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 3관왕, 큰 그릇, 무한도전정신

▲ 1978년 장덕진 농수산부장관이 국립식물검역소 현판식에 참석했다. <사진=국가기록원>

[이코노미톡뉴스=제재형 객원 논객] 꽃 피는 봄을 두고 시인 엘리어트는 ‘잔인한 4월’이라 읊었던가. 개교 112주년을 맞아 세계 100대 대학 속에 이름을 올린 민족사학 고려대학은 5월 5일의 축제를 앞두고 ‘자랑스런 고대인’ 두 분을 사별하는 슬픈 소식을 접했다.
첫째는 민주, 문화주의를 표방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 선생이 산업입국을 위하여 세운 경성방직(경방)의 사장으로 섬유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수헌(壽軒) 박인환(朴仁煥) 교우가 4월 7일 낮 12시 15분 향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둘째는 “역사에 남을 일을 하고 싶다”면서 대륙연구소를 만들어 월간잡지 ‘한국인’과 ‘대륙’을 발행하며 창의도전 정신을 불태우던 소암(昭岩) 장덕진(張德鎭) 교우가 4월 20일 낮 12시 4분 향년 83세의 아까운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30만 고대 교우들은 두 분의 부음을 듣고 망연자실하여 인생무상을 되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지난 4월 27일 오전 11시 서울 종암동 교우회관 안암홀에서 열린 제392차 고려대 월례강좌 모임에 참석한 150명 원로 교우들은 1분간 특별 묵념으로 두 분의 명복을 빌고 ‘질병과 고통과 사망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도록’ 기원했다.

박인환과 장덕진 두 자랑스런 고대인

왜 하필 박, 장 교우 두 사람인가? 까닭이 있다. 박인환 교우는 8.15 해방 이태 전인 1943년 보성전문(고대 전신) 법학과를 졸업했고, 장덕진 교우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던 1961년 봄 고대 법학과(56학번)를 졸업했다.
장덕진 회장은 1985년 봄 연부역강한 51세의 젊은 나이에 고대 교우회 17대 교우회장에 당선됐다. 참여, 봉사, 긍지, 모교지원의 4대 슬로건을 내걸고 ‘공평동 시대’를 장식한 장 회장은 ‘늙을지언정 낡지는 말자’는 생각에서 ‘월례강좌’를 개설, 1985년 6월 28일 첫 모임을 갖고 건강과 활기에 찬 원로 공동체로서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사랑방 공부시간으로 발전되기를 기약했다.
그로부터 35년- 한 달도 거르지 않고 400회를 바라보는 ‘건강, 장수, 행복’을 추구하는 공부방으로 일취월장해 왔다. 이런 월례행사는 국내는 물론 세계 대학동창회 사상 그 유례가 없는 고대만의 자랑스런 전통 사업이다. 자매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 와세다(早田) 대학에서 벤치마킹해 갔다지만 뒷소식이 없고 ‘영원한 맞수·친구’인 연세대학도 쉽사리 흉내 내지 못하는 선배공경 사업이다. 때마침 묵념을 올리던 날 강연제목은 ‘베트남 패망이 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맹호부대 중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서경석 장군(예비역 육군중장, 동티모르 대사 역임)이 특강했다. 5.9 대선과 정권교체를 틈탄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및 핵도발로 인한 한반도 안보상황과 사드배치 문제가 맞물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박인환 선배는 나의 선임 회장으로 7년간 봉사한 월례강좌 운영의 공로자이다.

