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종이인생, 종이노벨상 수상

명예의 전당 35인에 올라

영원한 제자인 李鍾大(이종대) 회장

“靑丘(청구)견습공에서 세계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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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인생 47년 명예의 전당 오르다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종대(李鍾大, 69) 회장은 47년간 종이와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이 회장은 ‘제지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세계제지산업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97년 헌정돼 그의 제지인생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세계제지산업 명예의 전당은 종이 산업이 집중돼 있는 미국 위스콘신주 인스티튜드 오브 테크놀로지에 있으며 현재까지 모두 35명이 헌정돼 있다고 이 회장은 전했다. 헌정된 35명 중 60%가 사망했으며 생존자 중에는 이 회장이 제일 나이 어린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사람이 죽으면 흉상이 만들어져 영구히 보관됩니다. 저의 제지 인생 47년 중 가장 보람있었던 순간이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일입니다. 1954년 대구 청구제지에 견습공으로 입사하여 기술자 출신으로 공장장, 생산부장, 그리고 최고경영자에까지 이르며 제지업계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쁩니다.”

자신은 이제 현역에서 떠난 사람이라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던 이 회장도 명예의 전당 헌정 이야기가 나오자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제지인생을 자랑스러워했다.

무궁화,장미화장지 시절

한국 최초로 무궁화, 장미 화장지 등을 개발, 우리나라 생활문화를 한층 격상시킨 그는 유한킴벌리 창립부터 오늘날까지 제지 산업 발전의 주역이자 산 증인이었다.

이렇게 한 분야에 오래 종사하며 업계를 이끌어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타고난 성실성과 주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54년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새벽 4시 이전에 어김없이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출근 전까지 제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설계하지요. 또한 93년까지 휴일이나 휴가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남이 쉴때는 더 바빴습니다. 휴일일수록 회사에 나가 하나라도 더 해놓으려고 애쓰곤 했습니다. 남이 놀 때 더 열심히 기계를 살펴보고 새로운 작업들을 연구하는 것이 보람있었습니다. 또 월급을 받고 일하곤 했지만 제가 근무하는 회사는 매번 제 회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장가서 호텔방에서 잠을 잘 때도 그날 만은 그 호텔이 온통 제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저는 모든일에 주인의식이 투철합니다.”

이처럼 이 회장의 성공요인은 남다른 성실성과 주인정신으로 대변된다.

시골 아버지 근면부터 배워

이종대 회장은 1932년 5월 28일 경상북도 금릉에서 농사를 짓던 이규하씨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흔네살의 늦은 나이에 그를 낳은 어머니 이수연씨는 이 회장이 돌이 지난 지 몇 달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 때문에 이 회장은 일찍부터 홀로서기를 배울수 있었다. 반면 쉰살이 넘은 아버지에게서는 옛날 노인네의 부지런한 생활을 배웠다.

“새벽에 논물을 보러 나가시던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며 저도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을 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한 육남매를 혼자 먹여살려야 했던 아버지의 근면함에서 열심히 일하며 사는 자세도 배웠던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의 이런 성실성은 대구사범 물리학과에 재학중일 때도 여지없이 발휘돼 학교도 졸업하기 전인 4학년 초 학장의 추천으로 제지회사에 들어가게 됐다.

“그때 내가 아마 돈이 없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학교 건물을 새로 짓는데 강의 듣는 틈틈이 그 공사장에서 일을 했거든요. 전깃줄을 잇고 스피커를 설치하고 하는 전기시설도 내가 직접했어요. 그런 모습들이 교수님들 눈에 띄었고 또 그것을 좋게 보셨나 봅니다. 학교도 졸업하기 전인 대학 4학년 초에 학장님 추천으로 제지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54년 1월, 제 나이 스물세살 때 였습니다.”

직원이 모두 팔십명으로 규모가 꽤 컸던 대구 청구제지에서 그는 처음 견습공 노릇을 했다. 다른 종업원보다 학벌이 월등히 좋은 대학생이라 하더라도 기술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낮에 제품을 나르고 쌓는 허드렛일을 하고 밤에는 혼자 기계가 또 어떻게 운전하는지 배우려고 애썼다.

꼭 한 해 뒤인 1955년 3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해 6월에 그는 스물네살의 어린 나이에 공장장이 되었다. 대학까지 나온 높은 학벌 못지않게 밤낮으로 기계에 매달려 기술 공부를 해온 열성을 사장이 눈여겨 본 까닭이었다.

그 당시 이 회장은 자기 보다 나이가 많은 기술자들을 아랫사람으로 다루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놓는다.

