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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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시절 사람과 삶]

집념, 결단, 돌파의 세월

경부 고속도로 개통

빈곤, 침략과 싸우며 근대화 길 뚫어

洪昌一(홍창일) 씨 사진기록온갖 반대 속 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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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197077, 경부고속도로 428조국 근대화의 길’, ‘국토통일의 길이란 이름으로 개통되었다.2011-01-12_152327.jpg

처음 달려본 고속도로는 신통했다. 서울과 부산간이 1일 생활권으로 좁혀졌다. 부산 생선과 시골 야채가 새벽을 달려 서울로 올라오고 수도권의 수출화물이 당일로 부산항에 닿으니 실로 전국이 하루 생활권이 됐다. 지금 생각하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첫 고속도로 개통이었다. 그러나 나라살림 규모가 요즘 대기업의 운영비만도 못한 빈약한 시절에 428에 터널 뚫고 다리 놓고 아스팔트로 포장한 대역사는 기적이었다.

어느 누구도 가능하다고 동의하지 않았고 빈곤한 나라재정에 비해 당장 필요하다고 찬성하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면 집념과 오기의 결단이자 억지돌파의 난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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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이 현장에 살며 독려

때는 죽기살기로 덤벼야 했던 시절이다. 빈곤과 싸우고 공산당 침략과 맞서 싸워야 했던 절박한 시절이었다.

국토건설 현장으로 뛰어 다니며 사진 기록을 남긴 홍창일(洪昌一) 씨는 이제사 그때의 피로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60?70년대를 살아온 세대가 피로를 느낄 틈도 갖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당시 건설부 소속이던 홍 씨는 전국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토건설 현장을 낱낱이 기록해야만 했다. 무거운 사진 장비를 휴대하고 장관 일정에 한 발 앞서 현장으로 달려가 있어야만 했다.

한창 길을 뚫기 시작한 시절, 어디로 가건 평탄한 길이 없었다. 먼지 길, 자갈 길이 아니면 갓 불도저로 뚫은 공사용 길이었다. 전용차가 준비되어 있을 턱이 없다. 지방 관공서에 배치된 새마을 지프차를 얻어 타고 현장을 물어가며 찾아갔다.

규칙과 시간엄수에 철저한 당시 이한림(李翰林) 건설부 장관은 경부고속도로 공사현장 확인에도 규칙이 있었다. 토요일은 으례히 도시락을 차에 싣고 현장에서 보냈다. 현장 사무실을 방문하고 감독관을 격려하고 건설회사 책임자에게 당부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홍 씨는 장관의 동정을 무비 카메라에 담고 난공사 현장을 기록하는데만 바빴다. 식사 때라고 한가로이 담소하거나 마음놓고 휴식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야간에도 횃불공사가 있었으니 사진 촬영에도 밤낮 구분이 없었다. 게다가 생생한 현장 모습을 KBS 9시 밤 뉴스에 올리자면 서둘러 상경해야만 한다.

청와대에서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9시 뉴스를 보고 경부고속도로 공사 진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주무부처 장관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현장을 샅샅이 확인해야만 했던 정경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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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식 돌관에 군 공병단 헌신

홍 씨의 사진 기록에는 현대건설 정주영(鄭周永) 회장의 현장 모습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때부터 정 회장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쌓여 정주영식근면정신을 갖게 됐노라고 한다.

홍 씨는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가운데 최고의 난공사이던 당재터널 현장을 떠올린다. 옥천 현장사무소에서 침식하며 돌관공사를 지휘하던 정회장이 서울서 내려온 임원으로부터 중요 보고를 받고 구두 결재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금강대교 공사 때는 장마비가 쏟아지면 가교가 떠내려가 다시 재시공 하는 경우도 잦았다. 낙동대교 공사도 난공사였지만 모래 속에 교각을 심는 신공법이 신기하게 비쳤다고 한다.

홍 씨는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유명 건설회사 사람들이 모두 피땀을 쏟았지만 육군 공병단의 헌신적 지원을 잊을 수 없노라고 밝힌다. 당시 민간 회사들의 장비와 기술이 빈약하던 시절 공병단의 장비지원과 공사감독이 큰 몫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공사 현장을 취재할 때도 얼굴이 새까맣게 타서 민간인지 군인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야전모의 대위나 소령 계급장을 보고 공병단 장교임을 알 수 있었다.

