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E (WALL-E, 2008)

윌-E 포스터
윌-E 포스터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대학 강사 노릇을 할 때, 장범준의 노래 가사처럼 봄만 되면 흩날리는 꽃들 속에서 심난해진 학생들의 상담을 몇 번 해 준적이 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자기보다 나이가 열 몇 살 많으면 으레 인생을 좀 안다고 생각들을 하니 거절하고 내뺄 수도 없어 곤란했었다.

강사를 안 하니 이제 그런 일은 없겠거니 했는데, 쉰을 앞두고 흰머리만 좀 있으면 마음을 다스릴 줄 안다고 생각하는지 젊은 후배들이 종종 상담을 신청한다. 마흔이 불혹의 나이라는 걸 진짜 믿는 건지. 나 또한 그걸 믿고 마흔을 기다렸지만 공자님 시대의 마흔과 이 시대의 마흔이, 그 시대의 유혹과 지금의 유혹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걸 미처 따져보지 못했음을 마흔이 되고서야 알았었다. 그렇다고 마흔이 되도 불 혹은 고사하고 마음속은 항상 전쟁 중이고 마음의 고요는 가장 사치스러운 순간으로 기억 될 만큼 드물게 찾아온다는 걸 구구절절 후배들 앞에서 고백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마주 앉곤 한다. 후배들은 술이 나오기도 전에 “선배, 마음이 좀 안 흔들렸으면 좋겠어요.”,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요. 가라앉히고 사는 비결, 어디 없을까요?”라며 답을 재촉한다. 이럴 때 고상한 어른처럼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의 첫줄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나 김용택 시인의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의 한 구절인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를 읊어준 뒤 “술이나 마셔.”하고 서둘러 입을 봉해버리는 게 가장 손쉬운 대처방법이겠지만 나온 술에 혹해 우물쭈물 하다 결국 누구나 다 아는 애니메이션 하나를 곁들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월E는 말한다. 흔들리니까 사람이라고


우리는 매일 흔들린다. 지진에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무감 지진이 있듯이 우리의 흔들림 중에도 인지되지 못하는 흔들림이 있다. 심지어 분명 흔들리고 있는데 아니라고 우기기도 한다. 멍하니 홈쇼핑 채널에 시선이 멈췄다면 이미 흔들린 것이다. 누군가의 주장에 공감 하든 반발 하든 그것도 흔들림이다. 타자에게 공감하는 것은 상대와 같은 마음의 울림을 갖고 있기에 나타나는 공명 현상이다. 그러니 흔들림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흔들림이든 간에 흔들림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휘발유 가득한 드럼통 같이 잠잠한 내면에 “탁”하고 손가락 튕기듯 무언가가 스파크를 일으키면 들불처럼 흔들림이 번진다. 스님들이 속세를 떠나 산중 사찰에서 수행하시는 것도, 가톨릭 수도원이 산속에 있는 것도, 심지어 기숙재수학원이 외딴 시외에 있는 것도 이런 외부 자극으로부터의 격리가 있어야 흔들림 없이 원하는 과업을 향해 정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틸 컷
스틸 컷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정말 흔들리지 않는 삶이 좋을까? <월E>는 아니라고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최후의 인류는 커다란 방주 같은 우주선을 타고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해진 지구를 떠난다. 지구에는 쓰레기를 치우는, 꽃과 벌레를 사랑하는 아주 낭만적인 로봇 월E와 벌레들만이 남아 있고, 우주선에선 지구가 다시 회복됐는지 알기 위해 종종 첨단 정찰 로봇을 보낸다. 어느 날, 에바라는 로봇이 지구에 오게 되고, 월E는 에바에게 홀딱 반해서 그녀(?)를 쫓아 우주선까지 간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급진전 되며 모든 사건은 우주선에서 펼쳐진다.

우주선에 탄 인간들은 퇴화했다. 왜 퇴화했을까? 최후의 인류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모든 육체적 활동을 금지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 걷기, 연애 등 땀을 흘릴만한 모든 활동을 말이다. 이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쉴 뿐이다. 나머지는 로봇이 다 한다. 이동은 노선을 따라 움직이는 안마의자를 닮은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고, 옆에 나란히 가고 있는 친구랑 얘기할 때는 고개조차 돌릴 필요 없이 눈앞의 모니터에 뜬 친구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이렇게 고통과 흔들림을 없앤 곳, 최후의 인간이 보존되고 사육되는 온실 같은 우주선에서 최초의 움직이는 사람이 등장한다. 먼저, 느닷없이 등장한 월E와 소통하려던 존이라는 남자가 이동하는 의자에서 떨어진다. 메리라는 여성 또한 월E 때문에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전망을 보게 된다. 우주선의 시스템과 규칙을 따르지 않는, 그 평형을 깨는 존재가 두 사람을 흔든 것이다.

