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호]

무엇이 경영위기인가?

요즘 기업주와 경영자의 입장은 무엇인가. 불편하다고 들었지만 특별히 내세울 입장은 없을 것이다. 눈치나 소문으로도 인기폭락을 감지하고 할 말이 없다고 답변하지 않을까. 외부에서 짐작하고 판단하기를 세상이 야속할 것이다. 왜 기업인들 처지가 말못할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까 궁금하다.

글 / 裵秉烋 대표편집위원

나쁜 소문, 위험한 고비

기업이 최대의 경영위기를 겪고 있다니 무슨 말인가. IMF한파도 물러갔다는데 괜히 엄살인가 보다.

대기업주 일수록 잠을 못 잔다고 들었다. 돈 많은데 무슨 걱정으로 잠을 못 잘까. 듣고 보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준비할 생각도 없던 긴급상황이 한꺼번에 도래하여 정신을 못 차린다는 사정이다.

하긴 기업개혁이 부진하다는 비판이 거세다. 구조조정을 자구노력에 강도를 높여야 한다가 이젠 고강도와 초고강도로 바뀌었다. 최고경영자와 임원이 월급을 반납하고 무보수로 구조조정하는 기업도 있다.

쫓기는 어느 재벌총수를 위로하기 위해 전경련회장단이 모여 폭탄주를 마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분명 기업주와 경영자의 심경이 불편한 계절임에는 틀림없다. 설마 큰 기업을 죽게 만들겠느냐는 태평스런 자만심 때문에 맞은 위험한 고비가 아닐까.

경제기자의 안목으로는 소문과 평판이 나빠진 것이 위기의 실체다. 정부는 시장이 기업을 외면하고, 기업인을 거부한다고 말하지만 시장도 평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대기업인은 인기인이자 요인이다. 그런데도 박수를 못 받고 무대에서 내려와야 할 상황이라면 심각한 위기다.

소문이 나빠진 후 기업주를 옹호해줄 용기 있는 지지자가 없어졌다. 택시를 타면 대기업인들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는 흥분뿐이다. 기업인 덕택에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옹호는 한마디도 들을 수 없다.

사실이 그럴까. 결코 사실일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나쁜 소문이 사실을 왜곡시키고 기업인을 이해코자 하는 우호적인 발언을 봉쇄시켰을 것이다. 그러니 시중의 평판과 소문이 얼마큼 무서운지 짐작할 만 하다. 그리고 기업인이 매사에 얼마큼 조심하고 신경을 써야 옳은 지를 깨닫게 된다.

소유권과 경영권 비상

경영권 박탈이라는 용어에서 기업주가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은 물론이다.

기업개혁 과정에서 주식포기각서는 숱하게 나왔고 경영권 박탈도 실제로 있었다. 이는 기업인에 대한 사형선고이다.

부실기업으로 국가와 사회에 부채를 안겨줄 기업인에게서 경영권을 뺏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종래에는 법적 소유권까지 박탈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부채가 많고 부실이 심해도 다소 시달리기는 했었지만 경영권은 무사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엄포가 아닌 실제상황으로 경영권 박탈을 보고 어느 기업주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영성과에 대한 문책이나 불신도 종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주총이나 증시에서 말썽은 되지만 참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올 주총에서는 소액주주들이 들고일어나 넋을 잃을 뻔했었다. 게다가 일과성으로 번진 소용돌이가 아니라 아예 대주주의 독단과 전횡을 규제하는 제도장치가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재계가 벌벌 떨고 있던 지배구조 개선안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지배구조 개선이란 지분율도 낮은 대주주가 기업군을 손 안에 쥐고 멋대로 끌어가는 재벌경영을 타파시킨다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지배주주의 책임은 무거워지고 의무와 감시는 강화된다. 인사와 회계의 독점은 절대로 안되고 주식의 위장분산과 은닉도 용납되지 않는다. 또한 이사회의 기능도 투명화되고 감사의 역할이 높아지며 중요한 정보는 적법하게 공개돼야만 한다.

WTO 등의 권고사항이기도 한 지배구조 개선은 강제가 아니라지만 실제는 강제규정이나 다름없다. 지배구조 개선에 따라 금융과 세제상의 처우가 차별되고 신용평가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앞세워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고 있기에 이를 거부할 기업이 있기 어렵다. 그래서 경영위기의 본질은 지배구조 개선안을 어떻게 수용하겠느냐는 점이다.

이 안에 따르면 총수나 회장은 군림하거나 통치하는 멋도 재미도 없어진다. 이사를 마음대로 선임할 수도 없고 회계처리도 적당히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정상이냐는 반발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전경련이 지배구조 개선목표를 지나치게 높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선진국에도 법제화되지 않은 최고수준을 강요하면 경영권이 안정될 수 있겠느냐고도 반문한다. 외국인 기업에 비해 제도적으로 역차별되고 있는 판국에 경영권마저 흔들리면 누가 몸을 던져 기업을 경영하겠느냐는 울분을 감추지 못한다.

