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호]

재벌 총수를 개혁한다

시장압력에 의한 관치개혁인가

인적청산 앞선 문책제도화인가

글 / 裵秉烋 대표편집위원

군림하던 황제에서 발가 벗겨져

집안내 퇴진 사재출연 압박 받아

재벌 총수에 대한 개혁이 시작된 상황이다.

황제라던 분들이 갑자기 초라해진 느낌이다. 투명성과 책임성 앞에 총수들의 지위가 어디까지 떨어질지는 알 수 없다. 과거 정권에서도 검찰에 불려가고 교도소를 다녀온 경우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 줄는지 궁금하다.

잠시 강제퇴진을 뜻하는 인적청산론이 나오다가 잠복했지만 재벌 개혁이 재벌총수 개혁으로 바뀐 것은 아닌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재벌총수를 포장하고 있던 권위는 거의 벗겨졌다. 세칭 사회적 압력이라며 제기되어 왔던 재벌총수를 겨냥한 개혁론은 거의 제도화 되고 있다. 관계법 개정과 세무조사 등으로 총수와 관련된 혐의가 속속 공표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미 재벌총수들은 IMF로 단죄된바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개혁 5대원칙에 합의한 것이 일종의 문책성격이었다. 이에 따라 종래 선단사령관이던 총수가 전투지휘관 격으로 격하되었다.

그룹의 종합조정실이 폐지되고 구조조정본부로 간판을 바꾼 것이나 총수 자신이 주력기업이사로 등기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군림만 하지 말고 직접 경영도 하고 책임도 져야한다는 개혁이었다.

또한 부채비율 2백%이내 축소와 그룹간 사업교환(빅딜)도 이때의 합의 사항이었다. 올 상반기까지 5대재벌의 부채비율이 목표이상으로 축소된 것이 바로 5대 원칙의 결과였다.

재계로서는 성의를 다한다는 자세를 보이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 투자실패와 경영실패라는 새로운 죄목이 추가되었다. 얼굴을 숨기고 법적 지위도 갖지 않으면서 투자와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태를 문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사실상의 이사”라는 신상법상의 개념이 이 때문에 법제화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 경우 총수는 사재를 출연해서라도 거의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가 부상했다.

재벌총수들은 IMF기간 중에 교묘히 내부지분율을 더욱 높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계열 금융사를 사금고처럼 이용하고 비상장회사 주식을 증여하면서 세금도 제대로 물지 않고 경영권을 세습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재벌개혁은 사실상 총수개혁으로 번지게 된 느낌이다.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을 비롯하여 기업의 지배구조개선과 제2금융권 경영지배구조 개선 등이 모두 총수와 직접 관련된다. 그리고 주가조작사건 수사와 편법 상속 증여 협의에 대한 세무조사 그리고 재산가와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세무검증 방침도 역시 초점이 재벌총수이다.

이 때문에 잠시 거론되다 덮어진 재벌해체와 부실책임에 의한 인적청산으로까지 확대되지 않느냐는 우려가 나올만 하게 되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부인해 왔다. 그룹해체가 아니고 개별기업 단위로 강한 기업이 목표이며 시장에 의한 개혁일 뿐 관치개혁일수는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갑자기 황제로 군림했다는 재벌그룹내부가 우스운 꼴로 바뀌었다. 총수는 변칙상속과 세금을 탈루한 혐의자이고 그 아래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중산층 육성 대책에 의해 세제상 혜택을 받는 계층으로 구분되고 말았다. 그러니 집안 내 입장이나 표정이 서로 못마땅하고 불편하지는 않을런지 알 수 없다.

청와대 간담회서 신분변화 합의

재계는 신경영 패러다임 선언

지난달 25일 청와대서 있은 정·재계 간담회가 재벌총수의 신분변화를 확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자리에는 해체설이 나돌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도 참석했었다. 이 자리에서 예상했던 대로 김대중 대통령의 재벌개혁 원칙이 다시한번 공표되었다. 역시 대통령은 8·15경축사에 나타났듯 종래의 재벌 경영방식을 시장이 수용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나서 간담회 합의 7개항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르면 기존의 개혁 5대원칙 외에 새로운 개혁과제가 추가되었다.

