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독립이 나라기강 세운다
법관의 명예… 굶어죽는 것도 영광

[한국인을 찾아서]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사법부 독립이 나라기강 세운다
법관의 명예… 굶어죽는 것도 영광
▲ 김병로 대법원장. <사진@국가기록원>

[배병휴 회장 @경제풍월] “이 자리를 물러가기 까지를 돌이켜 보면 나 자신 된 것도 없고 한 것도 없다. 모두 국민들에게 송구스러운 일 뿐이다. 그동안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법원 직원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다. 인권옹호를 위하여 사건처리의 신속을 강요하였던 것이 그렇고, 또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적은 보수를 가지고도 그대로 살아가라고 한 결과가 된 것이 그러했다. 나는 전 사법종사자에게 굶어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했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명예롭기 때문이다.”

1957년 3월 대법원장 퇴임식장

1957년 3월 16일 대법원 회의실에는 정부요인 국회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김병로 대법원장 퇴임식이 거행되었다. 애국가 봉창으로 시작된 식전에서 그는 비장한 이임사를 남기고 있다.
법적인 질서가 결여될 때 무정부 상태는 팽배해진다. 그 방종한 상황을 뒤에서 조성하여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정부라면 그것은 독재정권 보다 훨씬 국가에 해롭다. 사실 방종한 통치자의 무정부 상태는 방종한 무리들의 어처구니없는 독재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법조의 권위와 공권력이 무너져 버리고 전교조, 노조단체, 촛불집회, 환경운동운운, 반미정치운동 등등 불법집회 파괴폭력이 난무하여 경찰관들이 폭행을 당해도 정부가 지지세력 의지하여 방관만 한다면 이게 무슨 법치국가란 말인가. 서릿발 한국법조의 선구 김병로의 탄식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는 1888년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아버지 상희(相熹), 어머니 고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7살에 아버지를 여읜 외로운 호주로 성장한 그는 12살 때 결혼, 30대 후반의 홀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일, 농사일을 하면서 〈소학〉, 〈사서〉, 〈중용〉,〈대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14살 때인 1902년 조선 유학의 마지막 대종으로 불리던 간재 전우 선생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9세 때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당시 목포에 새로 설립된 일신학교(日新學校)에 입학한다. 그러나 망국을 상징하듯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김병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즈음 학생들은 망국의 현실과 배움의 현실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그 진로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실의에 빠진 김병로는 〈애급망국사〉, 〈월남망국사〉 등의 서적을 읽고, 깊이 탄식하고 분노하며 자신을 추슬러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그는 의병장 최익현을 만나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의병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 뒤 명문학교인 창흥의숙(昌興義塾)에 입학하여 신학문 공부에 들어갔다. 곧 ‘나를 먼저 길러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가인은 이 학교에서 일생의 친구들, 동아일보 주필을 지낸 고재욱의 아버지 고광준,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근촌 백관수 등을 만난다.

애국변론을 위하여

김병로는 24세 되던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주간에는 메이지대학 법학과, 야간에는 니혼대학 법학 등 두 학교에서 공부했다. 한때 폐결핵으로 잠시 귀국했으나 1912년 다시 출국, 메이지대학 3학년에 편입, 이듬해 졸업한 뒤 1914년 주오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로써 법학의 본령을 깨우치고 유익한 동지들을 얻게 되었다.
그는 송진우·안재홍·문일평·신익희 등과 학우회를 이끌어 나가면서 유학생들의 결속에 정력을 다하였다.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금연회(禁煙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경비를 절약하여 유학생들의 학비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28세 때 메이지대학 고등연구과를 수료하고는 귀국한다. 귀국 뒤 김병로는 경성법전(서울대학교)의 조교수로 취임하였다. 이어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에 출강하여 형사소송법과 형법을 가르쳤다.
김병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뜻한 바 있어 교수직을 사임하고 특별임용에 지원, 총독부 산하 부산지법 밀양지원에서 1년간 판사를 거친 뒤 31세 때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그는 초기 사회운동단체인 북풍회, 조선변호사협회, 동아일보· 보성전문 이사, 물산장려운동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대학을 세워야 한다는 조선인 창학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운동에도 참여한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발기총회」가 개최되었는데, 그는 모금보관위원으로 임명된다.
이때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김병로가 당시 우파적 흐름 가운데 조직화가 시도되고 있던 자치운동, 즉 타협주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창흥학교 이래 자신과 가까운 사이였던 인촌·고하·최린·이종린·이석우 등 우파 지도자들이 추진한 자치를 추구하는 헌법정치단체인 「연정회」등 타협적 민족주의 흐름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김병로는 허헌, 이승우, 김용무 등과 함께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조직하여 변호합리화운동에 나섰다. 
그때 첫 사건이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사건이며, 이어 김시현 등의 제2차 의열단 사건, 6·10만세운동, 박헌영 등의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등을 변호했다. 또한 대동단(大同團) 사건 등 일련의 항일 사건을 변호함으로써 구국운동을 폈다. 비밀결사 「조선민족 대동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적발된 전협, 최익환을 구하기 위한 김병로의 변호는 실로 눈물겨워 재판장까지 감동시켰다. 항일독립운동가들에게 김병로의 도움은 실로 복음이었다.
1927년 ‘민족단일전선’과 ‘민족단일당’을 표방한 「신간회」가 발족되었다. 김병로는 2대 회장 권동진의 보좌역으로 여기에 참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지부조직의 확대와 노동쟁의·소작쟁의 등의 공정한 해결을 위한 노력 등을 통해 신간회의 기반을 굳히는 데 진력한다. 한편 법정투쟁을 통한 항일활동도 계속해, 장진군 토지강제매입반대 주민투쟁, 만주항일무장단체인 정의부와 그 지도자 오동진사건, 원산총파업사건, 형평사사건 등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의 애국변호활동을 벌였다.

