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월호]

[지종학 기자의 문예계 이야기]

갑돌이와 갑순이

욕심 많은 민요의 여왕

김세레나, 새타령 이후 40

대 이을 후배 없어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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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池鍾學 (지종학 방송작가) : gcinet@kbs.co.kr

<김세레나>

본명 : 김희숙, 서울태생, 국악예고, 서라벌 예대 음악과,

1965년 동아방송 연말 신인가수 콘테스트가요 백일장장원,

발표곡 : ‘ 성주풀이’ ‘ 대어타령’ ‘ 사랑가800여 곡

동아방송 가요백일장의 장원

전통적인 우리 국악의 순수성을 해치고 있다’, ‘품위가 없다.

갓 데뷔시절 민요가수 김세레나를 향한 비난이 많았다.2011-01-12_161126.jpg

데뷔와 동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그녀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국악예고를 나와 탈선을 하고 있다는 비판도 곁들여졌다.

그러나 얼마 후 국악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감사패를 받았다. 세월의 변화라고 보기에는 씁쓸한 뒷맛을 준다.

민요가 우리 고유의 음()이며 가락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그 전통을 잇겠다고 시작한 민요가수 김세레나의 대중이 외면하는 대중문화는 문화가 아니잖느냐는 소신은 지금도 당당하다.

본명이 김희숙 인 그녀는 1965년 동아방송의 신인가수 콘테스트 프로인 가요 백일장에 출전해 연말 장원을 차지했다. ‘민요의 여왕이 탄생하는 순간인 동시에 처절할 정도로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이때 함께 출전했던 신인가수 지망생으로 장원 다음의 차상을 차지한 가수가 김부자 씨이다. 데뷔 동기생이 된 셈이다.

화려한 출발에 비해 일반적인 반응, 특히 가요계의 시선이 그렇게 곱지만은 않았다. 민요가수라는 특이함과 활달한 제스츄어를 괜히 견제하려는 질시 같은 분위기였다.

팝송 흉내시절 외로운 길 선택

폴 앵커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팝송이 한창 선풍을 일으킬 때였던 만큼 그들의 흉내를 내는 가수들은 높이 평가하면서 국악이나 민요를 부르면 마치 고집스런 이상한 취향의 별 볼일 없는 가수라고 취급하는 때였다. 철저한 사대주의의 극치를 보이던 때였다.

다른 가수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외로운 길을 혼자 지키며 외길을 걸어온 의지의 덕분인지 그만큼 꾸준한 인기를 얻어 온 가수도 없다.

가수 생활 40. 첫 앨범인 갑돌이와 갑순이’ ‘새타령이후 지금까지 발표한 노래는 70여 장의 앨범에 모두 8백여 곡이 수록되어 있다.

좋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민요가수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국악을 바탕으로 한 정통민요가수이면서도 트로트, 팝송, 그리고 고전무용에서부터 탭 댄스에 이르기까지 엔터테이너로서 갖춰야 하는 다양한 변화를 보여 줬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이제야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러나 대를 이을 후배가수가 없다는 사실이 마냥 안타깝다고 말한다. 아직도 민요가 어렵다는 일반적인 의식과 함께 진짜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독주에 만족하기보다는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고 대중적인 민요의 장래가 걱정스럽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웃 일본에서의 반응은 의외다. 계은숙, 김연자 씨 등과 함께 70년대 말부터 일본진출의 가교 역할을 해 온 그녀에게 보내는 일본 팬들의 관심은 항상 열광적이다. 전성기였던 83년도 일본에서 발표한 짚세기 신고 왔네는 애창곡 1순위를 차지하면서 한동안 일본 관광객 4?5백 명이 김세레나의 디너쇼를 관람하고 가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한·일 친선 문화교류회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서울에 가서 듣고 싶은 노래가 무엇이냐는 여론조사의 결과였다고 지금도 흐뭇해 한다.

스승 덕분에 바뀐 인생

화려하다 못해 요염하게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온 그녀에게서 어린 시절 누구보다도 어려웠던 불우한 환경을 겪었다고 예측하기란 무척 어렵다.

현재의 화려한 모습과는 동떨어진 사연이기 때문이다.

친아버지는 얼굴도 모른 채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고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고향인 서울에서 충남 논산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생활력이 약한 새로운 가장 아래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의 가난이 사춘기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릴 때부터 노래와 춤 등이 뛰어나 재질을 갖고 있었으나 이를 살릴 길은 없었다. 꿈 많은 여고시절 무작정 상경해 고모의 덕분으로 국악예술학교에 입학했다. 도시락조차 싸가지 못할 정도의 형편으로 거리를 헤매던 도중 우연하게 교장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어려운 형편 얘기를 들은 교장선생님은 주위 선생님들의 조언으로 예능재질이 가장 뛰어난 학생이라는 평가를 듣게 된다. 결국 교장선생님의 주선으로 무용 강습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게 되고 이를 통해 번 돈이 생활비의 전부임에도 논산에서 간신히 호구를 잇고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효성스러운 딸이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2학년 때 동아방송에 출전하게 된 것이 인연이 돼 18살의 여학생은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올랐다.

갑돌이와 갑순이를 시작으로 다양한 민요곡이 히트하면서 시골의 가족들은 일제히 서울로 몰려왔으며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계부가 임종할 때까지 효성을 다했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현재까지 변치 않는 생활의 기둥이 되면서 예대 음악과까지 졸업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 대문엔 효 실천 연합회가 수여한 효녀의 집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불우한 환경을 이겨가면서도 잊지 않고 실천해 온 효녀라는 또 다른 명예인 것이다. 지금도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모시고 있다.

그 후 그녀는 모교인 충남 논산의 강경여중에 충효탑을 건립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욕심만큼이나 화려한 40

우리의 대중가요계에선 그녀를 욕심 많은 민요의 여왕이라고 부른다.2011-01-12_161131.jpg

무대에의 욕심 때문이다. 80년도를 전후로 한 당시 가요계는 라는 형태의 공연무대가 전국의 일반극장에서 유행하던 시대였다.

지금의 콘서트 형식이다. 쇼 무대공연 주최 측이 마련하는 진행표에선 가장 인기 있는 가수가 나서는 마지막 순서에 자신이 선택되지 않으면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이 순서 때문에 당시 인기를 누리던 김추자 씨가 양보한 사건도 있었다.

무대욕심에 관한 한 막무가내다. 한 지방공연에선 역시 인기가 한창이던 펄시스터즈가 개인사정으로 무대에 나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시간을 메우겠다고 자청한 김세레나가 무대에 올라가 한숨도 쉬지 않고 19곡을 논스톱으로 부른 일화도 있다.

가수가 한꺼번에 이토록 많은 곡을 소화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같은 고집은 한때 동경가요제에서도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한국가요의 일본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80년대 한창시절 대만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텔레비전에 출연해 한국민요 붐을 일으킨 사례도 갖고 있다.

40년을 오직 한 길을 걸어온 김세레나. 그녀는 민요란 일반 가요처럼 단숨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지론을 갖고 있다. 오랜 수련이 필요하기 때문에 후배 가수가 나오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러나 어려운 수련을 거치면 그 후엔 어떤 노래도 소화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오늘도 그녀가 살고 있는 집 마루 벽엔 가수생활 40년 동안 갖가지 모습으로 촬영한 5백여 장의 얼굴사진을 한데 모은 대형사진이 걸려 있다.

틈틈이 시간을 내 직접 만든 자화상이다. 외로운 민요가수의 일생이라기보다는 대중가요사의 한 획을 긋게 한 민요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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