홍 씨는 1968, 양재동에서의 기공식 사진을 보여주며 도열해 놓은 막강한 중장비가 모두 공병대 지원이었다고 지적한다. 또 기공식 이후 구간별 공기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군 작전처럼 엄격히 준수한 것도 공병 장교들의 지도와 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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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정부는 결단과

돌파정부

1960년대 국토가 헐벗고 있을 때 고속도로 건설이란 무리이고 과욕이었다. 건설 재원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우리기술과 장비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그렇지만 5·16 정부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집념과 결단과 돌파의 정부였다.

배고픈 국민이 쌀밥을 먹게되고 북의 침략으로부터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건설해야 하고 경제를 건설하자면 국토의 대동맥을 뚫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박대통령은 같은 분단국 처지이면서 짧은 기간에 부강한 나라를 만든 서독을 동경했다. 1964년의 서독 방문은 라인강의 기적을 확인할 목적이기도 했지만 경제건설을 위한 종자돈으로 급전(急錢)을 빌리러 갔었다.

서독에서 아우토반을 달려본 박대통령은 고속도로가 조국 근대화의 길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에르하르트 수상의 권고가 박대통령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자유가 승리하는 길은 경제적 승리 뿐이오. 분단국의 통일도 나라가 부강하는 길 뿐이오.”

이 말에 흥분되어 경부고속도로가 구상되고 야당과 언론과 국제기구 등이 반대하는 사면초가 속에서 공사가 강행되었다.

당시 자동차도 없는 나라에 고속도로가 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장기영(張基榮) 경제부총리와 경제기획원 당국도 반대하는 입장을 숨기지 않았다.

어느모로 보나 경부고속도로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무리였다. 그러나 혁명가의 삶을 택한 박대통령은 안되면 되게 하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전 행정부처의 예산을 일괄 5%씩 깎아 주무부인 건설부를 지원토록 조치했다. 서독방문 이후 박 대통령의 고속도로 건설 집념을 말릴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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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총리 교체 후 강행

박 대통령은 우선 국가 재원을 총동원해서라도 고속도로를 뚫는 것이 조국 근대화의 불길을 당기게 된다고 확신했다. 반대 여론이 들끓는 분위기 속에 196711월 당정간에 고속도로 건설 방침을 확정시키고 말았다. 이때까지도 재원 조달을 서둘러야 할 경제기획원은 거의 뒷짐만 쥐고 안될 일이라고만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건설부가 주관하던 공사 추진을 위원장 국무총리, 부위원장 경제부총리에 각부 장관 등을 위원으로 구성한 경부고속도로건설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보다 앞서 장기영 부총리를 박충훈(朴忠勳) 부총리로 교체하고 건설부 장관에는 고속도로 건설 타당성 논리를 펴고있던 주원(朱源) 박사를 임명했다. 이 같은 전격 개각은 정부 내의 고속도로 건설 반대논리를 잠재우는 의미가 있었다.

이로부터 박대통령의 설계와 감독과 독려는 24시간 휴식이 없었다. 이어 1969년 김학렬(金鶴列) 부총리가 취임하여 불같은 성미로 밀어붙이자 냉담하던 경제기획원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사 현장에는 구간마다 횃불공사가 벌어지고 공기단축 만큼 근로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당근이 주어지기도 했다.

가장 싼 공사비로 최단시일 완공

197077일 서둘러 개통한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은 감격이었다. 대통령은 이 길을 조국 근대화와 국토통일의 길이라고 선언했다.

1970128일에는 구름도 쉬어 넘는 추풍령 고개위에 준공 기념탑과 공사중 희생된 77위 산업전사들의 위령탑이 제막되었다. 당시 이한림 건설부 장관은 준공 기념탑에 박정희 대통령의 영단과 지휘로 우리기술, 우리 손길로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이 길을 뚫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경부고속도로는 최단 기간에 가장 싼 공사비로 준공한 세계적 기록이었다. 당 평균 공사비 1억 원은 당시 세계평균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준공 개통 뒤 매년 엄청난 보수비용을 들인 것은 선개통, 후 보수라는 불가피한 정책선택이었다. 당시 야당에서는 어렵게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를 누워있는 와우 아파트라고 빈정거렸지만 이 길을 통해 수출입국이 펼쳐져 지금은 보다 훌륭하고 안전한 도로망이 전국을 48달로 연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작가 홍 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당시 건설부와 건설회사 역군들의 피와 땀을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모자랄 것이라는 소감을 밝히며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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