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호]

1977. 12. 22에 있었던 일

수출 100억$를 다시 생각한다

땀과 신념의 우직한 합창

한국인이 세계무대에 데뷔한 1977년 12월 22일을 잊을 수가 없다.

온나라가 숨을 죽이고 긴장했던 이날 하오 4시 수출이 1백억달러를 돌파했었다. 까마득해 보이던 수출입국 고지를 점령한 이 시각이후 한국인의 지위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1백억달러 목표는 근대화의 목표이자 번영의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밑천도 없고 실력도 모자랐다. 그래서 무시 당하고 핀잔 받으며 거의 육탄으로 밀어붙여 성공했다.

오직 땀이 원료이고 신념이 행동배경이었다. 당시 수출제일주의는 우리 모두의 생활이자 삶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백억달러 목표는 가당치 않았다.

아시아에선 일본이 유일하게 백억달러를 넘어 섰지만 한일간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일본이 달성했다고 한국이 도전할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되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때마침 백억달러 목표가 설정된 후 세계적인 오일쇼크가 불어 닥쳤다. 그러니 어느모로보다 한국의 백억달러 목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련스럽게 밀어 붙였다.

육탄으로 공격하고 점령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오일파워의 기세를 꺽고 자원내셔날이즘의 횡포에 맞서 이룩해 냈기 때문이다.

감격적이고 역사적인 날에 진치가 없을 수는 없다. 이날 장충체육관에서 있은 1백억달러 달성 기념식은 성대했다.

유공자들에게는 금빛 찬란한 훈표창이 수여되고 거리에는 풍악이 울려 퍼졌다.

"백억불 찬가가 퍼져라. 마음껏 즐거워라.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남은 것 전부를 바치리라"

이렇게 노래 부르고 춤추며 특별 보너스로 받고 금지됐던 쌀막걸리도 마시며 온나라가 축복을 누렸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욕망과 집념은 위대하다는 소감이다. 물불 가리지 않고 땀과 신념의 우직한 합창이 한국인을 세계국민으로 끌어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당초 목표보다 3년이나 앞당겨 달성했으니 순수 우리 밑천과 우리 방식에 의한 위대한 성공을 우리 스스로 평가하지 않고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1인당 274$의 총화수출

과거 기록을 찾아 백억불의 명세를 살펴보자.

연간 수출증가율 42.4%에 수출시장 1백 33개국 수출품목 1천 2백개가 주요 내역이다.

그리고 세계시장에서 한국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영점이하에서 1%로 올라섰다. 이때문에 당장 제 2의 일본이 탄생했다는 평가가 나올만도 했다.

실제로 세일즈전선에서는 소리가 났었다. 5대주 6대양을 헤매고 다닐때 우리 나라 세일즈맨들은 불청객이었다. 낯설고 물 다른곳, 이방인에게 인심 사나운 곳 가리지 않고 뛰어 다닐때 분명 제 2의 일본인으로 비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국민이 신앙처럼 숭배했던 수출제일주의는 신발과 와이셔츠 따위로 다보탑을 쌓아 올린 셈이었다. 국민 1인당 2백 74달러, 하루 1백 37달러라는 기록이 말해주듯 국민적 총화가 밀어준 탑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백억불 상품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오징어와 해태로부터 개척된 수출상품이 가발과 합판을 거쳐 겨우 중화학제품으로 확대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총수출이 1억달러를 넘어선 1964년이래 백억달러에 이르기까지 최고상의 수상기록을 보면 전상품의 수출상품화라는 당시 정책구호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다. 섬유류에서 선박까지 수출한다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잡화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산업의 수출산업화, 전세계의 수출시장화와 함께 전품목의 수출상품화라는 정책구호가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품을 수출로 내보냈던 것이다.

단일상사의 수출실적으로 보면 이 해에 6억달러 기록이 수립되었다. 역대 최고상은 66년 천우사의 1천 95만달러로부터 68년 한진상사의 2천 6백만달러, 70년 동명목재의 3천백만달러, 72년 연합물산의 5천 8백만달러에서 73년에야 한일합섬이 1억 9백만달러로 사상 첫 1억달러 탑을 수상했다.

