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오늘을 다시 생각하는

‘거칠 것이 없어라’

북방호랑이 金宗瑞(김종서) 평전

/李德一(이덕일) 지음, 김영사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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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척단신의 성리학자 김종서 장군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조선의 유학자들을 “썩은 유학자(腐儒)”라고 힐난했다.

물론 조선에는 썩은 유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진짜 유학자들은 이들 부패한 가짜 유학자들에 맞서는 소금같은 역할을 해왔다.

이들은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철학으로 세상을 살았다.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김종서(金宗瑞) 장군도 그런 참 유학자 중 한사람이다.

김종서는 5척 단신의 문관으로 조선시대 사군 육진을 개척, 영토를 넓혔으며 ‘백성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그런 김종서는 좌의정으로 있던 단종 1년(1453, 계유년) 일흔의 나이로,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게 살해되고 만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목숨바쳐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인가?

북방을 호령한 대호(大虎), 당대 제일의 역사가였던 그가 일순간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야 했던 역사의 아이러니는 또 무엇인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이 지은 김종서평전 ‘거칠 것이 없어라’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들어있다.

역사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것임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또한 김종서를 비롯해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걸었던 인생들이 성공한 인생임을 말해주고 있다.

‘愛妓(애기)에게 뇌물 바친 사람 우대’ 모함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절제 김종서는 회령절제사로 있던 박호문(朴好問)에게 참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받은 혐의 중의 하나는 김종서가 자신의 애기(愛妓)에게 뇌물을 바친 사람들만 우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김종서는 모친의 삼년상을 다 치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혐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승지 김돈(金墩)은 세종에게 이 혐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그러나 종서는 유학자입니다. 기복(起復:상중의 관리가 벼슬에 나가는 것)하여 진(鎭)으로 돌아갈 때는 실로 애통할 때인데, 어찌 기생을 데리고 갈 리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조선 초기의 유학자는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에 모범이 된 후 치국(治國)에 나선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종서는 그런 사람에 포함되어 있었다.

김종서를 살해한 수양대군은 신숙주나 권람같은 조사(朝士)들은 물론 한명회같은 백수건달들까지 광범위하게 끌어모았다.

그러나 김종서를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김종서는 권력에 영혼을 파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 성리학적 세계관을 실천하는 유학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에게 단종에 대한 충성은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선왕과의 약속이었다. 또한 왕조국가 조선에서 단종은 군주가 된 한 어린 개인이 아니라 정상적인 국가의 상징 그 자체이기도 했다.

김종서는 정상적인 왕조국가 체제를 수호하는 쪽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헌정수호에 목숨을 건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헌정파괴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다.

진실은 결국 승리한다

김종서를 죽인 세조는 그를 역적으로 몰았고, 이후 수백 년 동안 그의 신원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가 되었다.

김종서는 죽은 후 ‘노산군 일기’와 ‘세조실록’에 계속 역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 기간에 걸쳐 수양일파를 빼고는 그 누구도 그를 역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가 죽은 54년 후인 중종 2년 ‘중종실록’의 사관(士官)은 강원도 도사(都事) 유부(柳溥)가 강릉부사 김연수(金延壽)와 말다툼 끝에 사직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때 사신(史臣)은 유부가 선정을 베푼 관리였다고 말하면서도 “연수는 김종서의 외손으로 청백한 절개가 있었다”라고 부기함으로써 외손을 빌어 은근히 김종서의 절개를 드러냈다.

조선의 거유(巨儒) 율곡 이이(李珥)도 마찬가지였다. 선조 16년 이이는 당파를 초월해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문에서, “김종서는 드러나게 탄핵받았으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여 육진을 개척하였습니다”라는 예를 들어 김종서가 많은 어려움 끝에 육진개척의 대업을 완수한 사실을 되새겼다.

사대부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 즉 청(淸)과 극도의 긴장관계에 있던 조선 16대 임금 인조는 함경감사 김기종(金起宗)에게 “옛날에 김종서는 아무것도 없는 땅에 창건하였는데, 지금 지키는 것은 이보다 쉽지 않겠는가… 경이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독려했다.

만양 김종서가 실제 역도였다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가 되었을 것이다.

임금까지 김종서의 공적 언급

조선의 사대부는 물론 임금까지 그의 공적을 공공연히 언급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그를 역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대부는 물론 임금까지도 김종서를 나라의 강역을 넓힌 영웅이자 단종에 대한 충신으로 여겼던 것이다. 김종서는 이처럼 조선의 선비들과 임금들의 마음속에서는 신원되었지만 공식적인 신원은 쉽지 않았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그의 후손들이 계속 보위(寶位)를 이었기 때문에 후대 왕들은 자신의 조상이 때려 죽인 사람을 신원시킬 수 없었다.

세조의 직계 후손들이 계속 왕위를 이으면서 김종서의 신원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하나의 묵계가 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으로 사람들의 입은 침묵시킬 수 있었지만 진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김종서가 무죄인 이상 언젠가는 그의 신원문제가 제기 될 것이었다.

드디어 김종서가 수양에게 죽임을 당한 2백27년만인 숙종 6년 (1680년), 강화 유수 이선이 상소를 올려 김종서와 황보인, 그리고 사육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것이 김종서 사후 나온 첫 신원 요청이었다. 그러나 김종서의 신원은 세조 집권의 정통성과 맞물려 있기에 쉽지만은 않은 문제였다.

영원한 가치에 목숨건 사람들

이선이 상소에서 요구한 신원 대상자 중 사육신은 11년 후인 숙종 17년에 복관시키면서 나라에서 묘우(廟宇)를 만들어 제사하게 함으로써 정식으로 신원되었다.

그러나 이는 사육신에 국한된 문제여서 김종서와 황보인은 여전히 원통한 한을 품고 누워 있어야 했다. 반면 김종서가 개척한 함경도 지역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사당을 세우고 그를 추념했던 것이다.

영조시절에도 진실은 김종서의 신원을 요구하고 있었다. 김종서가 공식적으로 신원된 것은 사망한지 무려 2백93년 후인 영조 22년이었다.

결국 승리한 것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수백 년간 구천을 떠돌며 끊임없이 요구해 승리한 진실은 오늘날 다시 위협받고 있다고 저자 이덕일 박사는 말했다.

수백 년 전 수양대군이 입증해 보인 “이기면 관군(官軍)이요, 지면 반군(叛軍)”이란 식의 뒤틀린 역사관이 가치관의 혼돈시대를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긴 것이 곧 정의라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때로는 진 것이 정의이며 탄압 받는 것이 진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인간은 패배한 정의와 탄압받는 진실의 편에 섬으로써 현실속에서 자신의 인생 자체를 희생하기도 한다.

짐승의 논리는 그런 사람들을 바보라고 조롱하지만 그런 사람들에 의해 우리 사회는 짐승집단이 아니라 사람사는 사회로 존속해 올 수 있었다.

이 책은 바로 패배한 정의와 탄압받는 진실의 편에 섰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순간의 이익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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