구체적으로 5대원칙 개혁은 연말까지 마무리 짓고 그동안 사회적 압력에 의해 제기된 과제들은 재벌들이 상호협력을 통해 개혁키로 했다.

기업의 지배구조개선을 비롯하여 제2금융권의 경영지배구조 개선, 순환출자의 억제, 부당 내부거래의 차단, 변칙적인 상속과 증여의 방지 등이 골자이다. 이같은 합의사항은 대체로 기존의 재벌경영 방식을 거의 뜯어고친다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간담회에 참석한 재벌총수들은 자신의 지배력과 경영권을 제한하는 방침에 동의하고 합의했다는 형식이다. 이들 합의사항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상호협력해야 한다는 점도 합의 사항으로 묶었다.

이날 간담회에서 대통령은 법과 제도개선에 의한 개혁을 강조했다. 그리고 소유구조를 직접규제해서는 안된다는 방침을 밝혔다. 제 2금융권의 소유구조를 바꿔 재벌소유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으로 믿어진다.

제 2금융권은 소유구조 아닌 경영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방침이 완화되었다.

또한 7개항 실천과 관련 재계가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했을 때 이해 당사자인 전경련측과 적극 협력토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재계가 스스로 합의한 사항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기업의 지배구조개선안에 대해서는 선진국에서도 제도화되지 않은 지나친 수준이라고 반발한다. 또한 순환출자의 억제를 위한 출자총액 제한제도의 부활방침에 대해서도 외국인 기업과 역차별일 뿐더러 기업투자의 손발을 묶는 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재계는 청와대 합의사항의 실천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자세를 보였다. 일부 재벌은 신경영 패러다임을 서둘러 발표했다.

그룹의 통합식 경영을 법인이나 이사회 중심으로 바꾸고 수평적 기업확장은 선택과 집중으로 바꾸며 규모의 경제는 우량성과 경쟁우위로 지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외형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재벌내부는 비상이다. 재벌개혁이 어디까지이고 정부가 어떤 모형의 대주주지위를 구상하고 있는지를 의심한다.

물론 상황논리에 따른 불안감일 것이다. 정부는 거듭하여 재벌해체도 아니고 소유규제도 아니며 오직 개별기업 중심으로 거듭나게 개혁할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관리개혁이 아닌 시장에 의한 새로운 원칙에 따른 합의개혁이라고 설명한다.

8·15 개혁기준 따른 후속조치

재산가 중과세, 중서민층 보호

지금에 와서 보면 김 대통령의 8·15 경축사가 개혁 드라이브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청와대의 간담회 합의사항이나 정부의 후속조치는 이의 실천이었다.

8·15 경축사의 요지는 재벌은 개혁대상이고 중산층은 조기에 복원시켜야 할 계층이며 서민층은 정책보호계층이라는 구분이었다. 평소에도 생각할 수 있는 구분이었지만 막상 개혁드라이브 잣대로 보면 강력한 통치의지라는 해석이다. 실제로 정부의 후속조치들은 대통령의 개혁기준을 철저하게 반영했다.

먼저 소득분배개선을 위한 세법개정안에 잘 나타났다. 금융소득종합과세의 부활을 비롯하여 상속·증여세의 과세강화, 대주주 주식거래의 양도세 강화, 경영권이 포함된 주식의 경우 할증율 인상 그리고 공익법인을 통한 계열사의 지배방지등이 정부안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평소에도 강조되었지만 세금없는 부의 세습방지에 역점을 둔 재벌총수 개혁을 위한 세제로 볼 수 있다. 그동안 이에 대한 사회적 고발이 있었을 뿐만아니라 삼성과 SK그룹 등의 사례까지 적시되어 왔던 사항이다.

그리고 곧이어 재벌총수의 지위와도 관련되는 기업의 지배구조개선안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르면 재벌총수들은 황제직위에서 평민주주로 내려앉게 되어있다.