‘나는 언제나 서른살이 되나’하며 나이 먹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아침마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옷을 입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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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대 회장은 항상 산업현장을 찾아 다니며 실천적 경영을 해왔다.>

청구시절 전선 잇다 감전사 할 뻔

또한 당시는 ‘선화지’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넝마주이들이 주워 온 휴지로 만든 종이였다. 대부분의 상가와 가정에서 이 선화지를 포장지로 잘라썼다고 술회한다.

청구제지 공장장 시절인 55년 10월 이 회장은 자신보다 세 살 어린 지금의 아내 김경애씨와 결혼 한 후 공장 옆 사택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따라서 한밤중에라도 전기가 나갔다거나 기계에 이상이 생겼다 하면 수시로 불려나갔다. 전기사정이 안 좋을 때라 밤에 전기선을 이리 저리 이어야 하는 일도 잦았다. 기계고 전기고 전공이 따로 없이 만능이었고 힘든 일이거나 위험한 일이거나 몸을 아낀 적도 없었다. 한번은 전기선을 잇다가 감전이 되어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내일 고치면 되지 왜 위험하게 밤중에 하느라 고생이냐’며 아내가 안타까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이 회장은 “사장이 내게 사택을 줄 때는 한밤중이라도 언제든지 내가 필요할 때 부르기 위해서일 거야. 또 내일 고치면 내일까지 기계가 서야 하는데 그러면 회사에 손해가 크잖아”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때나 사장이 된 뒤에나 이 회장은 한결같은 주인 정신으로 일해왔다.

1957년 4월 이 회장은 제지공부를 하러 이태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이태리의 Cartera Burgo 라는 제지회사에서 처음 제대로 화장지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때의 문화적 충격이 컸습니다. 우리야 시골에서 지푸라기를 쓰며 자랐고 그때만 해도 대부분 화장실에서 신문지나 헌 잡지책 같은 것을 사용했으니까요. 화장지라는 것을 처음 봤을 때 참 생소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언젠가는 이런 질 좋은 화장지를 쓸 때가 있으려니 생각하고 화장지 만드는 일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57년 12월까지 이태리에서 여덟 달 동안 머물면서 그는 밤낮으로 기술연마와 이태리어 공부에 매달렸다.

청구제지가 대구 침산에 공장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무림제지로 바뀌고 그는 58년 6월 서울 광장동의 대한제지에 생산부장으로 입사했다.

국내 첫 주름잡힌 화장지

이때문에 가족들 모두가 서울로 이사하여 전세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회 전체가 어려 울 때이기도 했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가족 모두가 경제적으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경영자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직원들의 월급만은 제대로 주는 회사를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후 정부에서 한국볏짚펄프주식회사를 만들면서 이 회장을 기술담당자로 뽑아갔으나 3년 동안 공들인 보람도 없이 볏짚펄프사업이 백지화 되었다.

1961년 9월 군산의 풍국제지에 공장장으로 들어간 이 회장은 63년 2월 한국 최초로 ‘주름잡힌 화장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흰종이를 잘라 파는게 전부였으니 주름잡힌 화장지를 만든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처음 나온 주름잡힌 화장지인 만큼 서울의 장미화장지와 무궁화화장지 회사에서 종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전량 가지고 가 가공해서 팔았습니다. 이후 저는 당시 꽤 이름이 알려진 한일제지에 입사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본격적으로 화장지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이 회장은 지금까지도 그때 만든 화장지 견본품을 갖고 있다. 흰색, 분홍색, 파란색 등으로 빛깔이 다른 화장지들이 생산된 날짜별로 묶여있다. 특히 이 회장이 대견하게 여기는 것은 그 당시에 이미 자원 재생에 관심을 갖고 고지, 곧 버리는 종이로 화장지를 만드는 시도를 해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화장지를 비싼 사치품으로 여겨 잘 팔리지 않아 한일제지 역시 자금난으로 부도가 나고 말았다. 10년 넘게 제지회사에 몸담고 쉴틈 없이 일해왔지만 그동안 익힌 기술말고는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65년 7월 안양에다 일우제지라는 화장지 전문회사를 차렸다가 1년간 고생만 하다가 영세한 자본 때문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뒤 그는 1966년 7월 안양의 이화제지 공장장으로 입사했다.

