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영화와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는 두 가지 맥락에서 디즈니의 여성상을 혁신한 첫 번째 작품이다. 하나는 앞선 작품들과는 달리 변하는 것이 남자 주인공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결혼식 장면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즉 여자 주인공 벨의 신분과 정체성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 "미녀와 야수(1991)". (사진=디즈니)

이름 없는 야수 사람 만들기


<미녀와 야수>에서 변화의 동력은 사랑이다. 사랑을 받아야 변하지 변해야 사랑을 받지 않는다. 변화의 조건이 사랑인 것이다. 벨의 마음이 변해야 야수가 사랑을 얻고, 야수가 사랑을 해야만 야수가 변한다. 혁신적인 생각이다. 계급사회 때도, 그리고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아주 정직하게 말하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이데올로기는 <미녀와 야수> 이전에 등장한 여주인공들에게 그대로 투영 됐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 그러니까 짐승 같은 수준일 때는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녀와 야수>는 이 규칙에 도전했다. 우리가 모두 미완의 존재임을, 야성의 존재임을 가르쳐 준다. 책을 좋아해서, 요즘 청춘들 말로 동네에서 아싸(아웃사이더)인 벨도, 은둔형 외톨이처럼 혼자 숨어 사는 야수도 타자에겐 미지의 존재다. 그렇다. 어쩌면 타자는 모든 주체에게 야수고, 결국 모든 주체는 야수일지 모른다.

이 시대를 사는 야수, 미완의 청춘들은 스스로를 완성시키기 위해 애 쓴다. 마치 성직자들이 득도를 위해 수행을 하는 것처럼, 무적의 고수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무협 영화의 검객처럼 말이다. 그 완성을 향한 강박은 완성 된 주체는 가능하다는 기대와 그 완성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는 타자와의 비교, 이 두 동기로 지속된다. 그러나 이건 직능의 담론이고 전문성의 기준이다. 완성 된 인간이란 게 가능할까? 있기나 하는 걸까? 어느 누구도 무엇을 갖추고, 어떤 것을 해내야 비로소 인간으로 완성 됐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계발 책이 팔리고 있는 것이고, 템플 스테이는 휴가철마다 붐비는 것 일 테다.

우리를 안도시키는 완성


연애는 미완의 존재가 미완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엄청난 모험이다. 변화는 사랑을 통해 완결 되는 것도 아니고, 변화 된 후에 사랑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하면서 변화는 계속 되는 것이다.

<미녀와 야수>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이를 말하기 위해 자천타천 완벽한 캐릭터 개스통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스스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그가 속한 공동체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연인으로 위험하다. 이런 남자가 사랑하기에 왜 위험한 사람일까?

우린 개스통이 왜 완벽한 사람으로 표현 됐는지, 동네 아가씨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남자로 설정 됐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는 외모도 훌륭하다. 나름 경력도 훌륭하고 이런저런 재주도 많이 갖고 있다. 게다가 이런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는 방법도 잘 안다. 그러니 대중의 사랑도 받는다.

요즘 말로 인싸고 옛날 말로 킹카다. 반면 야수와 미녀는 미완의 소외 된 존재들이다. 사람의 모습을 하지 않아서 소외 되어 있고, 그 동네의 다른 아가씨들과는 달리 책을 좋아해서 소외 되어 있다. 다른 존재여서 소외 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다. 그래서 다들 같아 보이려고 애를 쓰며 사는 것이다. 평균, 표준, 모범, 기준. 이런 말을 쓰면서 말이다. 이런 기준에 부합하면 우린 보통 정상적이라고 한다. 사람이든, 일이든, 조직이든, 사랑이든, 연애든. 우리가 이렇게 인식 되면 탁월한 개스통처럼 주목 받지는 않아도 최소한 안도한다.

사랑은 서로를 완성 시켜 나가는 과업


그 정상이라는 말에는 비정상을 규정하고 더 나아가 정상 세계로부터 비정상을 소거하고 소외 시키려 하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우린 이 정상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면 완성됐다고 착각한다. 완성됐다고, 완벽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스스로가 기준이다. 그래서 자신의 단점조차 스스로 소외시킨다.

결국 성인이 돼서도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질 못한다. 리플리 신드롬처럼 세상에 내놓는 자신도 그럴 듯하게 포장 된 자신이다. 그리고 그 포장됨을 과시하기 위해 타인의 완벽 유무를 끝없이 평가한다.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완벽하게 변해 달라며 강요한다. 스펙, 다이어트, 성형 등의 요구가 이어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타자는 사라지고 자신이 원하는 대상만 남는다. 완벽남 개스통이 연인으로 위험한 이유다.

<미녀와 야수>가 가르쳐 주는 사랑은 서로를 완성시켜 나가는 사랑이다. 미완의 존재들이 만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서로의 결핍을 메워주기 위해 노력하고 그로인해 나와 타자가 조금 더 완성되어지는 것. 이것이 야수와 벨이 하는 사랑이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남은 인생이 어찌됐든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 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잘 헤쳐 나갈 것 같다는 용기가 생기는 것. 그것이 <미녀와 야수>가 말하는 사랑이다.

사람으로 변한 야수와 책벌레 벨의 사랑은 이제 시작이다. 영화 속에서는 사랑이 싹트는 과정만 담았지 본격적인 연애담은 시작도 못했다. 아주 좋을 때, 컷 사인이 난 것이니 우린 정작 이 두 사람의 연애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우리에게 연애에 관한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연애 잘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나?


<굿윌헌팅>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숀(로빈 윌리엄스)이 윌 헌팅(맷 데이먼)에게 자신의 아내 이야기를 한다. 그녀는 긴장하면 방귀를 뀌고, 심지어 잘 때도 방귀를 껴서 방귀를 뀐 그녀도 놀라서 깨서 “당신이 뀌었어요?”라고 묻곤 했다고, 그러면 “응, 내가 뀌었어.”라고 대답했다고, 회상하며 웃는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 이런 말을 남긴다.

“인간은 불완전한 서로의 세계로 서로를 끌어들이지. 중요하건 과연 서로에게 얼마나 완벽한가야. 남녀 관계란 그런 거지.”

결국, 우린 발견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할 때 지킬 박사와 하이드 중 누가 더 좋은지, 배너와 헐크 중 누가 더 좋은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어쩌면 야수처럼 진정한 사랑을 만났을 때여야 진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알게 되고 놀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백상현의 말처럼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정체성을 “나”라고 받아들이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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