이사회의 구성과 역할에서부터 총수의 독단과 전횡은 엄격히 통제된다. 지금껏 총수의 지배력을 뒷받침해 주던 인사권도 많이 위축된다.

이사선임도 세칭 자기사람을 마음대로 앉힐 수 없고 후보추천위원회를 거쳐야 하며 이사의 50%이상은 사외이사로 구성토록 법제화된다.

게다가 이사회도 자주 개최해야 하고 녹취록도 작성해야 한다. 또한 사외이사가 중심이 된 내부 감사위원회의 감시도 받아야만 한다.

이에 반해 중산층을 위해서는 특소세를 폐지하고 주거안정대책과 임대사업 활성화 방안이 나왔다. 그리고 서민생활 안정을 위해서는 다양한 내용의 생산복지대책이 발표되었고 농어민을 위해서는 연대보증해소 지원책이 나왔다.

이렇게 비교하면 재벌 총수들이 누리던 좋은 세월은 가고 투명성과 책임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소액주주나 비출자 사외이사에 의해 지배받는 세월이 올런지도 모른다. 그러니 재벌 개혁이 총수에 대한 개혁으로 번지고 있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재계가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개혁이 너무 형평성만 강조하여 부자를 압박하여 중산층과 서민층을 보호하려 한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지적한다.

세금없는 부의 대물림을 규제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상속증여세 조세시효를 평생으로 연장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가. 너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구분하여 계층별 갈등을 조장시키는 정책은 아닐까.

사외이사를 50%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도 좋지만 선진국에도 없는 법제화는 지나치지 않는가. 또한 사외이사에게 회사의 기밀정보에의 접근권을 보장하고 소액주주에게 회계장부 열람권을 허용하는 것도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뿐만 아니라 지주회사제가 허용되지 않고 있는 시점에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부활하면 기업의 투자의욕은 어찌될 것인가. 한도초과 출자분의 해소를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텐데 그만한 유예기관은 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같은 반론 때문에 공청회가 열렸지만 역시 결론은 총수의 소유와 지배구조 개혁이 재벌개혁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공정위 금감위 이어 국세청도 참여

마무리 시한 쫓겨 전방위 관치개혁

개혁의 시한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모든 공권력을 동시에 투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재벌개혁이 이토록 어려울 줄 몰랐다고 실토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갈길은 바쁜데 개혁이 늦어지니 정부가 나서 결국 관치개혁이라고들 부르게 되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IMF체제 초기부터 금융을 통한 재벌개혁의 중심이었다. 금융기관 퇴출작업과 부실재벌 해체작업이 금감위 소관사항이다. 지금은 대우그룹 워크아웃과 대한생명에 대한 공적자금투입에 의한 경영정상화 작업이 현안업무이다.

그리고 금융산업구조 개편과 관련해서는 서울은행과 HSBC(홍콩상하이은행)와의 매각협상을 포기하고 공적자금을 추가로 투입하여 경영정상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금감위는 부실기업 정리과정을 통해 외래형 기법을 많이 도입했다. 빅딜과 워크아웃이 대표적이다. 빅딜에서는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통합을 성사시켰고 대형 워크아웃에서는 대우그룹 12개 계열사를 채권단 주도하에 진행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부당 내부거래를 엄격히 규제하고 그룹경영방식에 의해 부실한 계열사를 지원하는 고리를 차단하는 개혁을 주도한다.

이미 두 차례에 걸친 부당 내부거래 조사에서 5조5천억원의 지원사례를 적발, 무려 9백13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3차조사에서는 8조원의 지원사레를 적발, 엄청난 과징금 부과를 예고하고 있다.

8·15 경축사 이후에는 순환출자를 규제하기 위해 출자총액 제한제의 부활을 들고나와 재계를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 공정위다. 지주회사 설립허용 여부도 공정위 소관이다. 그래서 재계는 공정위를 경제검찰이라 부를 만큼 두려워한다.

