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월호]

2011-02-21_165412.jpg 한일협정의 60년대

생존투쟁 체험과거사

, 연탄, 물가와 씨름하며 경제개발

5·16 정부, ‘밥 먹여주는 정치로 돌파

·일 회담 문서공개로부터 과거사 논쟁이 본격적으로 되살아났다. 과거사 진상규명법이 곧 제정되면 친일진상 규명위원회가 발족하고 살아있는자와 죽은자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이미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경찰과 국방부 등의 과거사위원회도 수많은 과거사를 다시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한일회담 문서공개는 당시 학생신분으로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다가 지금은 여야 정치권에 진출하여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투사들에게 훌륭한 소재를 제공했다. 그 때 굴욕외교 반대투쟁의 명분이 얼마나 뚜렷했느냐며 정치적 자산을 다시 한번 자랑할 수 있게 됐다.

반면에 배고픈 국민으로 참고 견뎌온 경험세대의 입장에서는 쌀과 연탄과 물가와 입씨름하며 연명해온 고달픈 기억이 새삼 회상된다. 아마도 외교 문서공개에 신명 느끼는 투사들은 자기네 시위로 오늘의 민주화를 이룩했노라고 자부하겠지만 우리네 안목으론 굶주리며 선 개발, 후 민주화정치로 오늘만큼 살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원조로 입에 풀칠하던 시절

경제기획원이 20년 기념으로 발간한 개발연대 경제정책에 따르면 1961년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기본생활이 보장 될 수 없는 극빈국 처지였다. 1인당 국민소득 83달러, 인구증가율 3.25%, 도매물가 13.2%의 경제지표가 춥고 배고픈 시절임을 말해 준다.

이 해의 총수출은 고작 41백만 달러, 수입은 316백만 달러였으며 외국원조액 199백만 달러로 겨우 나라살림을 꾸려갔다. 1954년부터 61년까지 외국원조액 누계가 20억 달러를 넘었으니 쉽게 말하면 원조자금으로 입에 풀칠이나 하던 세월이었다.

이때 5·16정부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는 구호를 앞세운 것이 적중했다. 군사정부는 속도전으로 난관을 돌파함으로써 배고픈 국민에게 밥을 먹여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당연히 솔깃했다.

개발연대 경제시책에 따르면 1961년은 아직 3·15부정선거 재판이 진행 중이던 때였지만 5·16정부는 새정부를 꾸며 농업생산과 전기, 석탄 등 에너지 확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6110월 새 정부조직법 공포, 11월 박정희 최고 회의의장 방미,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 12월 국토건설단 설치법 공포 및 27세 이상 징집미필자 건설원 투입 등이 군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나라를 이끈 혁명정부 초기였다.

풍작과 흉작에 따라 민심이 좌우되던 시절, 61년은 흉작이었다. 화폐개혁으로 민생경제가 혼란인데다가 원조정책의 잦은 변동으로 미국의 눈치를 보는 일도 괴로웠다.

외화보유고가 텅 비었으니 수입을 대체할 산업을 조속히 육성하고 국가기간산업과 수출산업 육성 및 외자도입 촉진이 절실했다.

19617월 경제기획원 신설과 외자도입국 설치가 곧 개발연대 경제정책의 시동이었다. 경제기획원은 제일 먼저 물가조절 임시조치법에 따라 쌀, 석탄, 연탄, 비료 등의 가격동결로 민생안정에 나섰다. 그리고 5·16정부는 금융동결을 해제하고 새 농협과 중소기업은행을 발족시키고 외자도입촉진에 총력을 투입하면서 혁명 첫 해를 넘겼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발표

1962년 나라의 총예산 규모 6891억원이 당시 우리경제의 전모를 짐작케 해주는 지표이다.

이해 3월 박정희의장이 대통령권한 대행에 취임하고 송요찬 내각수반이 경제기획원 장관을 겸임하고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한 후 일본과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이 잦아졌다. 박대행은 한발극복과 증권파동 수습에 골몰했고 이해 10월에는 브라질 이민단 제1진이 부산항을 출항했다. 혁명과업은 경제관련 기구발족과 관련법 제정에 바빴다. 이자제한법, 증권거래법, 상업, 통계법 등이 이때 제정되고 건설부 신설을 비롯하여 농업진흥청, KOTRA, 성업공사(현 한국자산관리공사)가 발족했다.

