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6·25사변 60주년⑤]

6.25 남침전쟁 체험기록

죽다 살아남은 3년 지옥

LG상남언론재단, 신문기사 요약

전국 산하 피로 물든 민족 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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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상남언론재단이 6· 25전쟁기간의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삶을 4대 신문(경
향, 동아, 서울, 조선) 보도기록을 통해 전해준다.>

6.25 전쟁을 어떻게 겪고 살아남았을까. 올해로 김일성의 남침 60주년을 맞지만 그때의 인민군과 따발총과 치안대의 폭거를 잊을 수 없다. LG상남언론재단(이사장 유재천)이 전쟁기간의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삶을 4대신문(경향, 동아, 서울, 조선) 보도기록을 통해 전해준다. 전쟁이 시작된 1950년6월25일 이후 정부는 부산으로 피난 가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은 짓밟히고 흩어졌다. 신문기록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을때 부터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다시 삶을 챙기기 까지 3년2개월간(1950.10~53.12)을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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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서울신문 1950년10월1일, 동아일보 10월4일, 경향신문 10월11일, 조선일보 10월23일자 신문>

‘38선 돌파 북진, 통일이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1950년 10월1일, 제일 먼저 속간호를 발행한 서울신문은 ‘정부 환도, 환희 충만’이라 보도했고 다음날은 ‘총후(銃後) 부흥궐기’, 그 다음날은 ‘이기봉 서울시장 양곡배급’ 담화발표를 중요기사로 다뤘다.

동아일보는 10월4일 복간호에서 ‘국군 38선 돌파, 북진’, 괴뢰군 ‘항복이냐, 전투냐’고 물었다. 다음날은 실종사원을 찾는 사고(社告)를 게재하고 ‘직원 10일내로 등록’을 독촉했다. 적치(敵治) 3개월간 무지막지한 도륙과 납치가 있었다. 애국지사 1만여명 소식 묘연, 국회의원 16명 행방불명 기사가 인민군이 허겁지겁 도주하며 수많은 요인들을 끌고 갔음을 말해준다.

10월5일에는 ‘승리다. 통일이다’, ‘원산 맹진 중’이라는 북진의 기세가 보도되고 (서울신문), 10월7일에는 ‘서울시민 행불 42만명’, 서울주변 산악에는 ‘천인공노할 만행의 시신’, 이익흥(李益興) 내무 ‘공비적발 협력 당부’가 실렸다.(동아일보) 10월11일 ‘국군 원산돌입’, 장면 대사 유엔 안보리 연설, 10월17일 ‘곡산, 영흥탈환’ 등 북진이 계속 됐다.(경향신문) 이날 ‘쌀 인천도착’ 기사가 굶주린 피난민들의 눈에 번쩍 띄었다 .

광고면에서는 ‘사람 찾기’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고 불법무기 등록 공고, 의용군, 사관 후보생 모집공고 등이 피를 쏟고 있는 전선의 급박사정을 말해준다.

10월21일, ‘평양 탈환’, 백선엽 부대장 ‘세계 전사상 경이적 작전’(경향), ‘모란봉에 태극기’, ‘김일성 회천도주’(동아) 등이 보도됐다. 광고면에서는 ‘요리계의 왕자 아서원 신장개업’이 눈길을 끌고 ‘오늘부터 쌀 배급’ 기사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조선일보는 방응모 사장과 임직원의 납북으로 10월23일에야 복간 ‘풍전등화, 괴뢰 잔당’, ‘순천, 신포 탈환’을 보도했다.

적도 평양 탈환, 김일성 도주

평양 탈환 후 10월26일 ‘적풍(敵風) 사라진 평양’, 군사재판, ‘자발적 부역 악질 극형’, 정일권(丁一權) 계엄사령관 ‘쌀, 뗄나무 반입’ 등이 보도됐다.(경향) 전쟁을 치루면서 계엄령으로 쌀과 땔나무를 조달해야 할 만큼 삶이 급박했다. 적치하에 공산당에게 부여했던 일이 죄가 되어 극형을 받았다.

‘괴뢰 만행 폭로’, ‘납북인사 도처 학살 등 평양 탈환 후의 처참한 정경’(동아)이 보도되고 서울 시경국장은 ’쌀 매점 단속‘을 경고했고 한편에서는 정부 환도 시민축하대회가 열렸다.