출자총액 제한제는 한도설정문제와 한도초과분에 대한 유예기간 문제 등 재계와 협의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기에 앞으로 공정위와 전경련이 충분히 논의할 기회가 있다. 그렇지만 출자총액 제한에 앞서 내년부터는 결합재무제표가 의무화되기 때문에 공정위에 의한 재벌개혁은 돌아오기 어려운 강을 건넌 셈이다.

검찰은 수사권을 행사하는 기관이니 고발 받은 사안을 중심으로 재벌을 개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현대증권 주가조작사건 수사에서 보듯 검찰이 거듭 태어나겠다는 자세로 철저하게 파헤치려는 데서 재계가 긴장한다. 최근에는 기존의 금감위와 공정위에 이어 국세청이 재산가와 사회지도층에 대한 세무검증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에 적극 참여했다.

안정남(安正男) 국세청장이 제2의 개청을 선언한 직후 발표한 세무검증 방침은 강력하게 비쳐졌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씨에게 상속한 과정을 전산으로 분석중이라는 발표나 지난 6월에 착수한 보광그룹과 한진그룹에 대한 세무조사의 연장방침이 많은 사실을 시사했다.

만약 탈세혐의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는 곧 재벌총수에 대한 사법처리까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전용면적 90평이상 고급아파트를 분양받은 1천2백명에 대해서도 자금출처를 조사하고 지방에 있는 재산가에 대해서도 재산형성 과정을 조사중이라고 공개했다.

국세청이 재벌개혁 중에 세무조사를 공개한 것은 특이한 경우로 해석된다. 세무조사 사실을 확인하고 취재해도 부인해 온 것이 관행이었기에 말이다. 그동안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세칭 탈법축재를 고발한 적이 있었지만 국세청이 공개조사한다고 발표한 의미는 다각도로 해석되고 있는 실정이다.

주가조작사건 그룹개입 여부 관심

대우 김 회장 신분보장은 수시변동

현대증권 주가조작 사건은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국내 최대재벌이 주가조작에 참여한 사실이 검찰수사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재벌의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서는 시중여론이 여러 갈래이다. 현정부 들어서 현대그룹이 특별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곧이어 주가조작 혐의도 적당히 봐주지 않느냐는 예측도 있었다.

그러다가 검찰발표가 있은 후 개혁도 실증이 날지경이라는 여론이 있었고, 재벌개혁을 압박하는 카드가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었다. 가장 민감한 관심은 그룹차원의 주가조작이냐 또는 정주영 명예회장 일가의 조직적인 개입이냐의 여부였다.

대체로 현대그룹이나 정 명예회장 일가가 개입한 것은 아니고,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이 자신의 인맥을 동원한 업적과시용 행위로 결론이 지어지는 추세이다.

검찰발표에 따르면 현대증권이 그룹계열사 자금 2천2백억원을 동원하여 현대전자 주식값을 두배이상으로 끌어 올려 수천억원의 평가익을 획득했다는 내용이다.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수법으로는 종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대량매수 주문을 내는 방식에서부터 허수 대량 매수 주문, 상호 통정매매 등 지금까지 알려진 조작방식을 고루 이용했다.

그리고 무려 2백25개 가차명 계좌를 동원하는 조직적인 시세조종 행위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측의 해명은 검찰수사와는 다르다.

우선 인위적으로 현대전자의 주가를 조작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한다. 현대전자 주식은 계열사 지분이 80%인데 주가를 올려놓으면 계열사나 대주주가 유상증자의 부담만 안게 될 것인데 왜 조작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계열사가 전자주식을 매입한 것은 일종의 투자이며 현대전자로서는 주가관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명한다. 또한 계열사가 주식을 매입했다고 해도 시세차익에 의한 이익실현이 없을뿐더러 투자자에게도 전혀 손실피해가 없었는데 무슨 말이냐고 항변한다.

