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라면의 세계화
글,김정현, 삼양이건장학재단 발간

"라면의 재발견-후루룩 맛보는 라면 연대기" 북커버.
"라면의 재발견-후루룩 맛보는 라면 연대기" 북커버.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간편한 ‘한끼’식 라면은 단연 한국인의 기호식품이다. 한류와 함께 세계인들이 함께 즐기는 세계화 식품이기도 하다.

삼양 이건(以建)장학재단(이사장 김정현)이 새해 들어 재단목적사업의 일환으로 ‘라면의 재발견’ 도서를 발간했다. 중대 김정현 광고홍보과 교수와 저술가 한종수씨가 집필했다.

라면의 원조는 일본이지만 어려운 코스를 거쳐 한국에 상륙한 후 ‘한국라면’으로 탄생했다가 세계인과 함께 오늘의 새 라면시대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라면의 재발견 요지다.

세계라면협회 통계에 따르면 세계 최대 라면 소비국은 인구 15억의 중국이다. 이어 인도네시아, 인도, 일본 등 인구가 많은 나라들로 10대국 순위가 매겨지면서 한국은 7번째 소비국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국민 1인당 소비량으로 보면 2019년 기준 한국인이 75.1개로 세계 1위, 이어 네팔(57.6개), 베트남(56.9개) 순이다.

한국라면은 삼양식품 전중윤 창업주가 당시 잘나가던 제일생명 사장직을 그만두고 1961년 8월 식용유 회사를 인수하면서 개발, 착수했다. 처음 ‘삼양제유’로 출발하여 ‘삼양식품’으로 개칭하여 1963년 9월 15일 삼양라면 첫선을 보였다.

당시 곱슬곱슬 모양의 라면 한봉지 값은 10원으로 남대문시장의 꿀꿀이 죽 한 그릇 5원의 2배였다. 그러나 담배 한갑 25원, 커피 한잔 30원과 비교하면 얼마나 값싼 영양식인가. 당시 대다수 국민이 배고픈 시절, 특근․야근의 간식, 24시간 국방전선의 ‘불침번 야식’으로 너무나 안성맞춤이었다.

삼양라면의 선풍적 인기 속에 풍년라면, 닭표, 해표, 아리랑 등 후속 라면이 우후죽순 격이었다. 곧이어 1965년 롯데라면이 나오고 1978년 ㈜농심으로 기세를 펼치면서 삼양과 농심의 양강구도가 형성됐다.

서울올림픽 성공 직후 좋은 세월 속에 1989년 10월 공업용 우지 파동이 라면업계를 강타했다. 어느 익명의 투서가 국민식품 유공자들을 일거에 반국가, 반사회 악덕기업인으로 만들었다. 인체에 무해한 우지(牛脂)를 내세워 모함한 투서였다. 당시 김종인 보건부 장관(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TV에 나와 라면을 시식해 보이며 “인체무해를 보장한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언론의 융단폭격 아래 여론마저 완강했다. 결국 라면 기업주들이 구속되고 선발 기업들은 줄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로부터 법정투쟁이 7년 9개월간 지속되어 1997년 8월 26일, 대법원에 의해 최종 무죄 판결됐다. 이때는 이미 익명투서가 선발 1위를 밑바닥으로까지 끌어내린 뒤였다.

삼양 전중윤 회장은 법률가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했지만 권고를 사양했다. 그냥 절치부심으로 재기하겠다고 다짐하여 실제로 생전에 거의 재기할 수 있었다. 당시 전 회장은 강원도 태생의 ‘암하노불’(岩下老佛)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글로벌화 시대 세계 어딜 가도 한국라면이 최고의 인기다. 수출로 나가고 해외현지 투자로도 나가 ‘현지화된 한국라면’이다. 그동안 한국라면을 대변한 익숙한 브랜드라면 삼양라면을 위시하여 신라면, 진라면, 너구리, 안성탕면, 스낵면, 육개장 사발면, 참깨라면 등 수없이 꼽을 수 있다.

‘라면의 재발견’은 끝부분 부록을 통해 ‘한국라면의 아버지’ 전중윤 창업자 스토리를 실었다. 삼양라면의 급성장기를 통해 종합식품 그룹을 쌓고 식품황제 칭호를 받기도 했다. 이어 전 국민 대상 ‘식량안보’를 신념으로 대관령 목장을 개간하고 2005년부터 풍력발전기를 도입하여 강릉시의 전기수요 70% 상당을 삼양목장에서 생산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기획 삼양이건장학재단, 펴낸곳 도서출판 따비, 240페이지, 값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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