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월호]

[이용선의 돈이야기]

풍물로 엮는 조선商俗史(상속사)

화폐의 국권상실

동질동량은 말뿐, 일본 돈에 가산

제일은행 농간 종로상인 줄도산

/ 李鏞善 (이용선 고산옥포필임원장)

동질동량(同質同量)의 화폐법이란 엽전의 주권 상실이요 우리 돈의 국권 상실이나 다름없었다.

광무시대 대한제국에서 국비로 일본에 보낸 유학생이 1백여 명이었다. 그 뒤 국내 사정으로 학비를 받지 못해 70여 명이 조기 귀국하고 30여 명만이 남아 있었다.

나머지 30여 명도 공사관 부공사 박용화(朴鏞和)의 집에서 겨우 밥만 얻어먹는 신세였다. 박용화는 견디다 못해 모국에 학자금 보내 달라고 여러 번 전문을 띄워 18994월에야 여섯 달치 학자금 39백 원이 도착했었다. 그러나 송금 과정에 벌어진 일이 어이없었다.

동질동량같은 값이라 해놓고

일본 유학생 춘하 6삭조 학자금 39백억 원을 일본에 보내는데 대한 동전으로 일본지폐를 바꾼 즉 가계(加計)12667전이고 환가(換價)2346전이라 전폐 실수는 겨우 21587전이라.

대한 돈은 어찌 남의 돈만 못하여 저다지 흠축이 많이 나는지 화폐교정 못한 해가 철저히 드러나는구나.”

문제는 대한 돈과 일본 돈을 동질동량으로 모양과 단위를 똑같이 만들었다는 시기이다. 일본은 제일은행을 앞세워 우리 땅에서 똑같은 양목과 똑같은 단위로 만들어 유포시켜 경제지배를 시도하고 있었다.

일본 돈이 대한 돈과 틀리면 그만큼 유통이 어렵고 그만큼 일본 돈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원칙으로 양국 돈의 환율에 해당되는 가계(加計)란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우리 돈은 갑오경장 이후 신정화폐 장정에 근거하여 만들었으며 일본과 똑같은 은본위제 였으므로 다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대한제국이 은전은 안 만들고 일본 돈을 쓰게 하면서 백동전을 만들어 주전이익을 챙겼기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돈은 사실상 일본 제일은행이 발권력을 쥐고 흔드는 판국이라 가계(加計) 논리가 먹혀들고 있었다. 대한 돈은 일본 돈보다 가치가 40% 가량 떨어졌다고들 지적되었었다.

우리 재물이 일본 돈에 좌지우지 되네.”

왜 그런가.”

그야 일본 돈이 퍼지거나 줄면 일본 돈 값어치가 오르고 내리니 우리나라 재물도 절로 웃다가 우는 꼭두각시 놀음을 할 수밖에.”

재물은 나라의 보배요, 백성의 생명이라. 유서에도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먹는 것이란 다 재물로 조차 나오는 것이니.”

이 같은 재물원칙론에 따른 화폐권을 대한제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대한사람은 따라지 신세라

이미 세상은 대한 사람들의 재물은 일본 돈이 올리고 내리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지적되는 시기였다.

세계의 개명한 나라들은 각기 자기나라의 본위화와 보조화가 있어 매매하는데 조금도 구애함이 없거늘 대한에서는 어찌하야 지폐와 은전을 모두 타국 것으로 구차히 시행하고 대한에서는 다만 보조화만 제조하니 이는 제나라 백성의 명맥과 권리를 다 타국 사람에게 빌려 줌이라. 그렇다 보면 내나라 소산 물종의 값을 올린다던지 내린다던지 본국 사람들 임의로는 못하고 외국사람 하고 싶은 대로 할터인즉 본국사람은 진소위(眞所謂) 따라지 인생이라.”

실로 대한사람은 대한제국 시절 따라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 세계에 대하여는 자주 독립국으로서 내 나라 돈을 쓰지 못하고 타국 것을 차용하다가 오늘날 이 폐단이 생겨났으니 과연 가석하도다. 당연한 독립국으로 사체가 존중하거늘 정부는 어찌하야 내백성으로 하여금 이웃나라의 돈을 쓰게 하다가 필경은 이 지경이 되었는고.”

대한 사람들이 죽어라고 돈을 벌어봤자 헌돈을 벌었다.

이때가 1905년으로 우리나라 상권의 메카인 종로상전의 대상들이 파산을 시작했다.

