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자동차 제네시스 브랜드. <사진=제네시스(Genesis) 사이트>

[부지영(夫址榮) 전 조선일보 동경특파원 칼럼 @이코노미톡뉴스] “탱크가 몰려와도 돌이 날라 와도 쓸 것 쓰는 것이 기자(記者)”

4.19를 촉발했던 사설사건의 주인공 최석채 선배가 마지막 글을 쓰는 날, 새까만 초년병 기자로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을 때의 육성이다. 그 말은 그날 이후 개인적으로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쓰지 못하는 이야기가 실은 더 많다. 쓸 수 있는 이야기와, 알면서도 쓰지 못하고 취재원의 사정상 다음 기회를 봐야하는 이야기의 비율은 어느 선진국 통계에서도 후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뿐인가. 직업은 기자이지만 취재원 혹은 출입처와의 특수관계 등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기록을 하는 일보다, 요즘 같으면 전문 경영 컨설턴트회사나 여론조사기관의 고액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그중 하나가 정부가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제기된 ‘설날’ 이름 짓기. 중앙청을 출입할 때인데, 한자명을 우선하는 당시의 사회분위기상 각종 달력이나 기록물에는 월등히 ‘구정(舊正)’을 사용하는 빈도가 더 많았다. 일제 때부터 사용되어온 양력 1.1 일도 신정(新正)이라는 한자명이고, 입춘 우수 동지 등 각종 절기도 한자이니 ‘구정’이 맞다는 논리. 그러나 관습상 한민족이 대대로 이어온 ‘우리 고유의 명절’을 찾자고 하는 마당에 무슨 한자어냐, 이런 생각이 들어 ‘새 명절 이름은 설날이 좋다’는 제목과 내용으로 기자수첩을 썼고, 당시 결재과정에서 일선 공무원들의 큰 호응을 얻어 ‘설날’ 로 결정됐다. 이 덕에 중앙청에서는 한때 ‘설날 기자’라는 닉네임으로 통하기도 했다.

동경 특파원 시절에는 ‘삼성 자동차’를 론칭 시키게 된 첫 기안자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전 세계적인 자동차불황과 소위 버블경제 붕괴의 후유증으로 큰 폭의 경제침체기였는데, 그 여파로 닛산 자동차 공장이 GM 사태 때의 군산 공장처럼 생산라인이 놀고 있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동경의 한 호텔에 삼성 임직원들을 불러, 차세대 경영전략을 고민하는 일본 연수를 진행하는 시기적인 우연성이 딱 맞아 떨어졌다. 이 회장을 측근에서 모시게 된 삼성의 동경 주재원 라인에게 ‘일본 자동차 생산라인의 인수를 통한 삼성그룹의 자동차 업계 진출’ 가능성을 역설했고, 그 보고서는 지금의 ‘르노 삼성 자동차’의 모태가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건이 더 있지만, 오늘 공개하고 싶은 것은 현대 자동차 ‘제네시스’(genesis) 브랜드의 탄생이야기다. 2004년 당시 현대 자동차는 최상급 에쿠스를 대체할 새로운 대형차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엔진부터 완전히 새로운 엔진으로 개발하고 디자인은 물론 세일즈에 이르기까지 독일 일본 등 전 세계 톱클래스의 선진국 자동차와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는 신형 자동차를 새로 만든다면서 그 자동차의 ‘새 이름’을 공개모집했다. 채택자에게는 이 신형 대형차 한 대를 준다는 호조건이었다. 잠시 경영관리직에 있을 때라 시간도 좀 넉넉했고, 1세대 자동차 전문기자-국제경제팀장 출신에다 도요타 닛산 등 일본 자동차 현장을 실제로 옆에서 목격해온 동경 특파원 경력이었기에, 관련 자료를 찾고 모아서 ‘제네시스’와 다른 라틴어 이름 하나등 5가지 작품을 추려내고 그중 두 가지 이름으로 공모에 응했다. ‘제네시스’genesis는 일반 명사일 때는 ‘기원’ ‘시초’ ‘발생’ 등의 뜻을 갖는 ‘시원(始源)’을 의미하는 것이며, 대문자의 고유명사일 때는 성경속의 첫 장인 창세기의 영어 이름. ‘성경 이름이 들어간 자동차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독실한 크리스천 부친의 조언과 ‘창세기’라는 이름이라면 엔진 부품 하나부터 완전히 새로 만든다는 현대자동차의 신차 개발철학을 그대로 잘 반영하고 있고, 특히 기독교 문화가 기본인 북미 시장과 유럽 등 글로벌 마케팅에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라는 개인적인 판단의 결과였다. 크리스천이라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다음으로 외우고 있는 성경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로 시작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 ‘제네시스’이므로. 또 개인적으로 마침 ‘하버드 대학 입시 에세이 50선’ 등 영한 대역의 번역작 프로젝트들을 진행 중이었기에 현대차의 주요 시장인 북미 시장을 겨냥, 라틴어 등 타 언어보다는 영어 고유의 뉘앙스를 살리는 것이 마케팅 전략에 주효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첫 제네시스 이름의 자동차가 나온 것이 2008년이니, 이제 그 ‘제네시스’도 12주년이다. 성능과 매출액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제네시스 오픈 등 각종 PGA, LPGA 대회의 홀인원 부상으로 전시될 정도로 전 세계 자동차 팬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보다 더 훌쩍 키가 커버리고 성년이 된 ‘아들’을 보는 것 같아 그 첫 명명자(命名者)로서 너무도 흐뭇하다.

▲ 부지영 전 조선일보 동경 특파원

한해 농사가 아니라 상반기 실적만으로도 3조원 대(2016)의 이익을 내는 것이 지금 현대자동차의 현주소니 초기 론칭 당시인 2008년을 기준으로 해도 실로 격세지감이다. 또 여기에 글로벌을 지향하는 ‘제네시스’는 자체브랜드로 독립까지 한다는데, 그 브랜드 가치로 따지면 수천만 달러가 넘을 것이고 이미 세계적인 톱클래스 자동차 브랜드의 반열에 들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참?! 공모시에 약속했던 자동차는 아직 받지 못했다. 그만큼 제네시스도 앞만 보고 달려온 탓이리라.

제네시스 브랜드의 명명자로서 한가지 소원이 더 있다면, 제네시스 미국 공장에 가서 그 ‘리틀 제네시스’(little genesis)들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창안자의 눈으로 꼭 한번 보고 싶다. 미 LPGA를 석권하고 있는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의 부모님들이 늘 그렇듯이.

<필자 소개>

부지영(夫址榮) 전 조선일보 동경특파원. 언론인-작가. 서울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 조선일보 정치부 경제부를 거쳐 동경특파원, 월간조선 기자등을 지냈다. 동경특파원 시절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본 주부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연재한 ’일본의 환경경제 ‘시리즈가 ’쓰레기를 줄이자’는 범 국민운동의 시작점 곧 제네시스가 되었다. IMF 때는 한국이 IMF에 가게된 과정에 대한 특종-심층 취재물 “대통령은 없었다” 시리즈로 미 씨티 은행이 시상하는 ‘세계최우수 언론인상’을 받았다.

저서 ‘일본, 또하나의 한국’(한송) ‘하버드대 입학에세이 50선’(시사영어사, 영한대역) ‘사이버 세계대전’(한국경제신문사) 외 저서- 번역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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