농민을 사랑하는 마음
▲ 이승만 대통령과의 단체 기념사진(1953년). <사진@국가기록원>

신간회에서 김병로의 역할은 1929년에 들어 더욱 본격화되었다. 1929년 신간회 전국대회에서 허헌이 중앙집행위원장에, 김병로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재정부장으로 선출되었다. 형사공동연구회의 회원이면서 기질이나 뜻이 잘 맞는 허헌 위원장체제에서 가인은 자신의 고향이자 곡창지대인 전북지방 특히 김제·부안·익산·이리·정읍 등지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수리조합분규 등 농민·화전민들과 관련된 사건 변호를 많이 했다. 이 점은 그가 농민들의 생활에 남다른 이해와 관심을 가졌던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또 해방 뒤 토지개혁문제에 대해서도 우익계 인사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무상분배를 주장했던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났을 때 신간회는 즉시 사건진상조사단을 조직하여 조병옥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이 당시 광주 입구인 송정리에서 조병옥을 막아서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신간회 광주지회장 정수태가 조사에 나섰으나 그 결과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했다. 이에 신간회 실질적 지도자인 김병로가 광주로 출발한다. 그는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이어서 당시 일본관리들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기자들을 대동한 그의 모습은 위엄 있고 당당했다. 
광주에 도착한 그는 전남지사, 경찰국장, 고등과장, 광주고보교장 시라이 등을 만나 상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일본학생과 관청이 무리하게 조선학생들을 가해하였다는 물적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강력하게 항의했다. 구속 학생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서울로 올라와서 「광주학생사건 실정보고대회」를 열어 사태에 대한 수습방안을 논의하려 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무산되고 만다. 그 뒤 신간회는 총독부의 횡포를 규탄하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의 중심체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경찰의 탄압으로 지도부가 악랄한 문초를 받는다. 잡혀간 다음날 석방된 김병로는 신간회 복구사업을 위하여 고군분투 전력을 다해 나갔다.

법은 행동의 잘못만 처벌한다

김병로가 위원장을 맡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신간회는 좌우익의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좌익세력은 지도부가 우경화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신간회의 사명과 역할이 끝났다”고 주장하였다. 신간회 해산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해산주장의 배경으로는 일제의 탄압과 코민테른의 전략변화가 지적되고 있지만, 김병로의 진용이 우파적 색채가 짙었던 점도 해소론 대두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마침내 1931년 5월 신간회는 해산되고 만다.
김병로는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그 길에 정력을 쏟았다. 특히 그는 보성전문학교를 재건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용익이 설립하여 천도교계에 의하여 유지되어오던 보성학교가 극도의 경영난에 빠져있었다. 그는 보성전문 이사로 선임된 것을 계기로 김성수를 자주 만나 보성전문학교 육성책을 놓고 의논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보성전문 재단법인이사회에서 김병로는 김성수의 보성전문 인수를 발표할 수 있었다. 고려대학교 창학은 이렇게 김병로의 열의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1937년 동우회(同友會)와 흥사단의 총검거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 제1조(독립운동금지) 위반이라는 명목 아래 150여명이 검거됐다. 이 사건으로 안창호 등 많은 애국지사가 뒷날 목숨을 잃었다. 이 동우회 사건은 장장 5년간에 걸쳐 심리되었는데, 이때 김병로·이인·정재윤과 일본인 요시다 등 13명이 변론을 맡았다.
“인격수양과 단결이 규약이나 실행에서 뚜렷한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무엇 하려고 함이냐고 추궁하되, 온갖 고문과 갖은 수단으로 받은 자백을 범죄사실의 증거자료로 삼아서 목적을 처벌하려 한 판결은 중대한 위법이다.”
다시 말해서 법은 행동의 잘못을 처벌하려는 것이지 마음을 처벌할 수 없다는 명확한 논리의 명변론이었다. 이 사건은 1941년 2월 다카하시 재판장에 의하여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토지개혁 무상분배를 주장