뒤이어 75년에는 삼성물산 2억 2천만달러, 76년 현대조선 3억 7천만달러로 기록을 경신하다가 드디어 77년에는 현대조선이 6억 2천 6백만달러로 신기록을 경신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의 수출상품은 승용차와 유조선도 포함되었지만 온갖 이색상품이 망라되었다. 가령 고사리와 무우말랭이이며 은행잎과 이끼류 그리고 수세미와 이쑤시개 등 없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수출기사를 취재할 때면 좀더 특이한 상품, 소액상품을 찾아 수소문하고 감동적인 화재를 발굴하려 애썼던 일이 기억난다.

당시 일본의 종합무역상사들은 라면에서 미사일까지 수출한다고 자랑했었다. 이에비해 우리는 넝마에서 유조선까지 수출한다고 응수할 수 있었다. 실제로 걸레류도 수출하고 낚시밥도 수출했으니 품목수에 있어 일본에 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궁색하고 고달픈 수출이었지만 아시아에선 두번째로 1백억달러 수출대국이 되었다는 사실이 만만치 않았다. 당장 세계가 무관심했던 한국을 인식하게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일본이 아시아에서 탄생했다고 수군거리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1백억달러의 극비계획

우리 나라 총수출이 겨우 16억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1972년에 백억달러 계획이 수립되었다.

때는 총력수출이 매년 목표를 초과 달성하던 시기였다. 수출독려회의 석상에서 목표달성이 어렵다는 보고가 통하지 않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무모한 과욕이라는 지적이 일반적이었다. 바로 이듬해에 오일쇼크가 폭발하자 역시 한국인의 과욕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게 돼있었다.

그렇지만 수출만능의 집념은 이미 국책으로 후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중에 목표수정을 진정할 사람도 없었고 호락호락 들어줄 지도자도 없었다.

왜냐하면 박정희라는 수출총사령관 아래 물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낙선이라는 돌격대장이 진두지휘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백억달러 계획은 극비사항으로 분류되어 극히 제한된 인사만이 알수 있었다. 무모하다는 평가가 두렵고 경쟁국의 사전 견제를 방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백억달러 특별작업반은 상공부를 떠나 중학동에 있던 무역진흥공사 사무실에서 숨어 비밀을 유지했다. 당시 작업반에 참여했던 이들도 너무 막연하고 얼토당토 않는 지시였다고 회고한다. 도무지 맞출수 없는 67년도 일본이 백억달러를 달성한 지표를 모델로 백억달러 계획을 만들어 내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억지로 뜯어 맞춘 방식은 이러했다.

일본이 25억달러 수출을 달성한 56년에다 아직 실행되지도 않은 한국의 73년을 동일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이 백억달러를 달성한 67년에다 한국의 80년을 갖다 붙여 거기에 필요한 경제지표를 맞춰 내는식이었다.

그렇지만 뜯어 맞추기가 어려웠다.

1인당 GNP는 일본이 56년에 3백달러를 넘어섰지만 우리는 73년 목표를 3백 30달러로 잡고 있는 형편이었다. 또한 일본은 69년에 벌써 GNP 1천달러가 넘고 80년에는 무려 7천달러를 목표하고 있는데 우리는 80년도 목표가 고작 8백 43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지표도 너무나 격차가 벌어져 어떻게 맞출지 해답이 나올수 없었다.

무역회사의 해외지사가 일본은 71년 2천 6백여개인데 비해 우리는 4백 80개에 지나지 않았다.

총인구수에서부터 제조업의 생산설비, 산업기술 물가와 환율 등 수출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여건도 비교가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지엄한 독촉때문에 엘리트공무원과 학계전문가가 억지로 만들어 낸 백억달러 계획이 발표되고 말았다.

주요국의 25억달러 및 1백억달러 수출과 경제환경이라는 이름의 보고서였다. 부제에는 1백억달러 수출을 위한 우리의 반성이라는 행동지침이 붙었다.

결론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상공부는 이 엄청난 계획을 보물단지처럼 감춰두다가 73년 1월 박대통령 초도순시를 맞아 의기양양하게 공표했다. 그리고 박대통령은 즉석에서 70년대 최우선 정책과제라고 선언했다.

이로부터 수출은 모든것에 우선하는 애국행위로 인식되고 상대적으로 내수산업은 죄악시되는 산업정책이 확립되었다. 이결과 수출산업에 대한 금융과 세제지원으로 시설근대화가 이뤄지고 수출절차 간소화 등으로 백억달러 목표를 조기달성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출만능의 값진 교훈

수출이 우리 나라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수출제일주의가 채택되기 이전 1962년까지의 경제성장율은 연평균 4.4%에 불과했었다.