운명의 유한킴벌리와의 만남

그때 유한 킴벌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966년 미국의 대표적인 위생제지업체인 킴벌리크라크사는 한국에 합작회사를 내기 위해 시장조사를 나왔던 것이다. 한국에 나온 킴벌리크라크사의 직원은 한국에서 합작할만한 건실한 기업을 찾는 한편 몇해전 네델란드 공장에서 만난 한 한국인을 찾았다. 명함에 적힌 이름이 ‘J. D. Lee’였다.

제지업계를 통한 킴벌리크라크사 직원과 이종대 회장의 만남은 한국 화장지 문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유한킴벌리가 탄생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살면서 몇번의 기회를 맞게 되는데 유한킴벌리와의 만남이 이 회장에게 커다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서른 다섯 살 나이에 내 회사를 갖고 싶다는 이 회장의 고집을 킴벌리크라크사는 ‘이종대’가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 결국 이 회장은 67년 6월 유한양행 제지부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3년동안의 합작 준비작업을 거쳐 유한킴벌리가 탄생됐다. 그렇다고 합작 준비가 모두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유한양행에서는 전체 투자액의 40%인 10만달러에 달하는 땅을 대기로 하고 킴벌리크라크사에서는 60%인 자본금 15만달러를 대기로 했다. 먼저 안양에 공장을 짓고 기계를 들여오려는 때에 킴벌리크라크사와 이 회장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었다.

柳韓(유한)에 우리기술, 우리기계 설득

킴벌리크라크사에서는 아직 한국의 화장지 수요량이 많지 않으니 화장지의 원단을 일본에서 수입해다 쓰자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해서는 수익도 맞지 않거니와 발전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이 땅에 화장지 문화가 막 시작되려는 터에 그것을 수입에 의존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회장은 화장지 원단을 생산하는 기계를 직접 만들겠다고 했다. 한국의 영세한 제지업계를 잘 알던터라 그 기술 수준을 믿지 못한 킴벌리크라크사에서는 당연히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것은 곧 돈을 대주지 못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이 회장은 다시 유한양행을 설득했다. 우리 기술로 우리 기계를 만들겠다는 이 회장의 큰소리에 임원진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종대’라는 이름 석자만 믿고 투자하기에는 큰 돈이었지만 그들은 모험을 했다. 이 회장은 그동안의 경험과 해외출장길에서 꼼꼼이 살펴 본 기계들의 조립과정 그리고 어렵게 얻어 온 설계도면을 가지고 철공소를 돌아다니며 부품들을 모았다.

작은 공장을 빌려 모아 온 부품들을 뜯어 맞추느라 밤을 샌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너무 무리를 해 류마티스성 열병을 얻기도 했다. 무거운 기계를 설치하면서 손을 놓치는 바람에 손가락이 모두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다행히 6개월을 기브스한 끝에 귀중한 손가락은 되찾을 수 있었으나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이 회장이 몸을 아끼지 않고 몰두한 끝에 우리나라 화장지 원단 제조 기계 1호가 만들어졌다. 하루에 화장지 원단 5톤을 생산할 수 있는 기계였다.

“부품을 구해다가 내 손으로 맞춘 기계니 만큼 설비비가 5만9천 달러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기계에서 화장지가 제대로 생산되어 나왔으니 미국기술자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지요. 그때부터 우리의 기계 만드는 기술을 인정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미국 본사에서 우리가 거의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곡절 끝에 고향에 제2공장

1970년 3월 30일 40명의 직원으로 유한킴벌리가 창립되었고 그는 상무이사겸 공장장으로 취임하였다. 유한킴벌리의 첫 생산시설은 1970년 안양에 설치되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0년 제2공장이 김천에 건설되었다.

고향인 김천에 대지 5만8천평, 건평 3천3백평 규모의 제2공장을 세운 일을 이 회장은 지금도 마음 뿌듯하게 생각한다. 산지를 깎아 계단식으로 정지해 공장을 짓자 공장부지라면 넓은 땅만 연상해 온 미국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고 한다.그러나 이 회장은 우리나라의 좁은 국토를 활용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 미국측을 설득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후 그 주변이 공업단지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볼 때 흐뭇했다고 한다.

1990년 제 3공장이 성남에 배송센터와 겸해 건설되었고 1994년 3월 대전에 제 4공장이 완공되었다. 이 공장들을 통해 아기기저귀와 여성생리대, 훼이셜티슈, 화장실용 화장지, 부직포, 물티슈와 키친타올 등이 생산되면서 우리나라에도 화장지 문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71년 매출액 2억원에서 이 회장이 사장으로 재임했던 93년엔 매출액이 2천3백92억원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수출액도 75년 25만달러던 것이 이 회장이 퇴임할 무렵에는 4억달러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한킴벌리는 성공한 합작회사로, 자연을 아끼고 환경을 사랑하는 기업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이 회장의 또 다른 업적은 우리 기술로 이룬 플랜트 수출을 들 수 있다.

