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달(紙の月, Pale Moon, 2014)

영화
영화 "종이 달(紙の月, Pale Moon, 2014)" 스틸컷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영끌”이라는 단어가 나 같은 신조어 무식쟁이한테도 익숙해질 만큼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더니 요즘엔 주식 투자가 열풍이다. 나만 안하나 싶은지 앞 다퉈 증권사로 달려가고 있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다. 얼마 전 우리 감독도 코로나19의 백신이나 치료제, 주사기를 만드는 국내 기업의 주식을 사둘까 너스레를 떨었다. 여유 돈만 생기면 카메라며 각종 장비를 사는 사람까지 주식 투자 운운하는 걸 보다보니 일본 거품 경제 시기 즈음을 다룬 영화 한편이 생각났다.

좋았던 한 때는 만들 수 있을까?


<종이달>은 버블경제라는 일본 경제의 불꽃놀이가 끝나갈 무렵인 1994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입금 전표를 수기로 써서 처리하면서도 은행들의 영업 경쟁은 공격적이었고 낮은 금리로 인해 모든 돈이 주식과 부동산에 몰리던 시절의 이야기인 것이다. 여주인공 미카는 이 당시 부동산 투기 붐을 타고 조성 됐지만 지금은 거의 유령도시로 전락했을 베드타운에 사는, 지역 은행의 계약직 직원이다. 이런 그녀가 고객 돈 몇 억을 횡령해서 흥청망청 쓴 이야기가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다. 그래서 생각 없이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금융 범죄 영화처럼 보게 되고, 그렇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정작 “종이달이 뭐야?”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종이달은 일본인들에게 좋았던 한 때를 의미한다. 사진관이 일본에 처음 등장했을 때 초승달이 거린 스튜디오에서 가족이나 커플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었다. 사진관에 사진 찍으러 온 연인들이야 그 사랑이 한창 뜨거운 것이 일반적일 테고, 가족사진을 찍는 가족은 당연히 가족의 행복한 순간을 담고자 할 것이다. 게다가 초창기 가족사진은 제법 고가였을 테니 사진엔 담긴 건 당연히 가족과 연인의 가장 행복한 시절, 전성기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종이달은 행복한 한 때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횡령한 돈으로 뭘 했기에 영화 제목이 종이달일까? 그녀는, 범죄 수익을 유흥비로 탕진하는 절도범이나 강도들처럼, 고객 돈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탕진했다. 부자 행세를 하며 대학생 불륜남의 등록금을 대주고 그와 특급 호텔에 묵으며 3박 4일 간 질펀하게 놀았다. 그 남자에게 컴퓨터를 사주고 집을 얻어 준 뒤 동거 흉내도 냈다. 그 탕진은 그녀가 살아온 삶이 아닌 그녀가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던, 꿈꾸던 ‘행복한 한 때’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것만 종이달 같은 가짜 행복이 아니다. 그녀가 꾸린 가정, 집,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녀가 ‘이상적’이라 꿈꾸던 ‘행복한 한때’의 모조품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살고 있는 주택 단지를 보고 있으면 <스텝포트 와이프>에 나오는 스텝포드와 <트루먼쇼>에 나오는 작은 섬 시해븐(Sea-Haven)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거품에 휘말리지 않은 삶


그녀의 삶은 거품 경제가 터져 나갈 때도 허공을 날아다니며 용케 버틴, 터지지 않고 남아 있던 작은 비눗방울처럼 보인다. 햇빛이 스쳐 가면 무지개를 흉내 내며 아름답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움이 그 거품 안에 있다. 그 위태로움은 연달아 보여주는 몇 개의 시계 속에서 점점 부풀어 오른다. 계약직 연장 기념으로 그녀는 남편에게 대략 30만 원 가량의 시계를 선물한다. 시계를 선물 받은 남편은 “골프 칠 때 이런 편한 시계가 하나 있었으면 했다.”고 좋아한다. 이때 미카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린다. 미카는 나름 큰 맘 먹고 사치를 부린 건데 정작 남편으로부터 편한 시계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남편은 출장 갔다 오는 길에 까르띠에 시계를 사와 선물한다. 그 정도는 이제 차도된다는 말도 함께 덧붙여서. 그 후 미카는 횡령한 돈으로 연하의 대학생 연인에게 시계를 선물한다. 평균 1, 2억 정도를 호가하는 필립 파텍이다. 시계가 비싸진다고 시간이 늘어나지도, 사랑이 커지지도 않는다. 거품에서 발견되는 그 오묘한 빛깔이 거품의 것이 아니듯이, 시계가 아무리 화려해도 시계는 시계인 것이다. 부의 과시를 위한 사치품이기 전에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 견디며 살아내야만 하는 일상의 엄밀함을 위해 존재하는, 그저 ‘사물’이다. 그러나 미카에게 시계는 커지는 욕망 그 자체다. 물론 시계의 거품을 외면하고 일상과 사물의 세계를 묵묵히 살아내는 사람도 있다. 미카의 직장 상사 사미다. 그녀는 25년을 한 은행에서 일했다. 그녀는 조용한 일본의 지역 은행조차 대출 실적에 내몰려야 했던 초고도 성장기를, 그 내부에서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남들이 대출 받아 주식에 투자하고 부동산에 투자할 때도, 그리고 그 수익으로 긴자와 신주쿠의 유흥업소를 들락거리고, BMW 같은 고급 승용차를 덥석덥석 사들이며 돈 쓸 때도 그녀는 일찍 잠들고 아침에 출근하는 삶을 지켜냈다.