10월28일 ‘국군 압록강 도착’, 신성모 국방 ‘중,소에 전범 송환촉구’(동아), ‘국경에 태극기’, 정동예식장에서 함경남도 탈환축하대회(조선)도 보도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이 무렵이다. 10월31일 ‘39년만에 입북(入北)’(동아), ‘평양 탈환 감개무량, 환호 진동’(조선), ‘북한에 자유선거’(서울) 등 이 박사의 평양 모습을 감격으로 보도했다. 이날 동아일보는 ‘내일부터 가로등 복구’, ‘야간 통행금지 9시로 연장’ 및 신문 보급소 모집 광고를 실었다.

11월1일에는 전범자 ‘국제법정에서 심판하자’, 11월3일, 유엔 구호물자 도착, 11월6일 국군 길주시 돌입, 호주군 부산항 도착, 중공군 2개 사단 참전 등 전선이 다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경향) 중공군의 참전에 따른 국제여론 비등, 맥아더 장군 ‘사전 포고없는 중공군 참전 유엔 제소’(동아) 각 신문사와 초중고 학생들의 위문품과 위문편지도 소개되었다.

11월10일자 ‘김일성 승용차 이승만 대통령에게’가 가장 눈길을 끈다. 국군 8127부대가 회천 묘향산 전투에서 소련제 BHC 승용차를 노획, 국방장관을 통해 적장(敵將)의 승용차를 경무대로 진상했으니 승전의 상징이었다.(동아) 11월23일 혜산진 탈환, ‘압록강에서 백두 영봉 선명’(경향), ‘혜산진 무혈 입성’(동아), 12월12일 ‘2주일 혈전, 장진호 선봉부대 도착’(동아) 등 북진 개가 속에 이승만 대통령, 워커 장군과 ’서울방위 협의‘ 기사가 예사롭지 않다.

‘보이소, 피난 왔소, 유람 왔소’

해가 바꿔 1951년 1월2일 신년 축하식 기사 아래 ‘목욕탕 개업’, 시경 주선으로 ‘요금 절반으로 인하’(조선)가 눈길을 끈다. 1.4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피난간 신문들이 ‘트루먼 대통령, 한국은 선(善)과 정의의 상징’(동아)이라는 신년 메시지를 전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항하여 최후의 1인까지 총궐기하라고 당부했다.

1월11일 ‘전선 이탈 도주하는 부패 권력자’들을 고발하는 지탄기사(동아)와 “정부는 부산을 떠나지 않는다”, “제주도 도피 행위 금지” 등의 보도가 당시 심각한 민심동요를 대변한다. 피난수도 부산의 몰지각한 흥청망청 풍조가 도마위에 올랐다. 댄스홀과 유곽이 번창하여 전쟁을 망각하고 있는자들에게 “보이소, 피난왔소, 유람 왔소”라는 제목을 달았다.(동아)

1월18일 동경발 기사는 ‘서울 재탈환 작전, 철갑부대 선두 진격’(동아)을 맥아더 사령부 소식통을 인용보도했다. 새 5,000원권 발행과 문화인들이 ‘결전 구국대회’를 가졌다는 소식이 이채롭다. 1월20일 ‘100만 청년 무장요청’, ‘여성궐기’ 등 구국대열과는 달리 ‘유한족(有閑族) 거제도 강제이송’의 사회풍조 단면도 전해준다.(동아)

2월 1일 ‘유엔, 중공 탄핵안 가결’(경향), ‘중공 침략자 규정’(조선)이 1면 톱이고 사설은 ‘죽느냐, 사느냐’, 사회면은 ‘개전 7개월 적항공기 275대 격추, 적 사살 24,000명’으로 보도했다. 국군의 38선 돌파가 최대의 관심이던 2월5일 이 대통령, ‘38선 정지 불가’, 정일권 총장 ‘오직 적 섬멸 뿐’(경향), 2월12일에는 ‘서울입성, 잔당 소탕’이 보도됐다. 그러나 2월25일 ‘한강 백사장서 백병전’, ‘적, 서빙고, 용산, 남산주변 포진’(동아) 등 아직도 서울 수복이 끝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이 무렵 워싱톤에서는 만주 폭격과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형골만 남은 서울 숟가락도 안 남아