그뒤 16년간은 연평균 9.7%씩 성장했다는 사실로서 수출과 경제성장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산업연관효과 분석에 따르면 성장에 대한 수출의 기여도는 70년 38.4%, 75년 48.9%로 높아졌으며 백억달러를 이룩한 77년에는 50%를 넘어섰다.

또한 GNP에서 수출입이 찾이하는 비중도 62년 23%이던 것이 76년에는 무려 77%를 넘어서 나라경제가 완전히 무역에 의존하게 되었다. 반면에 국제시장의 변동여하에 따라서는 우리경제가 대항할 만한 독자적인 능력이 문제시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렇다고 무역의존도를 줄일수 있는 다른 성장정책이 마련 될 수도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수출실적이 크게 늘어 났지만 무역수지 적자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단지 수출이 백억달러를 넘어서면서 적자규모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던 점은 긍정적이었다.

무역수지적자는 62년 3억 6천만달러에서 70년 11억 4천만달러, 오일쇼크를 겪은 74년 23억 9천만달러로 폭증했었다. 그러다가 76년 6억 6천만달러 77년 4억달러 수준으로 대폭 감소되어 백억달러 수출의 경제적 의미를 더욱 빛내 주었다.

이같은 수출 백억달러는 전국민의 합심과 열창으로 이룩되었음은 물론이지만 특별히 공적을 평가할 수 있는 계층이 해외로 나간 세일즈맨이었다.

당시 무역상사 수는 2천 3백개 해외지사수는 1천 4백개사로 늘어나 북미와 동남아는 물론이고 중남미와 아프리카에도 지사가 진출하기 시작했다. 해외지사 요원들은 바이어 명단을 성전처럼 여기고 매일같이 찾아 다니는 세일즈로 휴일이 없었다.

그리고 별도로 방문 세일즈맨단이 각국을 순방하고 전시회에 참가하여 전세계 장터에 메이드인 코리아가 퍼져 나갈수 있었다.

여기에는 당시 75개 해외무역관을 운영하고 있던 무역진흥공사(KOTRA) 요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큰 역활을 했다. 해외무역관이라고 하지만 1인 무역관이 37개소, 2인 무역관이 22개소에 달했다. 그러니까 고작 한두사람이 아프리카와 남미지역 벽촌과 오지까지 찾아다니며 세일즈하는 눈물겨운 열성을 보였다는 뜻이다.

1인 무역관은 부인과 남편이 함께 뛰니 결국 2인 무역관이요, 2인 무역관은 4인 무역관처럼 뛰었다. 살림집과 사무실이 따로 있은 것도 아니요, 부부가 생활하는 곳에 침실과 부엌이 있고 샘플전시실도 겸하고 있었다.

그러니 국가번영의 분수령으로 평가되는 백억달러 수출을 되돌아 볼때 그들의 노고를 특별히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냐고 여겨진다.

과로에 쓰러진 유공자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할때 70년대 수출 스타기업들이 수없이 사라졌음을 발견한다.

천우사와 동명목재 등은 아예 이름도 없어지고 주식회사 삼화와 국제상사등도 명맥이 남아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가발과 합판을 많이 수출했던 회사들, 섬유류와 신발수출로 한국산을 세계에 퍼지게 했던 회사들도 수없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수출에만 너무 몰두하다가 새로운 성장기회를 놓치고 탈락했을 것이다. 아울러 기업창업자들도 과로로 일찍 쓰러진 경우가 많았다고 믿는다.

당시 수출제일주의 전선에서 밤낮없이 독전하던 상공부 관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공부장관 이낙선씨를 비롯하여 심의환, 박필수, 노진식, 유각종씨 등은 벌써 고인이 되었다. 당시 상역국장 정민길씨는 외국대사를 거쳐 은퇴했다는 소식이고 통상정책과장 임인택씨 수출진흥과장 신국환씨, 사무관 유호민씨 등은 아직도 다른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하나 백억달러 기관차를 발진시킨 전투력의 원천이던 청와대 수출확대회의는 무역확대회의로 개편되어 명백만은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확대회의는 62년 12월 내각수반 직속 회의로 시작되어 3년뒤 아예 대통령이 주재하는 가장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추진기구 역활을 다했었다. 당시 최고 사령관 박정희는 고인이 되고 브리핑 잘하던 이와 어려운 질문에 답변 잘하던 이들도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가고 없더라도 만족중흥의 전기를 마련해준 수출 백억달러 역사의 교훈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는 심정으로 그들의 값진 희생과 충정을 회고하고 싶은 것이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