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월호]

청소년은 나라의 미래

공직 경륜을 청소년에게

李元宅(이원택) 총재, 남은 열정 후대 환원

개척과 도전의 끝없는 종횡무진

2011-01-12_162348.jpg 문화적 감성을 지닌 청소년 육성을 목표로 새로 발족한 청소년한마음연맹 이원택(李元宅) 총재는 오랫동안 다방면의 공직 경륜을 쌓은 적극적인 활동가이다. 이 총재는 사단법인 청소년여가선도지도협회 상임고문으로 청소년 사업에 참여했다가 한마음연맹으로 개편되면서 총재로 추대됐다.

마지막 봉사로 청소년 육성

이 총재는 청소년선도사업이 재정난으로 어려움에 봉착하자 사재를 털어 우면동 사무실을 확보하고 조직을 정비하여 각종 청소년사업의 활성화 책임을 맡았다.

한마음연맹은 2만여 회원과 산하 조직을 두고 있지만 겨우 상근 임직원 5명으로 어렵게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음연맹은 문광부와 서울시 지원사업 등을 연중 집행하고 있지만 재정난으로 자원봉사팀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 총재는 이번 조직개편을 계기로 조순 전 서울시장과 이상연 전 내무부 장관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이사진을 보강함으로써 청소년 사업의 기반을 확충하게 됐다고 밝힌다.

이 총재는 지난 40여 년간 화려하고 다채로운 경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청소년 선도사업 후원인들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총재는 오랜 공직을 마감하고 모처럼 한가한 생각을 갖게 되어 국가와 사회를 위한 마지막 봉사로 청소년 사업에 헌신키로 했다는 소감을 밝힌다.

한마음연맹 사무실 확보에서부터 긴급 운영자금까지 사재를 희사한 것은 나라의 장래를 위한 미래에의 투자라는 보람이라고 해석한다.

법대 출신의 종횡무진 인생

팔팔한 성격의 이 총재는 공부 잘하면서 운동권에 속한 열혈청년 출신이다. 자유당 정부시절 경북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서울법대에 들어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 양자로 간택된 이강석 씨 부정입학 반대 시위에 가담했다가 소집 영장을 받았으니 요즘 용어로는 운동권 학생이다.

학보병으로 군대 다녀오느라 법대생들의 예정 코스인 고시를 포기하고 2년 늦게 졸업하여 검찰 사무직 공채로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엔 법대 나와 고시도 못했느냐는 주위의 눈총도 있었지만 검찰 명수사관, 청와대 사정담당 특보관실 특명 감사관으로 명성을 날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격려 서신까지 받았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 총재는 화려한 검찰생활 끝에 다시 행정 서기관 전직시험을 거쳐 행정직으로 옮겨와 1977년 서울에 감사 담당관을 비롯하여 동작 구청장, 영등포 구청장, 강서 구청장, 서울시 교통국장, 공무원 교육원장, 상수도 사업본부장을 거쳐 93년 부시장까지 17년을 행정관료로 소신있게 일했다.

그 뒤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 상근 부회장으로 경제 5단체 부회장단 회의에 자주 얼굴을 내다가 중소기업 연구원장, 중소기업발전 민간협의회 위원장으로 경제계에서 활약했다.

다시 1997년부터는 서원대 경영학과 초빙교수로 학계에 진출하더니 98년에는 법무사 시험을 거쳐 법무 사무소에 출근하다 최근 한마음연맹 총재로 또 다른 길에 나서 마지막 봉사를 다짐하고 있다. 실로 인생을 적극적이고 도전적으로 살아온 노련한 청소년상이 아닐까.

공부 잘하고 운동권에도 참여한 팔팔한 성격의 종횡무진 인생이라 해야 할 것이다.

특명 감사관 시절의 긴장과 보람

이 총재는 엄격한 유교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회초리 맞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데모하다 학보병으로 끌려 갔다 나와 검찰 주사보가 됐으니 부모님 마음에는 차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첫 임지인 대구지검에서 부장검사로 있던 김성기 전 법무부 장관에게 평가되어 수사관의 길로 접어들고 뒤에 다시 김석휘 전 법무부 장관이 청와대 사정담당 비서관으로 들어가면서 감사관으로 추천되어 화려한 특명 감사관 경륜을 쌓을 수 있었다.