이 사건은 앞으로의 검찰수사와 재판을 통해 진실이 가려지겠지만 현재까지는 재벌오너가 아닌 전문 최고경영진의 책임으로 다뤄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행여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연관시켜 삼성재벌은 국세청, 현대재벌은 검찰이 각각 손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시중의 소문도 있었지만 정부로서도 다소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까 관측된다. 정부는 어디까지나 금감위의 고발을 받아 검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하는 사건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사안이 전혀 별개이지만 대우그룹은 결국 워크아웃을 통해 분해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워크아웃이 순조로울리 없다. 은행과 투신사간의 채무분담 조정이 쉽지 않고 워크아웃에 참여하지 않은 해외채무단의 지급보증도 난항이다.

이 때문에 계열사 분리작업이나 자산의 해외매각도 쉽지 않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계열사들의 생산중단과 협력회사의 부도사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금감위는 이미 지난 8월말 채권단을 통해 계열사간의 자금지원을 차단시키는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대우증권은 채권단이 공동인수하여 오랫동안 증권계의 대부로 통하던 김창희 사장을 퇴임시켰다. 그렇다면 김우중(金宇中) 회장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관심이다.

공식적으로 김 회장은 금년말까지 대우자동차의 경영 정상화를 책임지는 경영권을 행사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같은 신분보장도 수시로 변동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룹내부에서도 김 회장의 퇴진론이 나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김 회장의 은익재산마저 환수해야 한다는 강경론도 들린다. 김 회장을 퇴진시키는 대신에 채권단도 부실대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과감한 출자전환으로 계열사들을 회생시켜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계열사나 자산의 해외매각을 추진하기보다 출자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이런저런 정세변화를 종합하면 현대그룹은 모르겠지만 대우그룹의 경우 역시 총수에 대한 개혁이 초점으로 부상되고 있다는 소감이다.

법적 절차 지키지 않은 행정행위

금감위·최순영 회장간 법정 공방

대한생명 부실처리 과정이 이상하게 꼬여지고 있다.

경영권 수호에 집착하는 옥중의 최순영(崔淳泳) 회장과 공적자금 투입에 시각을 다투는 금감위간의 법정공방이 한창이다.

부실금융기관 지정과 감자명령처분 등의 행정행위에 대한 법적심판이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위법"으로 판정됐기 때문이다. 사안이 중대하고 시급하더라도 법적인 절차를 지켰어야 옳았다는 판정이 최근의 개혁 드라이브에 중대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판결의 의미와 영향이 비단 대한생명의 경우에만 한정되겠느냐는 관측 때문이다.

대한생명 정리문제가 부각된 과정부터가 특이했다. IMF체제이후 금융권 구조조정이 추진되면서 대한생명 문제가 제기되고 최순영 회장 관련 비리문제도 거론된바 있었다.

그러나 외자유치에 의한 경영정상화가 시급하다는 논리에 따라 최 회장 주도하에 메트라이프생명과의 합작과 외자유치에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다. 외자유치에는 정부의 지급보증이 전제되었지만 정부가 보증해 줄 상황이 못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올해들어 최순영 회장이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되고 정부주도하에 3차례의 매각입찰이 있었지만 실패했다.

이 무렵 세칭 최순영 리스트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란이 있었고 그 뒤, 고급옷 로비사건이 터지고 국회청문회까지 열렸던 사건이다. 그래서 대한생명을 둘러싼 지금까지의 법정공방이 대주주의 부도덕 행위에다 정치적 사건까지 겹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게했다. 그리고 정부주도하의 매각 입찰에서도 LG그룹이나 한화그룹이 인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논란도 있었다.

정부가 입찰에 참여토록 권유했었다는 말도 있었고, 들러리도 세우려 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진상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과정에 미국의 파나콤이라는 불확실한 투자자가 등장하여 여러 측면의 억측을 자아내게 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다.

그러다가 지난달 최 회장측이 제소한 본안소송 판결에서 법적절차를 지키지 않은 행정행위를 위법으로 규정함으로써 앞으로 상당한 법정공방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법원의 판결요지는 중요한 결정이나 처분에 있어 사전통지 및 의견제출 기회를 부여해야 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으니 위법이라는 사실이다. 행정 절차법상 당사자에게 의무를 부과하거나 권익을 제한하는 처분을 할 경우에는 미리 소명기회를 줘야하지 않느냐는 것이 법원의 해석이다.