관행과 미덕마저 유죄

재벌개혁에 사회적 압력이 너무 크게 작용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외국인 투자자의 기호에 영합하지 않느냐는 시각이다.

주한외국인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앙케트 조사를 하면 의례히 규제가 극심하고 재벌개혁이 미진하다고 응답한다. 그들은 그런 답변을 할 수 있는 입장이다. 미국에 투자한 우리나라 기업인들도 보이지 않는 차별대우의 벽을 호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개혁을 명분으로 기업의 소유형태에서부터 시장진입과 세제지원, 그리고 회계와 인사에까지 외국인 기업과 비교하여 역차별하는 것은 자해행위라고 반발한다.

새로운 지배구조 개선안에 따르면 지배주주가 이사 후보를 주총 당일 발표해서도 안된다. 사전에 공시하여 소액주주들의 적부심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전체 이사의 절반 이상을 사외이사로 선임해야 한다. 특수관계인은 사외이사가 될 수 없다. 이사회가 지배주주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하기 위한 장치임은 물론이다.

이사회 내에는 감사위원회를 따로 설치해야 할뿐더러 감사위는 사외이사가 3분의 2 이상을 차지해야만 한다. 외부감사인은 적어도 3년마다 새로운 회계사로 교체해야 한다.

지배주주와 유착관계가 설정되기 전에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구조 하에서 지배주주가 경영성과에 대한 책임만 져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찰 수가 있겠는가.

그동안 관행이나 미덕처럼 인정되어온 내부거래가 유죄로 단정된지는 오래되었다.

그룹의 계열사간 거래나 친인척간 거래협조는 거의 집안일이었다. 어려운 계열사를 도와주거나 친인척을 보살펴 주는 것은 미덕으로 여겨졌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떡값을 건네는 행위도 사실상 보편적인 관행이었다. 적은 비용을 들여 큰이익을 얻어내는 일종의 경제행위로 인식해 왔었다. 그렇지만 모조리 불공정행위이자 불법행위로 분류된 지 오래 되었다.

기업주는 회사 돈이 내 돈이라고 굳게 믿고 마음대로 꺼내 썼다. 기밀비로 썼거나 대여금으로 썼거나 기업내부에서 시비를 걸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벌써 안된다는 상황이 확정되었다. 오랫동안 누적되고 굳어진 인식과 관행이 유죄로 분류된 것이 기업주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환경임은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세월이 변했다는 사실을 아무리 거역하려 해도 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쩌겠는가.

대정부 불신감도 위기 요인

그 동안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사고영역에서 군림하던 입장에서 경영위기라는 말은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긴박한 상황전개는 크게 보면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이니 적응하는 것이 최선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하에서 정부주도는 더욱 강화되고 자율보다는 강제가 더욱 심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역시 현실이다.

무모한 과욕과 무책임을 청산하기 위해 퇴출과 빅딜과 워크아웃으로 기업가치를 회생시키겠다는 취지야 옳지 않은가.

기업주의 입장보다는 기업이 사는 길과 죽는 길이 국가적으로는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가망 없는 기업은 빨리 망하고 회생할 수 있는 기업은 적극 도와주겠다는 방침이 그것이다.

그러니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 집안 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관행들을 없던 일로 각오할 수밖에 없다.

경영권 비상이라는 말에 위기의식을 공감하지만 죽기로 각오하고 기업회생에 모든 것을 바치는 각오를 보일 필요가 있다.

소문과 평판이 그토록 무섭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과거에의 미련이나 집착을 금방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부에 대해서는 할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기업개혁이 결코 사회적 압력이나 외부의 입김의 영향을 받아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추진되기 어렵다.

재벌개혁이 단순 해체로 끝난다면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 있다. 오랫동안 경제성장의 주축으로 역할하던 재벌의 구조개혁이 어떤 방식의 기업형태로 구상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공정거래법에서 제한적인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할 방침이라지만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이다. 경제력 집중을 완화시킨다는 원론에는 이의가 없지만 거대한 기업군을 해체시킨 다음의 정책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개혁이 마무리되고 나서도 시장원리나 투명성 보장은 정부가 강제할 것인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목표도 깊이 생각해 봤는지 돌아봐야 한다.

외국인기업이 투자하고 이익이 보장되는 나라가 목표인가, 아니면 국내기업이 시장원리에 쫓아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목표인가.

물론 국적과 상관없이 똑같은 조건으로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나라를 목표할 것으로 믿는다. 그렇지만 아직 개혁이 미완성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재계가 불안에 떨고 있는 입장을 엿보면 심상치 않은 것 같다.

정부는 기업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며 개혁하고 독려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판단이다.

사진캡션 : IMF직후 30대 그룹 관계자들이 전경련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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