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호]

정부의 구조조정 과욕 위험

개혁의 정치화도 경계할 일

글 / 權和燮(권화섭) 편집위원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전방위 재벌개혁의 충격

“지금 재벌문제라는 것은 경제사회 전체와 관련된 구조적 문제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재벌문제는 범주적(範疇的)으로 입법을 통해 처리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현실은 그렇지 않고 개별적인 대상에 대해 국세청과 검찰이라는 행정수단을 동원해서 선별적으로 타격을 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한다. 이것은 염려스런 일이다.”(노재봉 전국무총리, 경향신문 99년10월8일)

정부가 추진해온 기업구조조정과 경제개혁은 우리경제의 생존전략이다. 누구도 여기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문제가 재벌그룹들의 탈세와 비리 척결문제와 맞물리면서 우리경제에 심한 긴장과 갈등을 조성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기업구조조정의 핵심이 재벌개혁인데 그것이 범주적, 제도적 방식이 아니라 공권력을 앞세운 강압적 분위기속에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정책이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성과지향적이어서 기업들은 확신과 열의를 가지고 구조조정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설정한 요건을 억지로 맞추는데 허겁지겁이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는 현 정부의 경제개혁을 재벌해체로 규정하면서 “재벌그룹을 빼고 나면 한국경제가 없어진다”라는 극단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말이 심히 과장된 것이고 또 독단적인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의 비판이 상당한 진실을 담고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한 신문의 네티즌 여론조사에서 절대다수(73.54%)의 응답자들이 오마에의 말에 공감을 표시한 것이 그 반영이다.(매일경제신문 99년 8월14일)

그의 비판이 과장되고 독단적인데 어째서 이처럼 폭넓은 여론의 공감대에 호소력을 가지는가? 그것은 정부의 경제개혁정책, 특히 재벌정책이 목적과 방법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하버드경영대학이 발행하는 권위있는 경영잡지인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한 논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타룬 칸나교수와 크리스나 팔레푸 교수가 함께 쓴 이 글은 서구 금융전문가들이 개도국들의 대기업집단 구조조정 방안으로 자산매각과 거대조직 해체를 통한 부채감축과 효율성 강화를 주문하고 있지만 이것은 “시장제도가 짧은 시간내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논리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교수는 또한 경제의 소프트 인프라가 미비된 상태에서 “개도국 재벌그룹들은 시장체제의 공백을 채워주고 있으며 부적절한 시기에 재벌그룹을 해체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99년7-8월호)

하버드 비즈니스의 충고

그렇다면 우리정부의 기업구조조정 정책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칸나 교수 등이 지적하듯이 그동안 우리 정부의 정책은 철저히 서방 전문가들의 논리에 입각해 재벌개혁을 중심으로 기업구조조정작업을 수행해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첫째 개혁대상의 혼동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한국 재벌그룹들이 정부의 개혁압박과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것은 단순히 덩치가 비대하고 문어발처럼 여러 업종에 다각화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총수 전횡의 경영폐습과 불법·탈법 수단을 이용한 상속, 경영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경영권 세습, 회사공금의 유용과 여타 탈법행위가 한국재벌을 지탄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재벌그룹의 그러한 경영행태를 뜯어고치기 위해 한국재벌의 존재양식 그 자체를 몽땅 허물어버리려 하고 있다. 바로 칸나교수 등이 제기한 오류의 가능성이 제기되는 국면이다.

지금 선진국 기업들은 인수합병(M&A)을 통한 몸집 불리기와 시장선점 경쟁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에 비하면 한국재벌의 덩치는 왜소하기 그지없다. 글로벌 시대에 기업의 규모와 문어발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 악덕도 아니고 무조건 개혁해야할 대상도 아니다.

정부의 기업구조조정 정책에서 두 번째 오류는 장·단기 정책조합의 혼동이다. 한국기업들, 특히 재벌그룹의 소유지배구조를 바꾸고 경영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장기과제이다. 또한 정부는 재벌개혁의 모든 과정을 끝까지 책임지려해서는 안된다.

정부는 구조개혁의 기본방향과 원칙을 담은 관련법과 제도의 개혁을 서둘러 완결한 후 그 구체적인 실천은 시장과 기업자율에 맡기는 것이 옳다. 그런데 정부는 주요 입법사항을 미결로 남겨둔채 고도의 관치금융 수법을 동원하여 기업구조조정과정에 지나치게 깊숙히 개입하고 있다.

