으로 비비고 기댈 언덕은 없었다. 이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하던 6남매의 장남을 미지의 세계로 떠나보낸 그의 모친은 통곡했다. 이상춘 소년은 창업 이후 고비 때마다 모친의 통곡을 회상했다. 결국 그의 성공은 지성감천(至誠感天)이었다고 볼 수 있다.
5.16 정부가 배고픈 국민들에게 밥 먹여 주겠다는 공약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민·관 합동으로 수출과 건설을 독려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의 서울은 이미 만원(滿員)이라고들 했다. 각지에서 일터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젊은이들이 넘쳐났지만 휴일과 휴식이 없는 박봉의 노동이 고작이었다.
이상춘 소년도 집안어른이 운영하던 용산구 원효로 18번지, 볼펜용 스프링 공장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기숙사에서 침식하며 온갖 잡역으로부터 스프링 제조공정을 배우고 거래처를 방문하며 유통시장의 생리도 익혔다. 그로부터 6년간 중노동 실습과정을 거쳐 독립해야 할 기회가 찾아 왔다.
일본서 기술을 습득하여 스프링 공장을 경영하던 창업주가 중병으로 50대 후반의 한창 나이로 타계하니 회사를 떠나야 할 상황이었다.
1977년 건장한 청년이 된 21세의 이상춘이 배운 것이라곤 달랑 스프링 한 가지 뿐이었다. 여기에 타고난 성실과 근면에다 거래처와의 관계에서 쌓은 신뢰가 밑천이었다.

▲ (주)에스씨엘 생산제품. <사진=SCL>

무자본 1인창업 6년만에 부천 공장

납품거래로 친숙해진 주위사람 중에 창업을 권고하며 도와주겠다는 이들이 있었다. 나라의 수출이 100억 달러에 이른 시기, 자동차 산업을 비롯한 기계공업과 전자산업이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으니 창업의 적기라고 부추겼다.
1977년 5월, 마침내 용산구 신계동에 소규모 자영업 수준의 ‘대신스프링’ 간판을 내세운다. 비록 무자본(無資本) 창업으로 출발했지만 용산 스프링 6년간 보고 배운 경험으로 제조과정과 판매 유통 채널에 관해서는 너무나 익숙하여 자신이 있었다.
창업 1년이 지나 1978년 8월에는 구로구 독산동으로 공장을 확장 이전하며 ‘원일정공’(元一精工)으로 개칭했다. 당시 구로동 일대는 밤낮없이 일하는 분위기였다. 수출산업 단지에는 전자, 기계, 섬유 수출업체들이 빽빽이 들어서고 각 공장 입구 게시판에는 남녀 직원 모집공고가 나붙었다.
1인 창업으로 출발했던 원일정공도 직원수가 20여명으로 불어나 공장다운 면모를 보였다. 20대의 이상춘 사장은 1인 다역의 중노동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섭게 일했다. 때마침 거래관계로 친숙해진 분이 평생의 반려자를 소개해 주었다. 첫 만남에 이금순 양에게 호감을 느껴 결혼하니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천성의 내조자로 직원들의 숙식을 돌봐주니 공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창업 6년째인 1984년 3월, 부천시 도당동에 번듯한 제1 공장을 설립하니 자수성가의 큰 기초가 마련됐다. 부천은 생소한 타향이지만 고향선배가 이곳에서 동업자와 부품공장을 운영하다가 갈라서게 되자 고향후배에게 동참을 권유하여 인연을 맺은 곳이다.
원일정공의 창업의 뿌리는 스프링이지만 2만여 종에 달한다는 자동차 부품 세계는 무한 개척의 대상이었다. 자동차용 각종 제동장치 부품, 현가장치, 조향장치에 소요되는 핵심부품이 수없이 많았다. 젊은 창업자 앞에 고강도와 고탄성을 요구하는 화스너(Fastener) 제품과 스프링(Spring)류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품의 성능과 안전이 완성차의 품질과 성능을 좌우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사장은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했기에 기술과 기능의 중요성과 마케팅의 중요성을 너무나 깊이 인식하여 기술개발과 품질보증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원일정공과 거래하던 조흥은행이 1987년 6월 유망 중소기업으로 선정했다. 신용평가와 리스크 관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조흥은행이 유망 중소기업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은 금융거래상 신용대출의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곧이어 부천에 제2 공장을 증축한 것도 이 같은 배경이었다.
㈜SCL의 성장과정을 들여다보면 여기까지가 이 회장 사업의 자수성가 기초가 확립된 단계라고 분석된다.