대통령도 시험으로 뽑는다면… 고시 3관왕

장덕진 회장은 한마디로 큰 뜻을 품은 ‘큰 그릇’이었다. 도전정신으로 무장된 진취적인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어려운 여건을 헤치고 형설의 공을 이룩한 장 회장은 춘천고등학교를 거쳐 고대 법학사가 됐음은 물론 사법고시와 행정고시에 외무고시까지 합격한 ‘고등고시 3관왕’의 타이틀을 땄다.
“대통령도 시험 쳐서 뽑는다면 응시해볼 용의가 있다”고 말한 두 사람(또 한 사람은 김학렬 경제부총리) 엘리트 중의 하나로 널리 회자되고 있는 바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주소지인 영등포구에 출마, 당당히 국회의사당에 입성한다. 이때 제1 야당 당수인 유진산이 젊은 실력자의 등장에 겁을 먹었던지 슬쩍 자기 선거구를 버리고 전국구 비례대표 후보로 도망(?)가게 된 사건은 ‘진산의 공천파동’으로 한동안 정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장 의원은 재무부 이재국장과 재정 차관보 및 차관을 거친 재정경제통 선량으로서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 추진에 큰 힘을 보태었다.
1977년 때를 얻어 농림수산부장관에 오른 장 장관은 통일벼 증산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에 따른 보릿고개 청산과 배고픔에서의 해방을 맛보게 하였다. 자고로 백성은 식이위천(食以爲天)이라고 했던가. 폭발적인 인구증가율을 줄이고 먹거리를 자원화 해야겠다는 체험적 신념이 역사적 실지회복(失地回復)정책으로 승화되지 않았을까 믿어지는 대목이다.

▲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장덕진 경제과학 심의위원 임명장 수여 후 악수를 청했다. <사진=국가기록원>

만주 흑룡강성 3억평 개발의 꿈 도전

관직에서 물러나자 재단법인 대륙연구소를 차리고 ‘대륙’이란 학술지와 뿌리를 찾는 ‘한국인’ 잡지를 내는 한편 만주 흑룡강성 삼강(흑룡강 목단강 송화강) 평원 3억평 개발의 꿈을 가꾼다. 땅이 점토질(粘土質)이라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보리, 밀농사가 썩는다는 소문도 있고 일본사람들이 수십 년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뗐다는 얘기도 있기에 당시 나로서는 이 개발 사업에 손대지 말 것을 완곡하게 부탁했었다. 그 대신 세계적으로 가장 큰 봉사단체인 국제라이온스협회 세계회장으로 진출하여 국경을 초월한 인간관계를 구축, 확충하고 나라를 위해서 더 보람 있게 헌신 봉사할 기회를 기다리자고 간청했다. (1985년 당시 소암은 고려라이온스클럽 회장을 거쳐 한국 354-C지구 부총재로 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암은 꿈을 접지 않았다. 이윽고 만주 현지에서 1단계 1억평 개발사업 기공식이 열렸고 고려라이온스클럽 회원들도 현장에 가서 축하했다. 흑룡강 성장은 소암에게 ‘명예 흑룡강 성민증’(省民證)을 주고 힘껏 도울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할까. 개발사업 자금을 조달키로 한 스폰서의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사업을 돕고 있던 한 참모가 천기누설(고구려 발해의 옛 땅을 되찾자는 개발사업이라고 떠벌림) 하는 바람에 현지의 분위기도 흐트러진 듯 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려움은 겹쳐졌고 마침내 빚지고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경제는 생물이라 학술적 이론이나 공식대로 풀려 나가지 않는다는 교훈을 터득하는 찬스였다.

육영수여사 언니의 맏사위 3남5녀 로열패밀리

그러나 소암의 가정적 인간 띠는 든든하다. 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언니인 육인순 여사의 맏사위로서 ‘로열패밀리’를 이루었다. 3남 5녀의 이름을 적어본다. 맏아들 홍세표(한미·외환은행장 역임) 밑으로 장덕진(홍은표), 한승수(전 국무총리·홍소자), 유연상(전 투자금융 사장·홍정자), 정영삼(민속촌 대표·홍지자), 윤석민(전 대한선주 회장, 국회의원·홍청자), 그 밑으로 두 아들이 더 있다.
소암이 1958~1961년 고려대 재학 중 고등고시 공부할 때 교편생활로 뒷바라지 하던 홍은표 여사는 소암의 외조를 받으며 1989년 만학으로 중앙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수원대학에서 생활과학대 학장을 역임하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소암은 부인의 박사 학위 취득을 무척 기뻐하면서 “결혼 27주년의 선물이기도 하다”고 자랑했었다.
홍은표 교수는 맏딸로서 많은 동생들을 거느린 ‘어진 언니’로서 어머니의 수고를 돕는 한편 자녀교육에도 힘써 2남 1녀를 명문대학에 보내고 훌륭하게 길러냈다. 장남 원준이는 지금 조선일보 자매 매체인 TV조선 국제부장으로 일하는 기자이며, 며느리 한수진도 SBS 선임기자요, 이름 있는 아나운서이다. 차남 호준이는 SC제일은행 자산관리 본부장으로 근무하는 은행원이며, 딸 정아도 현모양처형 가정주부다.
소암은 젊은 날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봉사하는 동안 대한민국 축구팀을 세계 ‘올림픽 4강’으로 도약시키는 지렛대 구실을 잘 수행한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는 스포츠맨십의 소유자다. 골프는 치지 않고 등산을 즐기며 단전호흡으로 건강을 관리했다. 일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일하고, 한가한 시간이면 또 찾아서, 만들어서 일하는 체질이었다. 주어진 일과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일꾼이었다. 남에게서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처신하고 힘닿는 대로 남을 돕는 ‘사랑의 손길’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디딤돌이 될지언정 걸림돌은 되지 말자고 다짐 또 다짐하는 삶이었다.