화장지 만드는 회사에서 화장지 원단 제조 기계를 수출했던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던 일을 해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회장의 이름은 제지업계에 오래 기억될 만하다.

플랜트 수출보고 킴벌리회장 격찬

플랜트 수출이란 주로 턴키베이스 판매방식으로 설계, 제작설치, 시운전 및 기술지도까지를 모두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유한킴벌리가 미국킴벌리크라크사의 자회사에 플랜트수출을 한 것이다. 이는 이 회장이 수십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화장지원단 제조기계와 부직포 제조기계를 만든 경험과 기술이 쌓여 이뤄낸 성과였다.

1975년 9월 제지용건조기를 이란에 수출했으며 76년엔 태국에, 77년엔 말레이지아에 화장지 가공기계를 수출해오다 77년 콜롬비아의 콜파벨사의 주문을 받고 첫 플랜트수출을 하게되었다. 콜롬비아에 3개월을 머물면서 기계설치와 시운전, 그리고 그나라 기술자들에게 기술지도까지 해 준 이 회장은 그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콜롬비아의 공장에서는 지금도 이 회장을 극진히 여긴다.

당시 킴벌리크라크사의 다윈 스미스 회장은 이 회장에게 친필로 편지를 보냈다. “당신을 알게되고 당신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이 나에게는 큰 영광입니다. 당신은 1억명 중에 하나 있을만 한 사람입니다. 유한킴벌리를 세워주고 함께 일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뛰어난 실적을 보인 경영자에게만 주는 기업가상을 주며 이 회장의 ‘업적’을 인정해 주었다. 당시 킴벌리크라크사의 1백25년 역사 가운데 그 상을 받은 사람은 이 회장을 포함해 6명뿐이었다.

콜롬비아의 첫 플랜트수출이 성공하면서 그 뒤 여러나라에서 주문이 들어와 유한킴벌리는 많은 외화를 벌수 있었다. 78년 엘살바도르에 같은 기계를 수출하였고 1981년에는 필리핀에 수출했다. 88년에는 30톤 규모의 화장지 원단 제조 플랜트를 타이완에 수출했으며 89년에는 호주에 부직포 증설 플랜트를 수출했다. 이어 93년에는 같은 기계를 사우디아라비아와 타이완에 수출했다. 초창기부터 홍콩, 대만, 필리핀, 말레이지아, 싱가포르, 태국, 일본, 인도네시아, 호주 등지에 화장지 관련 제품수출에도 주력해왔음은 물론이다.

이 회장은 95년 유한킴벌리의 회장이 되면서 제지공업연합회 회장을 겸했으며 98년 정년퇴직 후 오늘날까지 연합회회장직을 맡고 있다.

세계 9위의 제지에 남다른 감회

“제가 제지업계에 첫발을 디뎠을 때는 연간 제지 생산이 30만톤도 안되었습니다. 지금은 연간 1천백만톤 생산이란 세계 9위의 선진국이 되었으니 그 초석을 다진 것 같아 감회가 큽니다. 아울러 미국, 캐나다, 서유럽 등에 이어 제지 4강국이 될 날을 기대해 봅니다.”

기술적 측면이나 기타 모든 측면에서 여건은 충분한 만큼 제지업계 종업원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면 곧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최근의 종이 소비 증대와 고지 수입이 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이 회장은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종이 소비가 느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산업이 발전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제는 세계적 차원으로 시야를 넓혀야 하므로 수입이 느는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국제화 시대에 서로가 필요한 양만큼 서로 팔고 사다보면 결국은 모두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는 것이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지인 무궁화와 장미화장지를 만들고 1970년 유한킴벌리의 창립과 함께 우리나라 화장지 산업을 이끌어 온 이 회장의 한평생은 그야말로 일만하며 살아온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 부지런함 또한 이 회장의 2남1녀의 자녀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 같아 나쁘지만은 안다고 말한다.

“회사원이던 장남이 새벽에 미국 출장에서 돌아와 곧바로 출근을 하더군요. 하루쯤 쉬고 나가라고 했더니 ‘아버지도 그러셨잖아요’하며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저의 일밖에 모르는 성품이 그래도 자식한테는 나쁘게 비치지 않은 것 같아 안심이 되었어요.”

이 회장은 가족들에게 늘 고마움을 느끼며 남은 시간 뒷전에서 봉사하며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글 申貞姬(신정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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