국민은행과 대한광업진흥공사 설립법도 제정되고 택시 미터제가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며 새나라 자동차 공장이 준공되었다.

물가조절에 관한 임시조치법 개정으로 생필품의 경우 각령으로 최고가격을 지정, 판매를 강제토록 했다.

이해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고 차관도입에 따른 지불보증에 관한 법률과 장기 결재방식에 의한 자본재도입 특별조치법, 정부투자기관 예산회계법 등이 제정됐다. 또 외자도입 촉진위가 가동되어 매월 차관도입이 승인되고 내각 수반 아래에 수출진흥위원회가 신설되어 수출진흥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식량 물가와 전쟁기에 3공화국 발족

1963년은 캐나다를 비롯하여 EEC 6개국과 아프리카 제국등과 수교한 해이다. 그러나 미국의 BA정책 (Buy America) 강화에 시달리다가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월남의 군사쿠데타 등 국제정세 급변에 직면했다.

국내정치는 5·16후 처음 선거를 위해 중앙선관위가 1월에 발족하고 11월 박대행의 방미, 존슨회담, 12월 제3공화국 발족으로 최두선(崔斗善) 내각이 들어섰다.

정부기구로는 노동청과 철도청이 발족하고 국민은행, 대한재보험공사, 수산개발공사 등이 발족했다. 경제는 쌀과 물가안정이 최대 정책과제였다.

농산물증산대책 발표, 중앙식량긴급위원회 구성, 수출진흥대책, 수출입 링크제 도입, 국토건설종합계획 등이 숨가뿐 경제개발 시책들이었다. 그리고 물가는 임시조치법을 개정, 매점매석 단속규정을 명문화하고 물가대책위원회 구성, 시멘트, 밀가루 등 11개 독과점 품목 지정 등으로 물가와의 전쟁에도 허덕였다. 이 해에 장기결재방식의 대일 자본재도입 절차가 발표되고 한미경제회담이 정례화 되었다.

계엄하의 수출진흥 촉진

1964년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시끄러운 해였다. 5월에 정일권(丁一權)내각이 발족되고 곧이어 서울시 전교에 무기휴교령이 내려졌으니 대학생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굴욕외교 반대투쟁 외에 3분폭리 사건으로 집권당이 몰리고 있었다. 뒤에 3분폭리는 조사 전모가 발표되고 87천만 원의 추징이 선고됐다.

이때부터 경제는 수출제일주의로 질주했다. 수출진흥종합시책이 신문의 톱기사를 장식하고 수출산업공단 조성법도 통과됐다. 외자수급계획에 있어서는 정부보유 외화 ‘11천만달러 유지를 배수의 진으로 삼았다.

역시 쌀과 물가가 민생경제의 최대 초점임은 변함이 없었다. 정부는 500만 달러 물가안정기금 설치안을 마련하고 비축양곡 관리법안을 의결했다. 특히 서민금융과 관련 대금업(貸金業)단속에 관한 법률을 의결한 것이 눈에 띈다. 고리사채에 서민들이 시달리고 있던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6412월 박대통령의 서독방문이 여러모로 화제이며 경제개발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서독 뤼프케 대통령이 손수건을 꺼내 박대통령의 눈물을 닦게 했다는 이때의 서독방문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서둘러 졌다. 반면에 경제는 계엄하의 각종긴급조치들로 안정을 찾고자 고심했던 것으로 회상된다.

월남파병 후 한일협정 조인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룩된 1965년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5·16정부는 돌파와 전진의 대기록을 수립했다. 1월 월남파병 국회동의안 통과, 2월 한일기본조약 가조인, 4월 한일회담대표단, 청구권, 교포지위, 어업현안 합의요강 가조인, 5월 박대통령 방미, 6월 한일협정 조인, 8월 국회동의 등의 일정이 엄청난 격동의 산물이었다.