▲ 1989년 일본을 방문해 기계전시 박람회장을 둘러보는 이상춘 회장(왼쪽 세 번째). <사진=SCL>

품질과 신용으로 소량 다품종 확장성장

80년대를 마감한 후 1990년대는 본격적인 성장기로 기록된다. 1990년 3월, 원일정공을 법인화 하고 인천 남동공단 공장(1995.10), 반월공단 공장(1996.7) 등 사세를 확장하고 2001년 5월에는 당진 공장을 설립함으로써 국내 자동차 산업의 성장기를 뒷받침하는 전문 부품업체로서 신용과 명성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어 2004년 5월에는 창업주의 영문 이니셜을 내세운 ㈜SCL로 개칭하고 중국 천진 공장으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고 2007년에는 화성 공장도 설립했다. 이 같은 확장 성장기의 기세가 2010년 5월, 모범 중소기업인 대통령 표창, 2011년 12월, 500만 달러 수출의 탑 수상으로 나타나고 다시 중국 베이징 공장 설립으로 SCL 브랜드가 동업계 내에 크게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SCL의 주력제품은 프레스, 스프링 등 다양하지만 모두 소량 다품종 생산 체제로 설계, 금형, 제작, 납품에 이르는 전 과정이 품질과 안전관리 등 온갖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은 늘 작업복 차림으로 공장 방문하고 독려·격려하는 현장경영으로 일관했다.
본사는 부천시 원미구 옥산로 255번지에 두고 있지만 전국 공장과 영업소 및 해외공장을 순회 방문하느라고 쉴 날이 없다.
국내시장에는 한라그룹 만도를 비롯하여 현대차 그룹의 현대모비스 등 자동차 업계와 삼성전자 등 가전업계 등에 공급하고 수출은 미국, 중국, 인도, 프랑스 등 주요 10개국으로 내보낸다. 유통시장에서는 부천, 구로동 등 전국 11곳에 영업소를 운영한다.

▲ 회사 설립 12년이 지난 1989년, 사장실에서 집무하는 이상춘 회장. 당시 33세였다. <사진=SCL>

소량 다품종 생산체제의 특성상 품질, 납기에다 애프터서비스 등 신용이 생명이다. ㈜SCL이 일찍부터 환경시스템 ISO14001 인증, 품질시스템 TS16949 인증, SQ 인증서 등을 확보하여 신뢰를 쌓은 것이 이 때문이었다. ㈜SCL은 R&D 부문은 24시간 연중무휴로 모든 제품의 품질과 안전을 보증한다고 자부한다.

캄캄절벽 부도를 이겨낸 고난의 시기

모든 제조업에는 시설투자 관련 입지환경에다 금융비용과 씨름하고 판매과정에는 시장환경 변화에 충격을 받는다. 회사 내부 측면에서는 인사와 노무관리에 고심해야 한다.
㈜SCL의 확장 성장기 도중에 거의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협력자와 구원자가 나타났다. 창업주 이 회장의 신념과 의지에다 인간관계의 축적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고난에 흔들리지 않는 깊은 신앙심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기도하기도 했다.
1980년 제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으로 유류파동의 여진에다가 10.26 국변에 따른 사회혼란이 거래처들을 부도로 내몰았다. SCL은 대형투자로 한창 금융비용이 무거울 때라 일부 사채금리가 연 60%로 치솟았다. 캄캄절벽 상황이었지만 일본과의 부품수입 거래가 살아 있어 부도위기만은 모면할 수 있었다. 이때 제조업 부문만이 아니라 유통관련 영업소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다시 1992년 IMF 외환위기 상황 때 거래처의 95%가 도산하여 끝내 5억원 상당의 부도를 만나 자살을 생각하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렀다. 36세의 인생 황금기에 자살을 생각하다 발상을 전환하여 일본 부품업계의 대리점 사업에서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차차 부채를 상환해 가면서 오랜 역사를 지닌 경쟁업체 관계이던 대동정공을 인수하기에 이르렀으니 거의 재창업이나 다름없었다.
이 회장은 죽을 고비를 잊지 못해 집무실 벽에는 당시 부도수표 33매, 2억4천만원 상당을 액자로 보존하여 지금껏 걸어두고 있다.

▲ 집무실 벽에는 당시 부도수표 33매, 2억 4천만원 상당을 액자로 보존하고 있다. <사진=배만섭 기자>

금융거래 신용으로 은행측이 위기관리 협력

이 회장은 악몽과도 같은 그때를 회상하며 잊을 수 없는 은인으로 당시 조흥은행 지점장 박한수 씨를 먼저 꼽는다. 박 지점장은 만약 신용대출 결과가 잘못되면 “내가 옷을 벗을 수밖에 없다”면서 구원의 손길을 폈다.
조흥은행은 ㈜SCL을 유망 중소기업으로 선정한 거래관계로 이상춘 회장의 경영방식을 신뢰하면서 당시 외환위기 파장의 전개과정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SCL이 재창업 수준으로 안정, 성장기반을 회복하자 은행 측은 2002년 거래관계이던 상가건물의 인수를 권고했다. 이때 이 회장은 부도를 경험한 직후라 난색을 표시했지만 은행 측이 인수 후 임대료 수입으로 유지 관리가 가능하리라는 예측을 제시하고 일부 인수대금의 신용대출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이에 용기를 얻어 본사 뒤편에 위치한 이 상가를 인수함으로써 오늘의 상록수장학재단 기금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뒤 3,500평, 5층 건물인 SCL의 본사 사옥도 은행 측의 소개로 인수했으니 금융거래를 통해 신용을 쌓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오늘의 이상춘 회장의 경영철학 바탕에 신용이 자본이라는 원칙이 살아 있어 몇 차례 고난과 위기를 극복했음을 잘 증언해 준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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