당시 왕권경제의 상징이던 종로상전이 탕산(蕩産)으로 넘어지기 시작한 것은 곧 조선경제가 무너진다는 소리였다.

근일 한성내 신구화폐 교환에 관한 재정난으로 도산 탕산한 상민이 23명이라. 김영선(金榮先) 김상훈(金相熏) 한진성(韓鎭成) 김정우(金鼎禹) 고원신(高源臣) 박두영(朴斗榮) 박희남(朴喜楠) 연영수(延永壽) 한인수(韓仁洙) 안용식(安容植) 정규환(鄭奎煥) 박정식(朴定植) 최우현(崔禹鉉) 손응룡(孫應龍) 백인여(白仁汝) 윤상응(尹相應) 이화석(李和錫) 차덕현(車德鉉) 이덕기(李德基) 유태흥(柳泰興) 김상렬(金相烈) 박명옥(朴明玉) 김응종(金應鍾) .

이들 뿐만 아니라 장차 상공업자로 누굴 막론하고 탕산할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 없으려니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경제계에 일대 격렬한 위험을 면치 못하리라더라.”

종로 상인들 줄줄이 도산

소문대로 보름이 지나지 않아 대상으로 자본력을 과시해 오던 조윤중(趙允中) 전종원(全宗源) 송정인(宋亭仁) 10여 명이 다시 전황(錢荒)으로 쓰러졌다.

광교 일대 포목상으로 명성을 날리던 김영관(金永寬)도 도산했고 남대문 시장의 왕자로 경성 상업회의소 회두(會頭)이던 곽태현(郭泰鉉)도 도산한 후 빚쟁이를 피해 도망가고 말았다.

경성 상업회의소 회두가 도망가다니.”

“10만 원이나 빚을 지고 자취를 감추었다네.”

큰일이네, 이러다간 조선 상인은 죄다 죽겠네.”

그놈 메가다가 웬수야.”

대안동 네거리에서 제일 큰 포목상이던 김상훈도 문을 잠그고 도피했다. 그 여파로 빚을 준 한성은행의 기둥뿌리 마저 흔들리게 됐다.

공립 한성은행 좌총무 한상룡(韓相龍)이 경무청에 청원하되 본 은행 채무에 관하여 대안동 거주 포목상 김상훈에게 빌려 준 돈이 동화 4160516리라 매일 독촉했더니 엊그제 밤 도피하여 포목상 물품을 다 팔아 피해를 보상코자 해도.”

이렇게 경무청에다 재고 압류를 신청했지만 빚을 다 받을 수 있었겠는가.

상공회의소에서는 왕궁에다 상감마마라며 읍소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문고를 둥둥칠 일이 생겨났습니다.”

어서 말하라, 과인도 듣기 답답하구나.”

종로상전이 장사를 못한다는 것은 조선상업이 쓰러지는 것입니다. 돈을 융통해 주옵소서.”

.”

백동화를 모두 정리해 버리고 메가다가 새돈을 내놓지 않고 쥐고 있으니 어찌 하옵니까.”

메가다는 백동화 정리 뒤처리를 늦춘 까닭이 있었다. 친로파 세력을 처리하기 위해 친로파의 우두머리 격인 전환국장 이용익을 정치적으로 거세할 속셈이었다. 백동화 난리의 화살을 이용익에게 돌리려는 뜻이었다.

또한 전황(錢荒)이 일어 물가가 폭락할 때 일상들이 쥐고 있는 원화(圓貨)를 강세로 만들어 큰 이득을 얻자는 술책이기도 했다.

이놈아, 돈을 풀어라.”

정리사업이 다 끝나기 전에는 안 되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속담도 못 들었소.”

그러면 그 사이 다 죽으란 말이냐. 돈이 없지 않느냐.”

일본 돈과 조선돈은 다 같으니 너희도 일본 돈을 쓰라.”

일본 제일은행은 19025월부터 일본 돈 1원권을 유통시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 돈을 즐겨 사용하다가 무슨 탈이 없겠는가.

분노한 한성판윤 일본 돈 금지

190325일 한성판윤 장화식(張華植)이 분연히 일어나 일본 제일은행권 유통 금지령을 내렸다.

뭣이, 한성판윤 따위가 우리 일본 돈 유통을 금지시켜?.”

남의 나라 서울에서 일본 돈 유통은 허락할 수 없소.”