금감위는 공공의 안전복리를 위해 긴급한 처분을 할 수 있는 예외사유에 해당된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인정할만한 자료가 없다고 반박했다. 또한 금감위는 행정처분을 취소할 경우 더 많은 공적자금을 투입해야하거나 금융위기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이 들어주지 않았다.

법원은 "실체적 적법성을 갖춘 처분이라도 절차적 적법성이 결여되면 위법한 처분"이라 판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금감위가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한 후 감자명령과 공적자금투입을 통해 국영화 한 후 경영정상화와 매각절차를 밟기로 한 정리 방침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옥중의 최순영 회장측은 대주주의 지위를 회복. 자신의 책임하에 독자적인 정상화를 모색하는 경영권 수호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물론 금감위의 입장도 후퇴하기란 어렵다는 관측이다. 절차상 하자가 있었다면 다시 법적 절차를 거쳐 공적자금 투입에 의한 경영정상화 수순을 밟겠다는 방침이다.

반면에 최 회장측은 파나콤사가 아니면 제3의 투자자를 유치해서라도 경영권을 회복하겠다는 법정투쟁에 상당한 시간을 확보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잠복한 개혁전문가그룹 목소리

총수퇴진론으로 번질 가능성도

재벌총수의 퇴진이나 인적청산이라는 말이 더 이상 공개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개혁주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김대중대통령도 재벌개혁의 의지를 거듭 밝히면서도 시장상황을 언급했을뿐 총수들에게는 자율적인 개혁의 협조를 당부 했었다.

역시 개혁에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기준이 되고 정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재확인 된 셈이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재벌총수들이 최고의 불안감에 젖어 있음은 숨길 수 없다. 전경련을 중심으로 의견을 모아 정부에 진정하고 있는 재계의 목소리가 총수의 신변안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자총액한도 제한이나 이사회 구성과 운영방식등이 모두 총수의 손발을 묶는 개혁규제이다.

그래서 공정위가 출자총액한도를 순자산의 25% 이내로 확정하고 한도초과분을 3년내에 해소토록 강제하자 즉각 반발했다. 현실적으로 무리하다고 주장했다. 무리하다는 주장에는 그룹식으로 경영하던 계열사들을 일시에 분리시켜 떼어내라는 방침에 불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지주회사제도가 허용되지 않고 있는 시점에서 출자한도 초과를 해소한다는 것은 그룹해체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계가 출자한도를 순자산의 40%까지는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변칙적인 상속 증여를 방지하기 위한 세법개정안도 재벌총수에게는 치명적이다. 최고세율을 높이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비상장 주식양도 차익에 대한 과세나 공익법인의 운영 투명성 제고등이 모두 총수를 겨냥한 개정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최근에는 시민단체 뿐만아니라 회사내에서 마저 총수를 압박하는 목소리가 쉽게 나온다.

사재출연이라던가 은익재산 환수라는 말도 나오고 총수가 구속된 재벌에서는 경영권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성명서도 나왔다.

이 밖에도 재벌총수들이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로는 얼굴없는 개혁전문가들로 믿어진다.

한때 전문가그룹에서는 대통령에게 재벌총수와의 면담을 중단토록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총수의 전횡적 지배구조를 깨끗이 청산시키고 부실재벌 총수들의 퇴진을 촉진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그 뒤에도 총수들을 면담함으로써 개혁전문가그룹의 건의도 가려서 정책에 반영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구체적으로 대통령은 5대재벌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 정재계 간담회를 갖고 뒤이어 30대그룹 총수도 초청한 바 있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재벌총수를 직접 개혁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마도 시장압력에 의해 개혁의 속도를 내기위해 정부가 주도하는 재벌개혁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러나 재벌총수들은 잠복하고 있는 개혁전문가그룹의 주장이 소멸되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잠복하거나 유보되어 있을뿐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언제 어떤 형식으로 또다시 총수들에 대한 퇴진압력이 표면화할는지 조마조마한 심정일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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