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호]

法殺(법살)… 법적 괴롭힘

글 / 李度珩 (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고소 고발이 많은 나라

법살(法殺)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 멀쩡한 사람을 법의 이름을 빌어 합법적으로 죽인다는 뜻인 것 같다. 1980년인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범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K변호사가 이말을 쓴적이 있다. 그후 요즘에는 그전의 정치권력이 멀쩡한 사람을 법으로 옭아 죽였다 하여 다시금 「법살론」이 번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법적 괴롭힘(legal harrassment)」이라는 생소한 낱말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국제언론인협회(IPI)가 홍석현(洪錫炫) 중앙일보사장의 사법처리과정에 대하여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쓰인 말이다. 그것은 역시 법의 위력으로 멀쩡한 사람을 괴롭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법을 빌어 멀쩡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많은 모양이다. 오죽하면 얼마전 「근거없는 소송을 잇달아 제기하여 상대방에게 정신적 피해를 준 제소자」에게 법원이 위자료와 함께 손해배상 책임까지 물게 했을까.

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무고사범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97년에 인지된 무고사범은 3천5백82건인데 4천9백46명이 입건됐고 그중 3백92명이 구속되었다. 98년엔 3천9백16건 인지에 5천2백50명 입건, 3백72명이 구속됐고, 99년엔 9월 현재만 3천5백42건 인지, 4천9백87명이 입건되었으며 2백56명이 구속되었다고 한다.

억울한 사연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억울한 사연이 많으면 사회는 그만큼 미움과 불신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툭하면 고소 고발을 한다. 95년의 경우 피고소인수가 무려 47만1천7백62명에 이른다. 같은해 일본은 1만5백96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인구는 남한의 약3배나 되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인구 10만명당 피고소인수로는 한국이 1057.6명인데 비해 일본은 불과 8.5명이다. 한국이 일본에 비해 124배나 많은 송사(訟事)를 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더구나 무고로 인지되는 사례는 일본에는 극히 드믈어 통계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자존심 값이 비싼 나라

사적인 얘기가 될지 모르나 나와 내가 속해 있는 월간잡지「한국논단」이 계쟁(係爭)중에 있는 송사만도 8건이나 된다. 모두 피고소 피고발인데 그 대부분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또는 선거법위반 등이다.

여기는 법정이 아니므로 그 고소 고발들의 잘잘못을 가리자는게 아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존심 값이 다른나라에 비해서 매우 높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외국 같으면 마음놓고 비판할 수 있는 특정종교에 대한 비판, 공직자에 대한 비판을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비판은 커녕 관용화된 말조차도 쓰다보면 명예훼손이 되기 일수다. 예를 들면 오래전 어느 신문이 사설 부제에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을 썼다가 불교계의 거센 반발을 산 나머지 「불교에 대한 모독」이라며 발행인에게 사과와 해명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낸적이 있다.

그런데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은 그 뜻풀이가 국어사전에도 나와있을 정도로 우리가 자주 쓰는 생활상의 관용구이다. 그 말을 쓸 때 사람들은 ‘오랫동안 공들인 일이 허사가 됐다’는 뜻으로 쓰지, 결코 불교를 모독하려는 의지가 있다고는 우리의 상식과 통념으로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그말이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며, 고소·고발 일보직전까지 갈번 했다. 같은 의미에서 누가 만약 시각장애자라 하지않고 장님이라 한다든가, 신체장애자를 옛날말 그대로 병신이라 한다면 그는 당장 시각장애자나 신체장애자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고소 또는 고발될 것이다.

똑같이, 과거의 식모는 가정부라야하며, 간호원은 의사와 똑같은 간호사(看護師)라야 하고 운전수는 기사(技士)로 선비사자를 써야 되고 청소부, 구두닦이도 미화원(美化員), 미화원(美靴員)이라는 생소한 용어로 바꾸어 쓰지 않으면 해당자들은 「명예훼손」 또는 「인격모독」으로 생각하기 쉽다. 부(夫)는 원(員)이라야 격상되고 수(手)는 사(士)로, 또 원(員)은 사(師)로 해야 명예로와지고 인격과 자존심이 존중되는 것인가보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독 놈자(者)자로 자족하는(?) 직업이 있다. 기자(記者)가 그것인데 그걸 기사라고 한다면 운전기사와 혼동될까봐 그대로 놔두는지 모르겠다.

남이 알아줄 무형의 인격

아무튼 한국인만큼 자존심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것같다. 심지어는 스포츠 경기에까지 「자존심을 건 한판」이라고 신문 방송이 당당히 쓸 정도니까. 특히 일본과의 운동경기의 경우 자존심이라는 말이 곧잘 등장한다. 그러나 얼마전 그 잘난 자존심을 걸고 벌인 축구경기에서 한국은 일본에게 4대1과 1대0으로 두번다 지고 말았다. 그 자주 쓰는 자존심은 어디가서 찾을 것인가?

일본에서 프로축구가 생긴 것은 불과 10여년전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본축구에 대해 한국축구는 한수위인 것으로 대다수 한국인은 생각해왔다. 그러나 일본의 J리그가 생긴지 10여년밖에 안되는 일본축구팀은 4만8천개가 넘으며 각급축구경기마다 스탠드는 꽉꽉 찬다.

한국은 선수수효가 일본축구팀의 10분의 1밖에 안된다고 한다. 상대가 일본·중국이면 몰라도 그밖의 국내경기에는 관중이 모이지 않는다. 한국인은 축구를 사랑하면서 축구를 사랑할줄은 모른다고 어느 축구인이 말한적이 있다.

어디 축구뿐인가? 각급학교 학생들의 공부도 시험만 끝나면 더 할 생각 않으며, 물건(제품)도 잘 만들어서 고품격의 신용을 얻어 두고두고 박리다매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단번에 일확천금할 생각만을 한다. 꾸준하고 재미없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명예와 자존심에 대한 관심은 유별나다.

툭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걸핏하면 명예훼손이라며 고소 고발을 서슴지 않는다. 이건 뒤집어 보면 없는 자존심을 애써 있는척 하거나 훼손될만한 명예도 없는 주제에 명예를 유난히 내세우고 싶어 하는 강한 열등감의 한표출이 아닌가도 느껴진다.

꾸준하고 끈질긴 성실한 노력을 쌓아 큰일을 해내기보다 쉽게, 빨리 해서 남에게 돋보이는 전시효과만을 좋아하다 보니까 무너지는 성수대교와 갈아앉은 삼풍백화점이 생겨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자존심과 명예에 대한 욕구는 남달라 그것들을 획득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무슨무슨 상을 타려고 백방으로 애쓰는것도 그때문이다.

그래서 갖지도 않은 자존심이나 명예가 손상됐다며 고소 고발을 즐겨하는 한국인이 많은건 아닌가. 그러나 자존심이나 명예는 내세우는게 아니라 남이 알아주는 무형의 인격이다. 그것은 내세우려 하거나 구하면 구할수록 멀어지는 것이다. 하물며 고소 고발에서 승소했다해서 내곁으로 다가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자존심이나 명예는 스스로 내세우거나 구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끈질기고 거짓없이 성실한 노력의 축적만큼만 생기고 형성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결코 「법적 괴롭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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