종이달(paper moon). (사진=인스타그램)
종이달(paper moon). (사진=인스타그램)

종이달이 질문해 온 진짜 삶


미카는 우리에게 진짜 삶이 무엇인지 이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노골적으로 묻는다. "내가 남에 돈으로 내가 마음에 품었던 욕망을 실현했고 누렸어. 이게 진짜 삶 아니야? 넌 맨 날 월급 받아먹으려고 밤 한 번도 못 새봤어. 그런 게 진짜 삶이야? 욕망대로 살아보지 못한 삶이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어?"라고 말이다. 대중문화에서 종이달, 즉 Paper moon은 늘 미카와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냇 킹 콜의 노래로 유명한 <its only a paper moon>은 “종이로 만들어진 가짜 달일 뿐이지만 당신이 믿어주기만 하면 진짜로 믿게 될 거예요.”라고 노래한다. 마지막 구절에선 “바넘과 베일리가 만든 서커스처럼 우스운 가짜 세상이지만 당신이 날 믿어주기만 하면 더 이상 가짜가 아니죠.”라고도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 블랑쉬 드 부아도 욕조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로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남부 명문가의 딸이었지만 남편의 자살과 부모의 빚잔치, 그리고 제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동생 부부가 사는 뉴올리언스로 도망 온 그녀가 만들어낸, 여전히 텍사스 부자가 자기를 데리러 올 거 같은, 믿기만 하면 그저 행복할 수 있다는 환상의 세계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21세기 버전이 <블루 재스민>이고 일본 버전이 <종이달>인 것이다.

가사에 등장하는 바넘은 프로모터의 조상이다. 그는 자신의 박물관과 서커스 홍보를 위해 “최고”, “최초”, “위대한”, “일생에 단 한번” 같은 문구를 남발했다. 그 문구의 힘, 환상의 힘은 서커스의 천막 안에서 발휘됐다. 밖의 냉혹한 현실을 잠시 잊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와 맞물려서 말이다. <종이달>의 환상도 바넘의 서커스와 같다. 그 환상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은 스튜디오에 걸린 종이달 같은 것이다. 스튜디오에 걸린 달은 썰물과 밀물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엷은 빛조차 만들어 낼 수 없다. 종이달의 힘은 플래시가 터지는 짧은 순간에 불꽃놀이처럼 발휘 됐다가 사라진다.

철학자 강상중은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격려했다. 그저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어쩌면 공자가 말한 불혹의 의미도 강상중의 말과 비슷한 의미이지 아닐까? 날 흔들 것 없는 것이 아니라 흔드는 어떤 것들은 종이달에 불과함을 알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일궈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나이라는 의미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시간의 굴레를 인정하고 수많은 <종이달> 앞에서도 의연하게 그 시간과 시대를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 보름달 같은 삶이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삶은 투자일 수 있듯이, 누군가에게 삶은 저축일 수 있다. 미카에게 삶은 환상으로 점철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사미에게 삶은 묵묵히 지켜내는 일상이다. 어떤 삶이 진짜이고 옳은 삶인지에 대한 판단은 철학과 종교, 심지어 역사에 떠넘기자. 일단 오늘 하루 묵묵히 살아낸 당신을 위해 가장 좋은 잔에 자기 격려의 술을 가득.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키워드

#최영훈 칼럼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