두 번째 움직임은 이 두 남녀가 우주선 밖에서 놀고 있는 월E와 에바를 보기 위해 의자의 궤도를 벗어날 때다. 그 광경을 처음 분 메리가 존을 불러 함께 창밖을 본다. 세 번째 움직임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수영이 금지 된 인공 해변에서 물장난을 할 때다. 네 번째 움직임은 두 남녀가 우주선이 기울어져서 아이들이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갈 때 서로의 손을 잡아 아이들의 완충재 역할을 하며 아이들을 구할 때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의 연쇄 속에서 두 사람은 사람다움을 회복한다. 고개를 들어 낯선 존재를 보고, 타자를 마주보고 사랑을 시작한다. 그 사람과 함께 보고 싶은 풍경을 보기 위해 나란히 창가에 서고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내 몸을 움직여 물결을 일으킨다. 이렇게 육체를 처음 움직인 두 사람이 결국엔 돌아갈 지구의 미래 세대인 아이들까지 구한다.

사랑이 우릴 구원한다.


<월E>는 몇 년 뒤에 나온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을 연상시킨다. 더 뒤에 나온 영화 <패신저스>도 떠오른다. 세 이야기 모두 우주를 방황하는 이야기 에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마도 인간을 구원하고 살게 하는 것은 우주 탐험도 가능하게 하는 첨단 기술이 아니라 그 어떤 기술로도 만들 수 없는 사람다움 그 자체, 인공지능도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파피용>에선 이런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던져진다. 우주공학자 쥘 크라메르가 “빛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들인 이브 크라메르가 “난 사랑이 우릴 구원할 것이라 생각했는데.”라고 독백한다. 그 대화 3년 후, 역설적이게도 쥘 크라메르는 사랑 때문에 자살한다. 광자역학이 우주선에 무한 에너지를 줘서 인류의 새로운 희망을 찾아 은하계를 항해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힘도, 심지어 그 삶을 포기하게 하는 절망적인 파괴력을 가진 것도, 결국은 사랑의 힘이라는 것을 과학자의 죽음이 말한다.

연애든, 이웃 사랑이든, 인류를 향한 박애 정신이든 결국은 마음의 흔들림으로 시작된다. 마음이 동(動)해야 되는 것이다. 그 흔들림이 두려워서 최소한의 울림조차 묶어 놓으면 우린 굳어져 퇴화한다. 요즘 친구들 표현을 빌려 가볍게 표현하면 그야말로 연애 세포가 죽는 것이다. 연애 세포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한 모든 애정의 세포가 죽어버린다. 운동(運動)또한 흔들림이고, 그 흔들림, 그 부대낌이 육체에 가해져야 우리는 튼튼해질 수 있다. 결국 사람다움을 얻고 유지하며 살기 위해선 안팎의 흔들림을 견뎌내며 육체와 마음의 근육 모두 단련해 나가야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월 E>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도 이것일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로봇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인간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지구를 향한 귀환으로 마무리 된다. 이를 통해 한명이 움직이면 스스로를 구원하고, 타인을 위해 움직일 때 사랑이 시작되고, 모두를 위해 움직일 때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을, 지구란 결국 그렇게 순차적으로 사람다움을 찾은 이들이 사람답게 사는 터전임을 알려주려고 말이다.

신학자 조지 휫필드라는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기를 원하노라.”라고 고백했다. 쓰임 받지 않으면 신의 사제로써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몸도 마음도 움직이지 않으면 녹이 슨다. 그래서 흔들림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 된 것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바이탈사인이다. 역설적이지만 마음과 몸이 건강한 사람에게만 흔들림이 허락되는 것인지도, 그것이 감지되는지도 모른다. 그 흔들림을 겪고 싶어도 못 겪을 때가 온다. 물론 지금 봐서는 쉰도 훨씬 넘어서일 것 같지만 언젠간 올 것이다. 모든 자극에도 반응이 더디거나 못하는, 그런 무감의 세월이 오기 전에, 흔들림조차 리듬이 되는 청춘의 나날 중엔 좀 흔들리며 살아도 된다고 무책임하게 말을 한다. 자, 쓸 만한 조언이었으면 복채 대신 술이나 한잔 더.

(말하기 어려운 고민 또는 우울감을 느끼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으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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