정부의 기업구조조정 정책에서 세 번째 오류는 관료적 오만과 독선이다. 오늘날 한국재벌의 부실구조와 잘못된 경영행태는 그 절반 이상이 정치와 관료의 책임이다. 한국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법과 규정을 지키고 금융감독을 제대로 했다면 한국기업의 부실구조와 경영폐습이 이처럼 흉물스런 모양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신문 컬럼이 “정부개혁, 사법개혁, 정치개혁이 전제되지 않는 한 한국의 발전은 지체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기업개혁만으론 안된다, 매일경제신문 99년 9월27일)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을 미결상태로 남겨둔 채 재벌개혁만을 다그치는 것은 관료적 오만과 독선이 아닐 수 없다.

정부의 기업구조조정 정책에서 네 번째 오류는 경쟁력 개념의 착오이다. 기업의 소유지배구조와 경영형태에서 특정 모델이 절대적으로 경쟁력이 있거나 비경쟁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기업경영의 소프트웨어인 경영자의 능력과 열정이지 그 하드웨어인 경영조직이나 경영기법이 아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고 기업의 조직형태만 바꾸면 경쟁력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극단적인 제도지상주의이다.

글로벌 경제시대에 우리기업의 조직구조와 제반 경영관행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게끔 고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신발에 발을 맞추듯이 우리의 경제현실과 경영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소유지배구조와 경영방식의 강요는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구조조정 이후의 불확실성

정부의 기업구조조정 정책에서 다섯 번째 오류는 개혁 이후에 관한 불확실성이다. 정부의 재벌개혁이 재벌해체이고 그것이 한국경제의 해체라는 오마에의 비판은 근거없는 험담일 수 있다. 그러나 재벌을 개혁(혹은 해체)하고 나면 그 자리에 건실한 중소기업과 첨단기술의 벤처기업이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도 순진한 희망적인 기대에 그칠 수 있다.

정부의 기업구조조정과 재벌정책은 그 당위성에 관한 한 개혁대상인 재벌그룹들조차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손병두 전경련부회장이 한 신문 인터뷰에서 거듭 시인하듯이 한국재벌의 현재 조직구조와 경영행태는 마땅히 개혁되어야 하지만 정부는 그 기본 원칙과 우선순위만 결정하고 구체적인 이행방법과 절차 및 속도는 최대한 재계의 자율적 책임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서울경제신문 99년 10월4일)

정부는 재벌개혁의 시급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IMF와의 약속사항이며 세계가 그 이행여부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97년말 외환지급불능(디폴트)의 위험속에 황급히 체결한 IMF와의 구제금융 협약에서 우리는 재정금융긴축과 함께 기업구조조정과 경영회계 투명성, 부실금융기관 정리를 분명히 약속했다. 또한 이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지적한 다섯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재벌개혁을 서둘려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IMF와의 약속은 우리경제의 안정과 성장력 회복을 위한 것이다. 무조건 재벌개혁을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재벌개혁을 하되 그것이 한국경제의 장기적 번영과 한국민의 복지를 증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점에서 정부는 오마에 겐이치의 비판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정부주도의 재벌개혁이 대외종속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경제개혁의 정치화

이른바 DJ노믹스의 주요 브레인의 한 사람인 산업연구원 이 선(李 火先) 원장은 이러한 비판에 답하면서 “신재벌정책을 단순히 경쟁력 차원의 논리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궁색하지 않을 수 없으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정책기조에서 찾는 것이 옳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 정책기조는 “인본적 자유주의”에 입각하고 있고, 그것은 다시 “질서자유주의와 휴머니즘에 입각한 공동체원리”를 바탕으로 성립한다고 강조했다.(신재벌정책의 경제논리, 서울경제신문 99년 8월30일)