월남파병에 따라 이해 4월 사이공에는 주월한국경제협조단이 설치되고 11월에는 제1차 한·월 경제각료회담이 열려 세칭 월남전 특수가 개시되었다.

한일협정 타결과 월남 특수로 경제개발 인프라가 구축된 셈이지만 물가 10%선 억제가 목표였으니 서민경제가 안정 될 수는 없었다. 대일 청구권 및 경제협력자금에 관한 사용계획안은 마련되었지만 경제개발 종자돈으로 아직은 씨앗에 지나지 않았다.2011-02-21_165419.jpg

이때 경제일지는 2월 춘천댐 준공과 57발전가동, 농어촌전화(電化)사업계획 확정, 경지정리 사업착수, 3월 수출산업공업단지 기공, 단일 변동 환율제 실시, 6월 청와대 수출확대회의, 수자원 종합개발 10개년 계획, 국산품 수출확대를 위한 공업표준화사업 추진방안 등 경제개발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66년 사상 첫 외환보유 2억불 돌파

한일 협정 이듬해인 66년은 소련의 루나 9호가 사상 처음으로 달 착륙에 성공하여 미국과의 우주경쟁이 치열해졌다. 국내정치는 험프리 미부통령 방한과 월남지원 합의, 박대통령의 동남아 3개국 (말레이시아, 태국, 대만)방문과 10월의 월남참전 7개국 정상 마닐라회담 등으로 월남특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교적으로는 유엔대책을 위해 중립국 초청외교를 한껏 강화했다.

이해 3월 국세청, 수산청이 발족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준공되고 7월에는 공정거래법 국회제출, 10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외환보유고가 2억 달러를 돌파 23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때부터 내자조달을 위한 자본시장 육성 기본방침이 수립되고 합판, 쉐타 등 26개 품목의 수출전략상품이 지정되고 중소기업 기본법 국회통과(11), 농업기본법, 농경지 조성법, 농어촌지붕개량법 등도 제정되었다. 또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안되어 연평균 7%의 성장을 목표로 제시했다.

한일관계는 이해 2월 양국 실무진이 청구권자금 사용방안 세목안을 확정하고 정부는 청구권자금운용 및 관리법 등 7개 법률을 공포했다. 이어 한일무역협정 조인, 대일 청구권자금관리 특별회계신설(4), 66년도 청구권 자금 2천만불에 의한 원자재 도입자금 배정방침 수립, 8월에는 동경에서 제1차 한일각료회담 등으로 청구권 자금이 경제개발 종자돈으로 가용되었다.

60년대 후반 전자공업에 눈떠

19673월에는 박대통령의 서독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뤼프케 서독대통령이 방한하여 한·서독간 우의를 다졌다. 7월에는 박대통령이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험프리 미 부통령이 방한하여 월남전 지원을 다시 협의했다.

이때 정부기구로는 산림청이 발족하고 금융권에서는 외환은행이 발족했으며 구로공단이 준공되고 종합제철은 포항, 석유화학단지는 울산으로 각각 입지가 선정됐다. 또 석탄산업과 일반광업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광업진흥 공사와 농어촌개발공사도 이 해에 발족했으며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는 사상 처음으로 컴퓨터를 도입했다고 대서특필되었다. 이때의 기종은 IBM1401 형이었다.

이듬해인 68년은 121, 김신조씨 등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기도 사건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경제는 부동산 투기억제 세제가 발효되고 자본시장 육성책이 국회를 통과하여 주식 대중화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전자공업진흥 5개년 계획, 석탄산업 장기 육성책, 한국도로공사법안 제정 등으로 민생경제의 동향을 엿볼 수 있다.

이 해에 쌍용시멘트 동해공장이 준공되어 연산 170만톤의 동양최대 규모를 자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60년대는 5·16정부가 새로운 정부를 꾸미고 한일협정과 월남전 파병으로 가장 많은 논란과 시위를 몰고 왔지만 경제개발의 국가적 인프라를 구축한 바쁜 연대였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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