김병로는 3차 간도공산당사건, 흥농사사건 등에 대한 변호와 법정투쟁을 계속하였으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지금의 서울 창동)에 은둔했다. 곧은 절개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1945년 해방되자 그는 백관수·이병헌 등 옛 신간회 동지들과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한민당은 해방정국에서 미군정청과 밀착이 두터워졌다. 한편 군정청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날로 날카로워졌다. 
김병로는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제2의 신간회운동’ 즉 좌우세력의 합작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이 운동에 착수했다. 그는 변호사로서 좌익인사들과 맺은 폭넓은 인간관계 등으로 이 일의 적임자이기도 했다. 백관수, 원세훈과 함께 한민당의 대표로 좌우협동과 합작을 위해 적극 활동에 나섰으나 좌우 각 파의 주도권 투쟁과 불신으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의 노력이 한때나마 큰 성과를 거둔 것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즉 신탁통치문제에 대한 노선통일이었다. 1946년 1월 6~7일 이틀 동안 노선통일을 위한 인민당·한민당·국민당·공산당의 4당회의가 열렸는데, 김병로는 한민당 대표로 참석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하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하며, 신탁통치문제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가 자주독립정신에 따라 해결하게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한민당에 의해 거부되고 그는 당 간부회의에서 책임 추궁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그 뒤로도 모스크바 결정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와의 협의에 응하기 위해 우선 우익정당들부터 통합해야 한다고 제의하고, 한민당·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 등 4당 통합을 추진했으나 한민당의 거부로 무산됐다.
1946년 5월 미군정청의 후원 아래 좌우합작이 추진되자 그는 한민당의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원세훈과 함께 여기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10월 들어 좌우합작위원회가 합작7원칙을 발표하면서 토지문제를 둘러싼 한민당 내 갈등 끝에 그는 탈당했다. 합작7원칙 중 토지관련 조항은 몰수, 조건부몰수, 체감배상 등의 방법으로 지주의 토지를 수용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다. 
김병로는 토지문제 해결방안은 “지주로부터 땅을 사서 소작인에게 거저 나눠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주계급적 성격이 강한 한민당은 “무상분배는 공산주의와 다름없다”며 거부했다. 한민당과의 갈등 끝에 결국 탈당한 김병로는 그 뒤 좌우합작이 통일로 가는 열쇠라고 믿고 민중동맹에 가담했으며 1947년에는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참가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1946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낸 김병로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한다.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그는 사법부의 장(長)으로서 대한민국 건국 사법부 전통의 확립과 계승할 권위를 확립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고 그 원칙을 지켰으며 편파와 부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사법권독립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던가는 이에 대한 견해차로 말미암아 일어난 대통령 이승만과의 마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명제였다. 6·25전쟁 때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이었다. 세태의 변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곧은 절개는 후인들에게 깊은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다. 자유당 정권 아래 사법부에서 법을 수호하려 노력했던 법관들이 많이 나온 것도 그의 이런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법을 정의로 이끌어라

어느 날 아침, 김병로가 집 앞에 서 있는 관용차에 올라타려는데 차 안에 아내가 앉아 있었다.
“아니, 당신이 왜 여기 있소?”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한다. 운전기사가 대신 대답했다.
“사모님께서 아침에 갑자기 배가 몹시 아프십니다. 그래서 대법원 가는 길에 병원에 내려드리려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크게 호통을 쳤다.
“이 차는 관용차지 자가용이 아니오! 국가에서 열심히 일하라고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해 준 귀한 차를 어찌 그런 사사로운 일에 쓴단 말이오. 내 평소 말하던 바를 잊었소? 병원은 그리 멀지 않으니 전차를 타고 가시오. 앞으로 내 뜻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말도록 하오.”
그는 오랫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고 대법원장을 지냈는데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일제시대 그와 함께 숱한 변호를 맡았던 이인은 회고록에서 그의 청빈을 진솔하게 적고 있다.
“당시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은 모두 넉넉지 못했다. 신간회 동지들은 김병로의 집에 기식하면서 부근 설렁탕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그는 그 밥값을 갚으려고 끝내는 자신의 서대문 집을 팔아야만 했다.”
김병로는 또 술을 무척 좋아해 술과 관련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김병로의 전기 〈가인 김병로〉를 쓴 김진배는, 김병로가 법률과 관련된 짧은 글들 외에는 거의 글을 남기지 않은 것도 술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적었다. 김병로는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뒤 1957년 70세로 정년퇴임한다. 퇴임 뒤에도 재야법조인으로서 활약했다. 1955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에 자유법조단대표를 맡았다.
5·16 이후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그는 윤보선·박순천이 중심이 된 민정당, 그리고 허정이 이끄는 「국민의 당」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하여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군정반대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민정이양을 앞두고 야당통합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해 끝까지 노력했으나 1963년 선거에서 민정이양에 실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가인 김병로는 1964년 1월 13일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공훈을 기리는 뜻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24세에 신학문을 탐구하러 도쿄로 떠났던 그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광복된 조국의 살아있는 법전으로 이름을 떨친 그 이면에는, 불의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자기를 용서치 않은 그의 의지에 기인할 것이다.
‘법은 인간을 올바로 이끌고 이성은 법을 정의로 이끌어야 한다.’ 김병로의 말이 가슴에 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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