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명필 한석봉 평전
박종면·다니엘 최 공저, 행복우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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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 조선조 명필 한석봉의 일생을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그린 소설로 천자문에 얽힌 고사들을 소개한다.

석봉은 1543년 황해도 송도, 호랑이가 출몰하는 잠성마을서 태어나 조부한테 4살부터 천자문 배우고 서당공부 2년 무렵, 거창신씨 명문, 영재 신희남이 천재소문 듣고 왔다면서 평생 스승을 맡았다.

그가 석봉 모자를 천리길 전라도 영암으로 데려가 글공부를 맡아 3년 만에 한성부 서법경연대회서 장원했다. 이때 떡장사인 모친 수원 백씨가 호롱불을 끈 채 떡 썰기와 글씨 쓰기 시합을 거쳐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멀다”면서 더욱 정진토록 독려했다.

이에 한양으로 올라가 성균관에 입교하여 200여 학생 대표로 국왕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작성하고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여 소과 차석으로 급제했다. 첫 벼슬로 숭문원에서 국왕 문서를 관리하는 사자관(寫字官)이 되어 임진왜란 때는 외교문서만 챙겨 선조의 평양 몽진에 수행했다. 피난지에서는 왕명 따라 천자문을 배우기 쉽게 글자마다 해설을 첨부하여 선조가 환도한 후 ‘석봉 천자문’을 완성했다.

경복궁에서 활자를 만드는 주자소 서사(書寫)직을 맡았을 때는 동지사 일원으로 명나라 연경에 가서 예부상서 실세비서와 글로 교우하여 태조 이성계 가계 족보가 잘못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바로 고치는 외교력을 보여줬다.

임란으로 출병했던 이여송(李如松) 장군이 귀환할 때는 왕명으로 석봉 글씨를 선물했다. 다음 해에 석봉이 사은사의 일원으로 연경에 가니 중국 최대 거부 장세기가 일행을 초대하여 큰 액자 글씨를 자랑했다. 바로 석봉이 이여송한테 써준 글씨를 장세기가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란이 끝나 벼슬을 마치고 향리서 요양하고 있을 때 국왕이 다시 불러 경기도 가평군수를 맡으라고 했다.

부임하고 나니 만석꾼 최부자가 생일잔치를 벌이기에 ‘거지 행각’으로 갔다가 쫓겨났다. 곧이어 관복을 차려입고 가니 지극 환대였다. 이때 술잔 받아 관복에 쏟고 음식 받아 옷소매에 덮어씌우니 모두가 깜짝 놀랐다.

석봉이 거지 행각으로 쫓겨나고 관복 입고 와서 환대받으니 필시 “관복이 받아야 할 술잔 아니오”하니 만석꾼이 금방 개과천선했다는 이야기다.

가평군수 2년 만에 금강산 가는 길목 첩첩산중 흡곡 현령으로 발령받아 자연과 벗 삼아 2년 임기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왔다가 명나라 황태자 책봉 축하 사절단으로 다시 외교길에 나섰다. 그뒤 임진왜란 공신 교서 필사를 맡아 1등 공신에 이순신, 권율, 원균 등을 적고 석봉 자신도 호성원론 공신 1등으로 책록됐다.

고향 송도로 귀촌하니 교산 허균이 인근 수안군수로 부임해 글로 교유하다 62세에 졸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허균은 역모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소재 행복우물 2022. 12. 7. 발행. 37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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