전쟁 중에도 봄이 왔지만 살인적 물가고와 생활고가 심각했다. 3월7일, 피난 생활의 찌든 모습 아래 정력제 해구신을 선전하는 태백산인 활수당(活水當)이 ‘효능 백발백중’이라 광고했다.(동아)

3월16일, 1.4후퇴 이후 다시 찾은 서울의 삶이 ‘70일의 수난 설움’이고 신성모 국방은 ‘38선은 없다’는 말로 북진을 뒷받침했다. 피해가 극심한 지역으로는 소공동, 충무로, 서대문, 중앙청 등, 비교적 건물이 온전한 곳은 서울시청, 법원, 덕수궁, 반도호텔, 창경원, 국립국장 등.(동아)

3월24일, ‘형골만 남은 서울’에는 숟가락, 부지갱이 하나 안 남았다. 건물피해는 전쟁초기 보다 15%더 심했다. 이 판국에도 쌀 폭리창고가 적발됐다. 3월30일, 국회에서는 벽보사건, 거창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이 폭로(동아)되고 4월9일, 전쟁의 혼란을 틈탄 맥아더 라인 침범 일본 어선들이 나포됐다. 4월 10일, 뒤늦게 속간한 서울신문은 ‘우리는 돌아왔다’, 영국해병대 ‘북 성진, 기습 상륙’, 김백일(金白一)소장 전사소식을 보도했다. 광고면에는 한국은행, 식산은행(현 산은), 저축은행 등이 수도수복을 축하했다. 4월13일,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고 후임에 리지웨이 대장이 임명됐다.(서울)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또 다시 서울시민을 불안케했다. 4월24일, 벤프리트 장군이 강력 반격을 다짐(동아)했다. 거창사건의 책임을 지고 조병옥 내무장관, 김준연 법무장관이 사표를 제출했다. 방위군으로 참전했다 귀환한 장병들의 8할이 병신이 됐노라고 보도됐다. 이 와중에 ‘금강산 호랑이’로 불린 김종원 대령의 언론인 구타사건으로 기자단이 경무대에 항의하고 몇일 뒤 이철원 공보처장이 언론자유 보장을 다짐하는 정부 입장을 발표했다.

4월29일, 대한노총이 5월1일 메이데이를 ‘필승 근로일’로 제정, 평소의 두배나 일하겠다고 결의(동아)했다. 국민방위군 제도는 5월1일자로 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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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5전쟁 참전군과 피난민 행렬>

먹고 살길없는 피난민 떠돌이 신세

5월3일, ‘전선 평온’, 9일간 ‘적사상자 7만5천명’(조선), 5월6일, 신성모 국방 사표수리, ‘문둥이 환자 격리시급’ 기사가 피난시절 처참한 거리풍경을 대변했다.(동아) ‘1만여명 거리 걸식’ 속에 전상으로 죽고, 병들어 죽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구세약국의 백수환(百壽丸)이 숨찬병, 담해소, 홍역기침, 폐질환 등을 치료해 준다고 선전했다.

5월8일, 피난민 서울 잔류 7만명, 수원에 15만명 기사가 먹고 살길이 없는 떠돌이 신세를 말해준다.(경향) 사치품 판매금지와 야간통행금지 연장 기사도 서울의 고달픈 삶의 단면을 증언한다.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기밀비 하루 300만원(동아)이 국민의 분노를 폭발 시킬 수밖에 없었다. 개각으로 내무 이순용, 법무 조진만, 국방 이기붕, 농림 김문환, 총무처 한동석 장관이 취임했다.

5월11일,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이 ‘국민에게 고함’ 성명을 발표하고 사임했다.(동아) 5월17일, 김성수(金性洙)부통령이 이갑성(李甲成) 경쟁자를 누르고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됐다.(경향) 아직도 전쟁이 치열했던 6월11일, 전선의 르뽀기사가 ‘철의 3각지 붕괴, 적 총퇴각 개시’라고 전해준다.(서울) 6.25 1주년을 맞아 서울탈환 회고 특집이 ‘9.28 반공 설욕’, ‘감격의 북진 2000리’(경향), 7월10일 ‘정전회담’, 7월14일 ‘개성회담 중단’ 등 협상 난항을 전해준다.(경향)

