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아(SUNWOOJUNGA) 아티스트.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홈페이지)
선우정아(SUNWOOJUNGA) 아티스트.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홈페이지)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얼마 전 선우정아의 노래 <도망가자>를 들었다. 익숙했던 단어의 낯선 울림과 마주하고 한참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도망이 다른 느낌을 줬던 순간들이 있었다. 영화 <졸업>에서 벤자민이 일레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서 도망치는 장면이 기억의 앞자리를 차지한다. 썬더버드로 절벽을 향해 내달렸던 <델마와 루이스>의 절망스러운 도망도 생각난다. <고래사냥>에서 병태와 민우가 춘자와 함께 그녀의 고향으로 향하던 도망은 희망적이었다.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는 앞의 도망과 또 다르다. 도망 자체도, 그 이유도, 그리고 도망에서 돌아옴도 모두 긍정하며 일상에 지친 이들을 보듬어준다. 전에도 이렇게 우울하고 절망적인 단어를 따듯하고 낭만적으로 바꿔 놓은 마술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박라연 시인의 <너에게 세 들어 사는 동안>과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에서는 가난도 충만한 사랑의 조건이 된다. 서귀포의 박물관에서 들여다본 이중섭 화가의 셋방 시절의 가난은 작은 은박지에 그린 그림과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사랑 뒤에 가려졌다.

단어와 사물의 다양한 얼굴


강사 시절 만난 광고홍보학과 학생들은 창의적인 사람임을 자처하고 그렇게 보이길 원했다. 그러나 그 바람과 달리 단어나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곤 했다. 한 병의 소주라도 누가 마시는지, 언제 마시는지, 누구와 마시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고, 심지어 다른 차원의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걸, 그 다양한 가능성을 펼쳐 보는 것을 어려워했다. 예를 들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마시는 소주, 짝사랑해왔던 사람과 마시는 소주, 아버지와 처음 마시는 소주, 자식들 다 시집 장가보낸 뒤 텅 빈 집에서 노부부가 마주 앉아 마시는 소주는 다른 풍경과 의미를 담고 있다. 단어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소주 얘기 나온 김에 계속 소주를 예로 들어보자. 최근 <청춘>이라는 소주 광고를 보면 취향이 확실해도, 칼퇴를 해도, 뭐든 신나도, 팽팽해도, 체력 좋아도, 아이돌 덕질을 해도 청춘이라고 한다. 소주의 타깃을 2040으로 잡고 나서 그들을 위해 청춘이라는 단어의 해석 폭을 넓힌 것이다. 생활 속에서 “아직 청춘이네.”, “아직 팔팔한데?” 같은 말을 무심히 들어 넘겨듣지 않던 이가 이런 광고를 기획했을 것이다. 물론 맥락에 따라 청춘을 비아냥거림으로, 부정적으로도 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 겨울에 짧은 치마를 입고 출근하는 아내에게 무심결에 “아이고, 아직도 청춘인줄 아나 이 사람이.”했다가는 겨울 동안 편집실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물과 단어의 다양성은 쉽게 일상에서 발견되지만 이걸 강의를 통해 가르치는 건 쉽지 않다. 단어와 사물이 가진 다의성과 다면성을 포착하는 시선은 경험이나 학습과 같은, 쌓여진 내적 소양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경험과 공부로 쌓아간다.


사물과 단어의 의미는 Context, 즉 맥락과 상황에 의해 바뀐다. 그 바뀜의 무한한 가능성을 창작자의 필요에 따라 사진이나 병풍처럼 펼쳐 떠올리는 건, 어찌 보면 하나의 기술이다. 영화의 미장센과 비슷할 것이다. 미장센이랑 한 공간의 분위기와 사물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술이다. 이런 기술이라면 기술, 즉 전후좌우의 맥락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단어와 사물의 의미를 담아내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필자도 단어의 다양한 뜻과 그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던 카피라이터 초년병 시절엔 고종석의 <어루만지다>와 같은 책을 몇 번이고 읽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에로스와 로맨스 그 사이 어딘가에 쓰일법한 단어들의 쓰임새를 들여다보면서 그 맥락과 뉘앙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었다.

