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호]

‘햇볕’의 유래

글 / 盧癸源(노계원) 편집위원 (전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

대의명분과 속셈

자기의 진심을 남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자기의 진심을 알아주도록 하기 위해 그 이상의 과장이나 눈길을 끄는 포장으로 타인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그럴 경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오히려 곡해를 유발하여 일을 그르치는 수도 있다. 예컨대 한 남자가 어느 여자를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너무 추근대고 쫓아다니다 보면 여자는 남자의 정성과 사랑에 감동하기는커녕 오히려 뭔가 꿍꿍이속이 있지 않나 해서 의심하고, 치한으로 치부해버릴 염려도 없지 않은 것이다.

정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치권력의 행사가 반드시, 그리고 전적으로 완벽하게 국리민복과 국가발전만을 위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정권을 잡기 위한 당리당략이 배후에 도사릴 수도 있고, 정적이나 경쟁상대를 훼손시키기 위한 책략도 은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치가 내거는 슬로건은 대체로 대의명분을 표방함으로써 그러한 속셈은 아름답고 거룩하게 호도 되기 마련이다.

처음엔 순수한 우국충정으로 출발한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적 또는 특정 당파의 당리적 목적이라는 마각이 드러남으로써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사는 경우도 우리는 가까운 역사에서 숱하게 체험한 바 있다. 그런가하면 어떤 경우는 정반대로 그 목적과 본질이 근본적으로 순수한 충정에 바탕을 두고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는 오해와 반발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건 상대방의 비뚤어진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이 원인일 수도 있고, 표방하는 명분 즉, 슬로건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북풍과 태양을 다시 보라

최근의 사례로 ‘햇볕정책’의 경우를 들어보자. 이것은 국민의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새로운 대북 정책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압축해 내세운 정책슬로건이다. 남북한간에 지속돼온 적대적 대결을 지양하고, 방향 자체를 180도 선회하여 같은 겨레로서의 공존과 협력을 도모하고, 그런 관계가 발전하다 보면 어느 한쪽의 우열을 따질 필요도 없이 민족의 염원인 화합과 통일까지도 성취할 수 있다는 원대한 의지와 희망의 다짐이었던 것이다.

이 슬로건 아래 정부는 많은 식량과 물자를 북한에 보내주고, 대규모 발전시설을 건설중이며, 현대그룹과의 금강산 관광개발 등 합작사업을 추진하면서 북한의 상응한 호응과 화답을 기대해 왔다.

그러나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은 마음의 문을 열고 화답을 보내오기는 고사하고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실시하고, 간첩선을 침투시키는가 하면 서해의 남방한계선에서 무력침범을 감행하여 휴전선에서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등 ‘적대적’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남한의 햇볕정책이 화해와 협력을 가장하고 북한의 체제를 바꾸려는 북벌통일·반북한 정책’이라며 ‘북의 체제를 부인, 제거하려는 남측의 시도는 어느 때라도 불가피하게 전쟁과 갈등으로 이끌 것’이라는 등 위협적 언사를 서슴치않고 있다. 우리 국민으로서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옛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햇볕정책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라는 의견이 상당한 힘을 얻고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햇볕정책’이라는 슬로건 자체에 무슨 문제는 없는지를 챙겨보면서, 이 슬로건이 상대방에게 주는 이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 슬로건에서의 ‘햇볕’이라는 은유적 용어는 삼척동자라도 다 알고있듯이 이솝우화에 나오는 한 토막의 얘기에서 연원한다. 신현철이 번역하고 문학세계사가 1998년에 펴낸 <어른을 위한 이솝우화 전집> 제140화 “북풍과 태양”의 전문을 다시 한번 함께 읽어보자.

북풍과 태양이 서로의 힘이 세다고 다투다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시합을 했다.

먼저 북풍이 세찬 바람을 몰고 왔다. 하지만 나그네는 옷을 더욱 단단히 여몄다. 바람이 더 세게 불어대자 추위에 못견딘 나그네는 여분의 옷까지 모두 입었다. 크게 낙담한 북풍은 태양에게 기회를 넘겨주었다.

태양이 아주 부드러운 빛을 내리쬐자 나그네는 여분의 옷을 벗었다. 태양이 다시 뜨거운 열기를 내뿜자 더위를 견디지 못한 나그네는 근처 강으로 달려가 나머지 옷을 모두 벗고 목욕을 하였다.

이것이 이 우화의 전문이다. 우화 말미에는 작자 자신인지, 역자인지 몰라도 ‘이 우화는 온화한 설득이 폭력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석을 달고있다. 그러나 이 우화 자체에는 ‘설득’의 목적이 없다. 다만 북풍과 태양이 나그네를 상대로 자기 힘자랑을 한 결과 태양이 이겼을 뿐이다. 얼마 전에 미주대륙을 휩쓴 토네이도 같이 북풍이 센 힘으로 나그네를 몰아붙여 냅다 강물에라도 던졌더라면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서라도 나그네는 옷을 벗었을 것이다.

주고도 뺨 얻어맞는 꼴

얘기를 다시 문제의 햇볕정책으로 돌리자. 그렇다면 햇볕정책의 대상은 북한이므로 북한이 영락없이 나그네 꼴이 된 셈이다. 나그네는 자신이 전혀 알지못하는 사이에 북풍과 태양 사이의 힘자랑 내기의 대상물이 된 것이다. 이 사실을 나그네가 알았더라면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듯이 북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우화에서 ‘햇볕’은 나그네를 굴복시키고 자기의 승리를 과시하는 힘의 일종일 뿐 나그네에게 인도주의를 베푸는 구원의 천사는 아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이유는 단하나 북풍과의 힘겨루기 시합에 이기기 위해서다. 햇볕은 승리의 수단일 뿐 나그네의 안녕이나 행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폐쇄정책과 막가파식 외교로 인한 국제적 고립과 경제의 실패, 기아와 빈곤, 이에 견디지 못한 수많은 주민들의 탈북행렬 등이 북한의 참상을 웅변해주고있다. 이처럼 퇴로가 없이 궁지에 갇힌 형국인 북한으로서는 우리의 각종 지원이 긴 가뭄 끝에 단비 이상으로 반갑기 그지없으면서도 ‘옷을 벗기려는 시합의 대상’꼴이 된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북의 체제를 부인-제거하려는(옷을 벗기려는) 남측의 시도’로 간주하면서 전쟁불사 운운하는 험악한 폭언으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실컷 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듣고 뺨만 얻어맞는 꼴이다. 슬로건의 부적절한 용어선택으로 선의가 음모로 오해를 불러왔다면 뒤늦게라도 용어 자체를 바꾸는 것이 옳다. ‘공존’또는 ‘화합’등 쉽고 의미가 분명한 슬로건이 얼마든지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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