7월31일에도 ‘금화 북방 적 격퇴’ 소식과 함께 ‘정전회담 기로’(조선) 등을 보도했다. 그러나 가을이 닥아오니 서울 창신동의 우리상회가 ‘가을 씨앗 팝니다’라고 광고했다. 8월10일, 서울-부산 무선전화 개통과 함께 서울 구호병원들이 약품과 인력부족으로 사면초가라고 보도됐다.(조선)

한강 도강파, 잔류파 갈등 시절

10월에 접어들어 한일협상이 개시됐지만 처음부터 난항이다. 김태선(金泰善) 서울시장이 전쟁고철 수집을 건의했지만 계엄사령관이 월권이라고 반박하고 고철 반출금지를 명했다.(조선) 부산에서는 여성들의 일본 밀항이 적발됐다.

명륜동 윤석중(尹石重) 아동연구소가 ‘민족부흥은 어린이로부터’라고 강조했다.(조선) 전쟁고아들을 돌봐야 한다는 취지이다. 광고면에 영문타자학원생 모집이 눈에 띄고 성병환자들을 위한 약국과 의원들의 광고가 전시하의 풍조를 말해준다.

11월26일, ‘휴전선, 어디서 갈라지나’(조선)가 정전을 앞두고 진지 쟁탈전으로 희생이 컸음을 말해준다. 12월1일 정전회담장의 남북 기자들 간의 설전(경향)이 보도되고 각종 성병 관련 광고와 취업 관련 타자학원 모집 광고가 잇따르고 있다. 반면에 대한부인회 1,500명은 일선 김장봉사 활동을 벌였다. 60만 서울시민들은 노력동원에 너무 시달린다고 호소하고 한강의 자유통행을 건의했다.

서울이 함락과 수복을 거듭하면서 한강 도강파와 잔류파로 갈라져 갈등했던 스글픈 정경이 떠오르는 기사다. 전쟁 중에도 X-MAS가 찾아와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선에 행복 있으라”고 축하했고 비록 1단짜리 기사이나 ‘경주 국립공원 내년 착공’이 퍽 신기하게 돋보였다.

포로수용소 난동… 사령관 구금

또 다시 해가 바뀐 1952년 1월19일 ‘대통령 직선제안 부결’ 기사와 함께 ‘농우(農牛)부족 심각’ 기사가 절실하다. 농우가 부족하면 식량증진이 어려우니 축우자금 방출을 서둘러야 한다는 뜻이다.(동아) 같은날 대일 수산물 수출기사도 실렸지만 전쟁 통에도 1,000원권 위조지폐가 적발됐으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1월20일, 이승만 대통령이 60마일 영해선을 지키기 위해 평화선 Lee Line을 선포했다.(동아) 북한억류 국군의 명부 일부가 처음으로 실렸다.(서울) 광고면에는 술광고가 부쩍 늘어났다. 청주 백화와 월계관, 화랑 위스키 등이 음주를 권하고 산부인과 전문의원의 광고도 여러 곳이다.

1월21일, ‘백설의 지리산 작전’이 공비들의 주력을 분쇄했다.(경향) 광고면에는 치질 ‘무통완치’, 부산극장에서는 가극 ‘콩지팟지’ 공연을 알리고 있다.

공무원들의 학력위조가 말썽이 되어 1월23일 ‘공무원 이력재심’ 기사가 실렸다.(동아) 자칭 학사들을 일소하겠다는 정부 방침이다. 한일국교가 없던 시절이라 일본서 고등사범을 졸업했다는 식의 허위학력으로 속인 사례가 많았다.

2월20일, 고관 부인, 소설가 김광주(金光洲)씨 구타사건이 큰 뉴스이다.(경향) 자유세계 창간호에 실린 김씨의 창작소설 ‘나는 너를 싫어한다’의 여주인공이 어느 고관부인을 지칭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던 모양이다. 여러신문에 후속기사가 쏟아지고 대구 문인들의 항의 궐기도 있었다.

2월24일 ‘헬싱키 올림픽 참가 서광’ 기사가 눈길을 끈다.(경향) 기금 10만 달러 모금에 벤프리트 장군과 무초 대사가 참여했다는 내용이다. 2월26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난동 진상이 보도됐다.(경향) 17만명의 포로 가운데 친공과 반공으로 갈라져 수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친공 포로들이 인공기를 올리고 사령관 돋드 준장을 납치 구금한 이상한 사건이 있었다.