자랑스런 고대인상 제정

나는 여러 해 동안 소암 장덕진 선생과 같은 일을 한 ‘한솥밥 가족’이었다. 그가 고려대 교우회장으로 봉사할 때 나를 청하여 ‘좀 도와 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고대교우회보’ 상임 편집위원 겸 편집국장으로 4~5년간 일하게 됐다. 나는 53학번 정치학과를 나온 ‘기자’이고 그는 56학번 법학과를 나온 ‘어른’이다. 그런데도 깍듯이 선배 대접을 하며 “뭐 도울 일 없습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지시형(指示型) 리더십이 아니라, 상의형(相議型) 지도력을 구사한다. 소신껏 해보라고 전권을 맡겨서 능력발휘의 기회를 주었으나 마지막 1%는 반드시 챙기는 스타일이다. 몸가짐을 단정히, 신사도(紳士道)를 지키는 한국형 선비였다.
미담가화가 많지만 한두 가지만 더 적고 각필할까 한다.
이왕 사나이가 군대를 갈 터이면 사병보다 장교로 가는 것이 좋겠더라고 했다. 소암은 사병으로 복무한 것을 후회했다.
‘자랑스런 고대인상’을 제정, 시행한 것은 히트작이 아닐 수 없다. 국내 대학동창회 사상 최초의 일이다. 동문 수학자의 사기를 드높이고 조직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시상제도이다. 지금은 모든 대학이 따라하고 중·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까지 모방한다.
‘월례강좌’를 개설한 것은 급변하는 정보화·디지털 시대에 뒤지지 말자는 평생교육 시스템이다.
소암은 원칙과 상식에 어긋난 짓을 절대 하지 않는다. 종로 네거리 공평동 뒷골목에 위치한 교우회관을 파는 조건으로 세종로 네거리에서 신문로로 나가는 큰길가에 있는 대한교련 빌딩을 사기로 했었다. 회장 사무총장 편집국장이 현장을 답사하고 계약을 체결키로 했다. 그런데 파는 쪽에서 “실제 매매가격에서 3억을 뺀 영수증을 발행할 테니 양해하세요”한다. 비자금 조성책인지, 뒷돈을 챙기겠다는 뜻인지 알쏭달쏭한 말이다. 소암 장덕진 회장의 대답은 이랬다. “그리는 못하겠소. 그만둡시다.”

▲ 제재형 전 대한언론인회 회장

1991년 봄, ‘함께한 20년, 함께 할 2000년’이란 제목으로 고려라이온스클럽이 20년사를 발행했다. 그때 소암은 편찬위원장 직분을 맡았고, 나는 10년사에 이어 두 번째로 20년 발자취를 간추린 통사(通史)를 집필했다. 각 회원들에게 주어진 두 페이지의 글 속에서 소암은 “인재양성에 힘쓰며 만주를 개척하여 후원에게 물려주고 아내와의 회혼식(回婚式)을 지내도록 노력하겠다”고 썼었다. 미완성의 장(場)이다. 회혼식을 5년 앞두고 소암은 우리 곁을 훌쩍 떠나버렸다. 만년에 소암은 매일아침 상도동 자택을 나와 평촌에 있는 친구 사무실로 출근, 독서하고 사색하기를 반복했다.
혈액암 증세는 호전됐으나 급성폐렴으로 보름동안 입원했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요한 장덕진 소암 선생, 요단강 건너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평안을 누리소서. 아멘! (고인의 유해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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