그 맥락이라는 거미줄의 넓이와 튼튼함을 만드는 또 다른 토대는 상호텍스트 능력에 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듯이 백퍼센트 독창적이고 독존적인 광고는 있을 수 없다. <나인 하프 위크>라는 영화가 히트 했을 때 한국의 광고들이 그 영화의 멋진 장면을 빌려 왔듯이 하나의 텍스트는 참조점이 되는 텍스트가 있기 마련이다. 이 참조가 단순한 표절을 넘어서서 혼성 모방이나 패러디, 오마주, 더 나아가 제3의 창조물이 되기 위해서는 창조자 내에 다양한 텍스트가 존재해야 하고 그 개별 텍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에 창작자의 다양한 경험이 더해지면 소위 독창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카피라이터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경험을 인상 깊게 받아들여 저장하는 버릇이 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인상 깊다 싶으면 기억 속에 저장하여 자기 고유의 사진첩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다. 2007년인가, 다들 영상 통화가 가능한 휴대폰을 사느라 정신없었다. 필자는 불과 이년 전에야 겨우 2G폰을 버린 사람이라 영상 통화가 왜 필요한지 당시에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전에서 종일 강의를 하고 부산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옆을 보니 젊은 엄마가 아이를 업은 채 휴대폰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부지런히 손짓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뭘 하는지 몰랐었다. 잠시 후 수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음을 알았을 땐 흔한 말로 번개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영상 통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2010년, 영상 통화 기능을 본격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한 아이폰4 광고에서부터 수화로 영상 통화를 하는 연인과 대가족의 명절 상을 처음 차려 본 딸이 어머니에게 검사 받는 장면이 등장했으며, 영상통화로 아빠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모녀가 등장했다. 이런 광고들은 내가 했던 경험과 유사한 경험, 소비자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두 개의 사전을 만들어 온 시간


최근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 표현을 두고 방송심의위원회와 예능 PD 사이의 실랑이가 있었다. 줄임말과 신조어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줄이라는 방송심의위원회의 지적에, 그런 재미를 빼고 어떻게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냐며 예능 PD들이 발끈했다. 방송심의위원회의 염려도, PD들의 발끈함도 이해는 간다. 사물이나 단어가 시대와 대중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새로이 획득 된 의미들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본연의 의미를 없애버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까지 닫아버릴 위험성을 늘 경계해야 한다.

철학자 조광제는 “어떤 공부를 하건 간에 공부란 기본적으로 개념들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직업병 때문인지 익숙한 단어라도 쓰다가 조금이라도 석연치 않은 낌새가 있는 단어는 그 원뜻을 다시 파고든다. 그 원뜻, 사전적 의미를 알아야 적절한 문장의 맥락에 놓일 수 있고, 그것이 능숙해진 뒤에야 그 단어의 새로운 쓰임새를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카피라이터는 모두와 공유하는 사전과 경험으로 만들어가는 사전을 만들어 간다. 앞에 사전은 단어의 남용을 말리고, 뒤의 사전은 사고의 유연성을 촉진하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러니 어떤 사전이든 얇아질 수는 없고, 오히려 일을 하면 할수록 두꺼워지는 게 정상이다.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로 인해 도망이라는 단어는 낭만, 돌발, 즉흥, 일탈이라는 의미와 함께 위안, 위로, 재충전의 의미까지 가진 것으로 업데이트 됐다. 나이 먹을수록 유연해져야지 다짐하지만 가끔 과거의 문법과 사전이 생각을 고정시킨다. 이런 노래가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향해 날 부드럽게 이끈다. 노련한 요가 강사처럼 고정 된 문법과 사전의 뭉친 근육을 풀어낸다. 그렇게 나만의 사전을 차곡차곡 업데이트 하다보면 좀 더 이 짓을 해먹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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