40만명 기아 신음… 초근목피

무엇보다 쌀이 생명이었다. 5월10일 ‘쌀, 쌀, 쌀, 기아선상 신음 40만명’(경향), 경북 이재민들 ‘초근(草根)연명’, ‘농림부가 아는지 모르는지’라고 추궁했다. 5월12일, 거제 포로수용소장 돋드 장군이 감금 78시간 만에 풀려났지만 친공포로에게 양보한 내용은 숨기고 있다.(동아) 이 사건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물러나고 클라크 대장이 부임했다.

학생들이 원족을 다녀오며 만취 추태를 부려 ‘학원 부폐상’(경향)으로 고발됐다. 부산 제1고등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술 취해 비틀거리며 노래불렀다는 내용이다. 이날 부산극장에서는 가극단 ‘창공’의 한미합동 밴드 36명이 특별출연한 ‘남매는 단 둘이다’를 공연한다고 선전했다. 전쟁과 이별의 피난살이 서러움을 한 없이 읊었을 것이다.

5월12일 한일회담 관련, 변영태 외무부장관이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천명(서울)했고 국회 서민호 의원은 육군대위 살인혐의로 아들과 함께 기소됐다. 뒤에 국회는 서의원 석방을 결의하며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5월30일, 부산 정치파동 진상이 보도되고 김성수 부통령이 사임했다.(동아) 당시 장택상 국무총리는 국회의원들을 끌고 간 것은 대통령의 통치권에 속한다고 답변했고 원용석 헌병사령관은 치안질서 교란에 대비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정치혼란 중에도 평화극장에서는 화류계의 애화를 다룬 ‘사랑의 성좌’를 상영했다. 광고란에는 ‘애국흑판’ 선전이 꾸준히 실렸다. 난리 중에 흑판도 없이 가마니 교실에서 공부했던 시절이다.

6.25 2주년 이승만 저격사건

6.24일, 반공포로 27,000명 석방을 ‘돌아오는 대한의 아들’(서울)로 보도했다. 6.27일, 부산 충무로의 6.25 2주년 기념식전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한 유시태(62)씨가 체포됐다.(경향) 다음날 이 대통령 저격배후로 국회 김시현(金始顯)의원이 지목됐다.

북한 출신 반공포로들은 ‘멸공구국’ 삐라를 살포했다.

광고면에 국보화학공업의 ‘원자탄 빈대약’이 눈길을 끈다. 배고픈 피난살이에 이와 빈대가 너무나 성 가셨지만 빨래할 틈도 없고 약도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6070세대는 소름이 끼친다.

8월9일, 이승만 대통령 재선, 함태영(咸台永)부통령 당선(서울), 이 박사는 ‘통일대업 달성’을 약속했다.(조선) 술광고 백마, 화랑 위스키, 명성 소주가 눈에 띈다. 광복절 축하 광고에도 양조장 이름이 올라있다.

11월5일, ‘미군 철수 부당성 재론’(조선), 뉴욕발 ‘철군은 한반도 상실’ 보도가 급박한 국제정세를 말해준다. 광고란에 ‘사람찾기’가 수두룩하다. 생이별 혈육 소식을 두줄 광고에 매달리고 있던 시기이다. 모처럼 대한증권 광고가 나와 국채와 주식을 사겠다고 선전했다.

11월7일,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 ‘한국안보 확고’라는 희망기사가 실리고(조선), 12월5일에는 ‘취임전 한국 방문’ 기사로 침략군에 대한 응징을 기대하는 심정을 담았다.

원조 ‘고무다리’… 대원 의수족 선전

휴전의 해 1953년 2월11일, 부산 국제시장에 큰불이 나고 원주시장도 화재피해가 심각했다.(조선) 2월 17일, 100대1의 통화개혁으로 시장이 일시문을 닫고 국회가 긴급소집됐다. 이 날짜 광고란에 대전의 대원 의수족(義手足) 제작소가 ‘원조 고무다리’를 선전했다.

피난길에 팔다리 잃은 불구자가 수두룩했던 시절, 의족을 ‘고무다리’라고 쉽게 불렀었다.