개항장이면 모를까 종로 바닥에서는 일본 돈을 공공연히 통용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였다. 그러자 일본공사 林權助가 왕실을 협박했다.

한성판윤 목을 자르든지, 우리 은행서 빌려간 50만 원을 갚든지 하시오.”

일본 제일은행 대출 50만 원은 징수할 조세를 담보로 빌린 돈이다. 이때 판윤 장화식의 유통 금지령은 겨우 8일만에 해제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일인 目賀田은 탁지부 재정고문 석 달만에 화폐조례를 발표했다. 이 조례에 따라 1905118일부터 우리 땅에서 공식으로 일본 돈의 유통이 공인되었다.

다시 131일부터는 일본 제일은행이 우리나라 국고(國庫) 취급 업무까지 맡았다.

제일은행이 50만 원을 빌려 줄 때 조선의 국고금은 이미 담보로 잡혔었다. 조세 수입을 담보로 잡은 것이 바로 국고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또 백동화 정리작업도 제일은행에 맡기고 국고 증권조례를 만들어 다시 제일은행으로부터 2백만 원을 차입했다.

이 일본 돈 3백만 원이 나중에 국채보상(國債補償) 운동으로 번졌다. 그 뒤 일본 흥업(興業)은행 으로부터 1천만 원의 차관을 빌려 쓰는 바람에 조선경제는 일본 돈의 올가미에 갇혀 버렸다.

종로 상인들은 일본 돈이 시장경제를 침식해 오자 제일은행권 배척운동을 벌였었다. 1903년 윤이병(尹履炳)등이 종로 상인들을 결속시켜 공제회를 만들어 이 운동을 전개했다.

백동화 정리로 종로상가가 철시하자 왕궁에서도 더 이상 모른 체할 도리가 없었다.

상감마마, 애기 낳는데 불수산(彿水散) 만큼이나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어서 3백만 원을 빌려 주옵소서.”

이 말에 고종은 궁내부 자금에서 3백만 원을 긴급 대하(貸下)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탁지부 고문 目貨田이 틀어 10분의 1만 내려 주도록 조정하고 말았다.

일인 재정고문이 국고장악

이 무렵 종로상권에서 일본 제일은행 지배인을 찾아가 사정하다가 멱살잡이까지 벌였다.

한성은행 부사장인 김종한(金宗漢)을 비롯하여 배동혁(裵東爀) 김정환(金鼎煥) 김승렬(金承烈) 박경삼(朴景三) 방창기(方昌基) 이근영(李根永) 이윤용(李潤庸) 등이 제일은행 지배인 大澤佳郞에게 통사정 했다.

당신들이 조선을 완전히 죽이면 누구를 상대로 돈을 벌어 가겠소라며 돈을 풀어 달라고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멱살을 잡는 싸움을 벌이고 물러나야만 했다.

고종의 ‘3백만 원 대하지시마저 30만 원으로 깎이자 탁지부가 상업회의소에 융자해 주는 방식으로 결말이 났다. 그런데 구제금융 격인 30만 원도 탁지부가 제일은행과 미쓰이물산에서 빌려 오는 형식이었다. 그렇지만 제일은행이 30만 원을 쉽게 내주지 않으려 했다.

탁지부에서 주라는 돈을 왜 얼른 안 주오.”

目貨田 고문의 허락이 아직 없소.”

이래서 종로 상인들은 세 번째로 일제히 문을 닫고 철시해야만 했다.

미쓰이물산과 제일은행이 재정고문의 명령이 무하다고 아직 미귀결(未歸結)한 고로 종로상에 전황이 극심하야 행화(行貨)할 기망(期望)이 무하기로 세부득이 작일부터 철쇄하였는데 그 전황이 참혹하더라.”

이러다가 겨우 대하전 30만 원이 상업회의소로 내려와 상인 대표의 공동 보증으로 여러 명에게 빌려 주었다.

당시 상인 대표로는 백주현(白周鉉) 조태호(趙泰鎬) 배동혁(裵東赫) 황종석(黃鍾錫) 이완식(李完植) 오긍연(吳肯然) 추혁조(秋爀祚) 장한명(張漢明) 김정환(金鼎煥) 김춘식(金春植) 등이었다.

한 가게에 융통된 금액은 최고 2천 원이었고 대부기간은 최장 6개월이었으며 석 달에 한 번씩 원금과 이자를 갚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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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로 엮는 조선 상속사를 집필해 주신

이용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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