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 개시된 인천상륙작전(크로마이트 작전)에서 함포 지원 사격이 개시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지상군 75,000명이 함선 261척으로 나누어 제주도 아래에서 서해로 북상, 인천해안의 3지점으로 상륙했다. (사진=국가기록원)
1950년 9월 15일 개시된 인천상륙작전(크로마이트 작전)에서 함포 지원 사격이 개시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지상군 75,000명이 함선 261척으로 나누어 제주도 아래에서 서해로 북상, 인천해안의 3지점으로 상륙했다. (사진=국가기록원)

[안경하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9월 28일 오늘은 깊은 의미 있는 해석이 가능한 날이다. 나라와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망의 날인 것이다.

70년 전 ,오늘은 1950년 9월 28일은 6.25전쟁으로 북한군에 빼앗긴 수도인 서울을 다시 수복한 날이다. 

1950년 9월 15일(금, 비·흐림, 83일 차)


9월 22일, 포항 탈환
9월 27일, 울진 탈환
9월 28일, 대전 탈환
9월 29일, 광주 탈환
9월 28일, 서울 수복
9월 30일, 천안 탈환
9월 30일, 강릉 탈환
<참고자료 '6.25 전쟁 1129일'(이중근 편저), 나무위키>


2개월 가까이 연기되었던 인천상륙작전(크로마이트 작전)이 9월 15일 오후 5시 30분 드디어 개시되었다. 양동 협력작전으로 국군은 동쪽 해안인 영덕 남방 장사동에 상륙했다.

유엔군 병력은 약 7.5만 명에 전함 261척이 공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상륙하기 시작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월미도 상륙을, 주력부대는 미 제10군단이 맡았다. 

9월 22일, 국민 해병대는 서울 서대문으로 돌입했고 23일,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총후회 명령을 하달한 후 9월 29일이 서울이 수복되었다. 이윽코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항공편으로 서울에 입성했다.

9월 29일 미국은 유엔의 북진을 승인했다. 10월 1일, 국군이 북진을 개시했다. 국군의 날의 시초다. 7일 오후 5시 14분 경, 미국이 전쟁 이후 처음으로 38선을 넘어 당일 개성을 점령했다. 

한미군의 북진 속도는 6.25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의 남진 속도보다 빨랐다. 북진의 속도는 일일 평균 26km의 속도로 북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수감번호 371 번호가 뚜렷히 보이는 유관순 열사의 옥중 사진. 만세운동 후 일제의 폭행으로 인해 얼굴 전체가 부어 오른 모습이다. (사진=국가기록원)
수감번호 371 번호가 뚜렷히 보이는 유관순 열사의 옥중 사진. 만세운동 후 일제의 폭행으로 인해 얼굴 전체가 부어 오른 모습이다. (사진=국가기록원)

100년전 오늘 오전 8시 20분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수감번호 371 유관순(柳寬順, 1902년 12월 16일 출생, 3남 2녀 중 차녀)이 향년 18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한 열사했다. 3.1운동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16세.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갓 진급한 때였다.

3.1운동에 연이어 여러 독립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고, 그녀의 부모는 3.1 만세운동 와중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


수감 중 재판장에서 유 열사는 "왜놈 따위에겐 굴복치 않으리라" 외치면서 앉았던 의자를 재판장을 향해 던졌다는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수감 이듬해인 1920년 9월 28일 그녀는 옥사했다.

유관순 열사는 1962년에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현재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인 '건국공로훈장 단장'에 추서되었다가, 지난해 2월 26일에 국무회의에서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추가 서훈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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