3월6일, 소련 스탈린이 뇌일혈로 졸도했다고 보도되어(조선) 한국전 정전협상에도 중대한 영향이 예고됐다. 이날짜 중앙극장은 목포의 눈물 이난영 악단의 공연, 시공관은 신협의 신춘공연으로 시민들의 시름을 달래주겠다고 선전했다. 신춘 공연에는 이해랑, 김동원, 장민호, 강효실, 황순원 등 인기최고가 총출동했다.

4월22일, 부상포로가 교환됐다.(조선) 그러나 영양실조에다 학대가 극심했다. 5월24일, 밀주가 성행하여 양식 100만톤이 낭비된다는 고발기사와 함께 절량농가에 대한 특별배급을 촉구했다. 6월3일,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제관식이 있고 서울 단성사에서는 영화 애수(哀愁)가 상영됐다.

6월4일, 소집불응 의사 15명에 영장, 6월6일, 8만대장경 보존위기, 6월19일, 반공포로 석방은 ‘민족 자위권’(경향) 등으로 보도됐다. 6월20일,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은 “내 책임하에…”라고 천명했고 신문은 ‘여덟겹 철조망 넘어 자유찾다’(조선)로 보도했다. 이때 여학생들은 반공포로 석방 환영시위를 벌였다.

딘소장, 레닌모 헌양복으로 귀환

7월5일, ‘간통죄에 양형제’ 획기적 입법이 크게 보도됐다.(경향) 간통하면 남녀에게 똑같이 2년이하 징역에 처하겠다는 내용이다. 입법 과정에 국회 방청석은 여성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7월22일, 한국 최초의 여판사가 탄생했다.(경향)

황윤석(黃允石.25) 여판사가 “영감님 아닌 미스 황이라고 불러주세요”라고 했다. 불행히도 나중에 황 판사는 의문의 자살로 마감했다.

7월28일, 휴전조인 소식을 ‘통일염원 좌절’, ‘냉전의 고민’으로 표현했다.(경향) 3년1개월 전쟁이 미결로 끝났기 때문이다. 7월29일에는 ‘기이한 전투정지’ ‘7월27일 상오 10시11’분으로 보도했다.(조선)

8월7일 ‘귀환포로 서울도착’, ‘다시 찾은 광명천리’(경향), 8월9일은 한미공동방위조약 가체결, 미군 주둔권 인정 거대성과로 평가했다. 8월10일, 한일교섭 관련 서울신문이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울릉도와 독도’ 연제를 개시했다. 김일성 남로당 숙청, 박헌영, 이승엽 등 14명 처형을 ‘집안 싸움판 괴뢰집단’으로 표현했다.(경향)

9월5일, 비무장 지대 답사를 통해 국군이 오랑캐의 유골을 묻어줬다.(서울)고 소개했다. 9월6일, 6.25 초기에 참전해다 포로가 된 딘 소장이 레닌 모에 헌양복을 입고 3년 1개월만에 귀환했다.(조선) 이승만 대통령이 딘 소장에게 금성태극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9월21일, 서남지구 경찰토벌대가 빨치산 두목 이현상(李鉉相)을 사살하여 경찰관 32명이 1계급 특진했다.(서울)

북한 노금석 대위 미그기 귀순

9월24일, 북한군 노금석 대위가 미그기를 몰고 귀순했다.(조선) 노대위는 10만 달러의 상금을 받고 미국에 정착하겠다고 밝혔다. 이날짜 광고란에 숭인동 형제주점이 ‘원조추탕’을 선전했고 경기도 광주의 씨름대회와 공주의 씨름농악대회가 가을빛을 말해준다.

10월4일, 휴전감시 인도군이 반공포로 2명을 사살했다.(동아) 인도군 추방을 요구하는 데모가 벌어졌다. 10월17일, 포로들에게 남과 북을 선택하라는 설득전이 개시됐다.(경향) 12월16일, 영호남 공비 포위망 압축기사가 아직도 공비들이 출몰하여 민생을 괴롭히고 있음을 말해준다.(조선)

12월22일, 대한 연합고시 지원자가 2만9천명으로 1.7대1(서울), 새해 1월부터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연제한다고 예고했다. 대학교수 부인이 전쟁통에 춤 바람이 났다는 소설이지만 논란이 워낙 심해 인기가 폭발했다.(6.25 60주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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