그에 따르면 질서자유주의란 시장의 경쟁질서가 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공동체 원리는 자율성과 책임감을 가진 시민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념이며 제도개혁을 이룰 수 있는 문화적·정치적 기반이라고 한다. 그의 이러한 설명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비록 빈말일지라도 정부는 거듭하여 시장경제 논리와 기업자율에 입각하여 경제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다짐해왔으나 이 방식으로는 정책목표의 달성에 한계를 느낀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이것은 어째서인가? 그 이유는 정부의 기업구조조정이 경제개혁의 범주를 넘어 정치·사회개혁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헌정 반세기에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재벌을 개혁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8.15 경축사에서 다짐했다. 한국경제에서 재벌그룹은 과거 정권들의 관치경제와 부정부패의 상징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현 정부의 신재벌정책은 과거 정권과의 차별화와 앞으로 수행해야 할 정치개혁, 사회개혁의 선행과제로서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띠고있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가 기업구조조정의 기본원칙으로 설정한 8대 과제는 경쟁력 논리만을 가지고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다. 이중에서 정부가 기업의 경영투명성을 보장하는 방안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외이사제 확대와 감사위원회 신설 등은 정부가 법으로 강제해야 할만큼 지선(至善)의 경영해법이 아니다. 정부는 한국재벌의 오너체제를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글로벌 경쟁체제에서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에는 미국의 모토롤라와 독일의 머크그룹을 비롯해 오너체제로 초일류 대열에 올라있는 기업들의 사례가 무수히 있다. (21세기 승자의 길: 경영체제가 성패 좌우 않는다, 매일경제신문 99년 8월30일)

또한 기업경영지배구조에는 절대적 모범기준이 있을 수 없으며 각자의 경영환경에서 최대의 이익을 낼 수 있는 경영체제가 최선이다. 한국재벌은 한국경제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부채비율 200%의 파장

둘째 정부는 기업재무구조 건실화를 위해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해소와 부채비율 축소를 요구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정책이 될 수 있다.

이 정책은 근본적으로 기업의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만들어 부도 가능성을 줄이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이 정책은 우리 기업들을 심각한 자금압박에 몰아넣고 심지어 연말까지 부채비율 2백% 이하를 지키지 못할 경우 멀쩡한 기업을 부실기업으로 만들어 국내외 영업에 중대한 타격을 미치는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다.

최근 IMF 서울사무소장에서 인도네시아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 존 도즈워스가 이임 직전 한 신문 인터뷰에서 “부채비율 감축은 목표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무엇인가 신축성을 둬야하며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에도 ‘시장에 의한 규율’에 맡겨야지 정부가 규율을 주도해서는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셋째 계열사간 순환출자-부당내부거래 억제와 업종전문화는 경영학적 논리나 기업 현실에서 그 타당성이 확실히 입증된 정책수단이 아니다. 이 개념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현실적으로 순환출자와 내부거래의 성립 그 자체를 부정한다.

그리고 설사 한국기업들이 순환출자 방식으로 분별없이 무리한 기업확장을 할지라도 이것은 정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 시장경쟁을 통해 그 타당성이 검증되도록 내버려 둬야한다는 것이 비판자들의 지적이다.

업종전문화의 경우에도 기업이 전문화를 통해 성장할지, 다각화를 통해 성장할지는 어디까지나 개별개업의 역량과 기업경영 여건에 비추어 선택할 문제라고 비판자들은 말한다. 정부는 다각화, 즉 문어발식 경영을 기업부실화 원인으로 간주한다.

한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기업부도율에 있어서는 다각화 기업보다는 전문화 기업의 경우가 월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이다.(경제위기와 재벌도산, 연세대 이제민·어순선 교수) 결국 정부가 이러한 정책수단을 재벌개혁에 동원하고 있는 것은 단기간에 가시적인 개혁성과를 거두려는 과욕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넷째 재벌오너의 사재출연 등 실패한 경영자에 대한 책임추궁 강화와 변칙상속 차단은 책임경영 의식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렇지만 IMF 사태로 한참 위축되어 있는 국내 기업인들의 투자의욕과 기업가적 의식이 그로인해 한층 더 침체해질 위험에 대해서도 정부당국자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정부가 재벌그룹의 탈세와 불공정행위 등을 적발하고 처벌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이를 가지고 경제개혁의 성과로 과시하려는 생각을 한다면 큰 잘못이다. 그러한 탈세와 부당행위는 정부의 정상적 규제와 감독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정책실패의 증거는 될지언정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으로 경제 자체가 흔들리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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