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차이나 'china'인 이유

▲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모습. <사진=연합뉴스>

[배만섭 발행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e톡뉴스)] 과거 서양의 대국들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중국 진나라의 진시황(Chin, 始皇帝)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스스로 사용했다. 혹자는 중국이 이때 통일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중국은 없고 지금의 유럽처럼 잘게 쪼개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은 진의 제31대 군주였고 제6대 왕이었다. 그는 어떻게 연, 조, 위, 제, 한, 초 등 6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통일을 이루어 냈을까. 정답은 '다양한 인재의 등용'이라 할 수 있다.

통일을 이룩하기 전, 진시황은 달콤한 말만 하는 관료들만 가까이 한 것이 아니고 정적(政敵)과 능력 있는 지식인 또한 서슴없이 국정운영에 등용시켰다. 그 예로 진나라의 국정 사업인 운하 건설에 다양한 인재를 구성해 간첩 확정 판결을 받았던 한(韓)나라의 첩자인 정국(鄭國)에게 운하 건설을 맡겼다. 한나라에서 수로 개척자였던 그는 10년 동안 운하 공사를 맡아 300리 길이의 대규모 운하를 완성했다.

이윽고 진나라는 주변 나라들보다 강국해졌다. 특히 군사력은 다른 나라의 열 배 정도로 커져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진국의 통일 전쟁은 무자비했으나 통일로 인해 나라는 부국강병의 시초를 다듬었다. 

인재양성 → 막강 군사력 → 경제적 부흥

통일제국 진나라가 탄생하기까지는 수많은 목숨의 희생이 있었지만, 통일 이후 번영하면서 수많은 목숨을 살린 셈이 됐다.

우리는 당장의 남북통일에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일된 한반도가 그 고통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인 세계 우수의 강대국인 선진국으로 치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36년의 치욕을 잊을 수가 없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외세의 침략에 주권이 박탈되고 강제합병까지 당한 수모를.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으로 본다면, 남북통일에서 남한이 북한을 흡수통일 하려면 우선 부국강병이 우선시 되어야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주변 강대국의 눈치 외교만으로 남북이 통일되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통일이 급한 것이 아니라 통일준비가 급한 것이다. 시작은 인재의 양성과 등용이고 통일 프로세스에 강력한 가속을 전달해줄 경제적 부흥을 이룩해야 한다.

진시황은 폭군이 아니었다. 부정부패를 타파하고 모든 백성을 아우르는 평등주의자였다. 그는 백성의 평화를 위해 통일 프로세스를 차분히 실행하고 그 결과를 천하 통일로 되 얻었다. 이후 개혁과 혁신을 통해 나라를 더욱 경제적으로 부흥시켰다. 그리고 세계는 진시황(chin)의 황제국 나라를 '차이나(China)'로 불렀다.

부국한 나라를 위해 불멸을 원했던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하다 죽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중국은 G2로 GDP가 지난 70년간 452배나 성장하는 거대 경제 대국으로 국력을 과시하고 있다. 거대한 아시아 땅에서 첫 통일을 경험했던 중국은 오늘날에도 '하나의 (거대) 중국'을 표방하면서 슈퍼 강대국의 꿈을 하나씩 시행하고 있다.

개혁정치로 미국경제를 부흥시키고 4선까지 성공한 루스벨트 대통령(Franklin Delano Roosevelt)는 야당 인사를 전쟁성 장관으로 발탁하고 이로 인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 후, 인사를 반대했던 여당에게 "이게 민주주의다!"라고 말했다.

통일을 원한다면, 다양한 인재등용과 통일된 기준(제도)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 통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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