1973년 박 대통령은 공직자 부정비리를 뿌리뽑기 위해 사정담당 특별보좌관실을 신설했다. 초대 보좌관 홍종철 씨, 수사담당 김석휘 비서관 아래 특명 감사관으로 발탁됐으니 세칭 출세한 자리였다.

이때 이 총재는 무서울 것 없이 큰 사건을 명쾌히 수사했다고 회고한다. 당시는 경제 제일주의 시대라 경제사범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이 특별 관심을 보였기에 강력수사가 기본이었다. 그렇지만 워낙 거물들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피말리며 목숨 내놓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한다.

뒤에 행정직으로 옮겨 서울시에 근무할 때 박 대통령이 친필 격려와 함께 5백만 원이란 거금을 보내 주어 처음으로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총재는 공직을 마감하고 한마음연맹 총재로서 사재를 희사한 것도 뿌리를 캐면 이때 박 대통령의 격려금이 종자돈이 됐을 것이라며 박 대통령을 회상한다.

새로운 역할에의 중단 없는 탐구

팔팔한 성격이지만 이 총재는 소탈한 친화력이 있어 진로를 여러차례 바꿨지만 가는 곳마다 많은 이들과 소통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전직하여 민원을 많이 다뤘지만 설득과 호소로 무난히 처리했다. 서울시정이나 구청 행정에는 세칭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 이해가 상반되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오해받게 되고 뒷말이 따른다. 그렇지만 구청장으로 양쪽을 다독거리며 문제를 쉽게 풀어 해결사라는 별칭을 들었다.

서울시 교통국장 시절엔 88올림픽 교통대책이 급선무였다. 이때 부하 직원들과 함께 밤새워 아이디어를 짜고 각종 신수를 동원하여 질서 올림픽을 치루게 했다.

이 총재는 최근 서울시 대중교통체계의 핵심인 버스전용 차로제와 짝, 홀수제 등의 신수가 그때 창출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은 이때의 공적이 평가되어 두 번째 훈장인 홍조근정 훈장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이 총재는 공직을 물러나서도 덤덤하게 보낼 성품이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그의 특징이었다.

경제계와 학계를 거쳐 엉뚱한 청소년 분야로 옮겨 온 지금도 무엇인가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는 탐구력이 여전하다. 법무사로 일할 때 나이를 잊고 인터넷에 열중하고 영어공부 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청소년 사업가로 마지막 열정을 쏟기로 작심한 후 청소년문화 속으로 파고들기 위해 인터넷을 찾아 나섰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선진국 제도를 익히고 도입하자니 부족한 영어공부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한마음연맹 총재 취임 후 곧장 해외출장을 다녀온 것도 바로 청소년 사업가의 준비된 수순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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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작가로도 열정 발산

이 총재는 어느날 사진작가 홍창일(洪昌一) 씨와 함께 사진이야기 좀 합시다라고 제의했다.

공직 시절 홍씨와 대화하고 사진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사진이야기는 다소 엉뚱한 면이 있어 보인다.

스스로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임을 내세워 작가로 호칭해 달라는 주문이다. 올림픽 사진으로 전시회도 개최했었다는 경력을 강조하며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노라고 스스로 자랑하니 내막을 알 수 없다. 전문작가 홍씨의 말로는 보통 열정이 아니라고 일러 준다.

실제로 이 총재의 작품을 구경할 기회는 없었지만 열심히 사는 인생의 교범임을 부인할 도리가 없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그의 성품이 다양하고 화려한 인생을 쌓아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를 잊고 청소년 미래사업을 스스로 책임졌으니 퇴직한 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많은 경험세대들을 청소년 사업영역으로 유치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거리에 방황하는 청소년이 없어지고 공부 때문에 진로를 망치는 자녀가 없어질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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