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8월호]

[1970년대 취재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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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자동차의 흥망성쇠

사운 기울자 혈육상쟁

김회장, 3남과 옥중화해 침혹한 광경

막내가 선친 뜻 따라 독자사업 성공

70년대 취재수첩 가운데 골육상쟁 기록이 많지만 그중에도 신진(新進)자동차 그룹의 흥망성쇠가 가장 서글픈 이야기다.

신진은 가난하던 시절 혜성처럼 등장하여 자동차의 꿈을 심어주며 재벌성을 급조했다가 급락한 대표적이 사례이다.

창업주인 김창원(金昌源) 회장이 50년대 후반에 큰 수를 내어 60년대에 왕국을 건설했다가 70년대를 다 채우지 못하고 거의 자멸의 길로 들어섰으니 우리나라 기업사의 비극이다.

뿐만 아니라 신진가의 가운으로 보면 부자간에 고발하고 함께 구속됐다가 옥중에서 서로 화해하는 진기하고 부끄러운 장면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쉽게 잊혀 지지 않는다.

화려했다가 기구한 신진 차의 팔자

김창원 회장이 이룩한 신진자동차는 우리의 60년대 꿈이자2011-04-04_160251.jpg 70년대 성취였다.

그러나 경험축적이 없고 제도가 미비하고 시장이 성숙되지 않았던 시절 한국산 자동차의 운명이 순탄할리 없었다. 한마디로 신진자동차가 시동을 걸어 잠시 거리를 질주하다가 GM코리아, 새한자동차, 대우차, 대우GM 등으로 여러 차례 팔자를 고쳐온 과거가 곧 김창원 회장의 화려했다가 비참하게 끝난 불운의 기업인생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신진이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발전에 공헌한 선구적 발자취는 지워질 수 없다. 김창원 회장의 집념과 열정도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지금이야 신진차의 이름도 없이 사라졌지만 황무지에 자동차 산업의 씨앗을 뿌린 것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의 우리경제를 뒷받침해 주는 최고의 성장산업이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진의 70년대는 자동차 종합그룹으로 재계의 정상급에 진입했었다. 신진자동차를 중심으로 신진지프, 현대스파이서, 현대기아, 대원안전유리, 대원철강, 하동환 자동차, 신진자동차 학원 등을 계열사로 거느렸으니 국내 유일의 자동차 그룹이었다. 여기에다 신원개발, 한국기계, 신진알루미늄, 경향신문, 동래골프장 등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당시 최대 재벌로 급성장했었다.

코로나 성공, 시보레 실패

김창원 회장은 기계와 자동차와 인연을 타고 났었다. 일본 와카야마 상업을 졸업하고 8.15후 피스톤링2011-04-04_160255.jpg 을 생산하다가 부산에서 신진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수공업식 군용차량 개조사업에 착수한 것이 그 뿌리였다.

그 뒤 5.16정부가 들어서면서 기회가 찾아 왔다. 국산화 시책에 관심이 많았던 5.16정부로부터 자동차 조립공장 인가를 받고 마이크로버스를 조립하다가 1963년에는 미군이 불하한 중고차를 재생시켜 승용차 신성호를 내놓는 솜씨를 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부평에 있는 새나라 자동차를 인수하여 일본 도요타와 기술제휴 및 차관도입으로 일제 코로나를 선 보였다.

신진이 차량정비에서 부터 코로나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1962년에 발표된 자동차공업 10개년 계획이었다. 당시 코로나는 국산화율 32%에 불과한 일제 모델이었지만 신진과 김창원 회장에게 모두가 주목하는 유명세를 듬뿍 안겨다 주었다.

이로부터 신진자동차는 날개를 달아 19689월 한국기계, 69년 경향신문 인수, 70년 신진공고, 71년 코리아 스파이서 설립, 73년 신진알루미늄 인수, 74년 신진지프 설립 등으로 기세 좋게 뻗어났다.

그러나 당시 시대 상황이 태평스럽지 못했다. 코로나가 주행하자 마자 현대자동차의 코티나와 포드M이 앞서 나가고 아세아자동차의 피아트 123이 날렵한 몸매로 스피드를 자랑하니 경쟁하기가 벅찼다.

4원칙으로 도요타 철수

이보다 결정적인 타격은 중국대륙으로부터 날라 왔다. 당시 중공의 주은래(周恩來) 수상이 발표한 4원칙이 도요타의 철수를 가져왔다. 동서 냉전이 깊어지고 있을 때 중국에 진출하려면 중국정부와 외교관계가 없는 적성국가와는 협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4원칙의 요지였다. 이에 따라 도요타는 중국시장으로 건너가고자 신진과 결별하고 신진은 GM과 제휴, GM코리아로 팔자를 고쳤다.

그러나 GM과는 최강자와의 조약이라 너무나 불평등했을 뿐만 아니라 시보레모델이 코로나의 인기를 따르지 못해 신진자동차의 운명이 기울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해 GM코리아는 한국기계와 함께 산업은행으로 가고 신진알루미늄은 율산으로, 신원개발은 삼성으로 넘겨 줘야만 했다.

이때 김창원 회장이 끝까지 사수키로 남겨 둔 것이 지프 전문인 ()거화(巨和)와 코리아스파이서 및 신진학원 등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취재수첩에 지울 수 없는 기록은 신진그룹이 붕괴하고 난 뒤 겨우 남겨 놓은 ()거화의 경영권을 두고 부자간에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스런 장면이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부자간의 다툼은 실제 이상으로 확대되어 당시 여론의 질타를 받았지만 아버지를 오해한 아들이 제가 잘못 했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사죄했으니 다행이었다. 기자의 관측으로는 갑자기 신진 그룹의 운명이 기울었기 때문에 생긴 본의 아닌 불상사가 아닐까 싶은 소감이다. 회사 경영이 잘되면 집안도 화목하고 반대로 집안이 화목하면 회사의 경영도 잘 될 수 있다는 교훈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부자간 한 감옥차마 눈뜨고 못 봐

1984121, 서울지검 특수3부는 이사회 결의서를 위조하여 149천만 원의 대출은 받아낸 전 코리아스파이서 대표 김준식(金準植·36)씨를 업무상 배임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했다.

이보다 앞서 김창원 회장은 미화 414천 달러의 불법유용 혐의로 구속되어 부자간이 함께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3남인 김준식이 회사 자금을 빼내어 부동산을 매입했다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수사에 착수됐었다.

김준식씨는 코리아스파이서 자회사인 삼만인터내셔널이 청주 제일관광호텔을 163천만 원에 경락 받아 인수대금이 부족하자 이사회 결의서를 위조하여 대출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먼저 김 회장이 구속된 것은 외화 불법유용사건이 아들 쪽에서 무기명으로 투서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당시 여론은 아버지를 모함한 패륜아를 그냥 두고 아버지만 구속하느냐고 들 끊었었다.

이 때문이었는지 검찰이 김씨의 혐의를 인정하여 구속하게 되니 여론의 호응은 받을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부자가 한 감옥에 갇혔으니 당시의 국민정서 상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그 뒤 알려진 사실로는 김 회장이 아들의 비리를 진정하게 된 것은 미국측 합작사가 미리 혐의를 포착하여 인책 해임시키도록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 회장으로서는 아들 네명 가운데 셋이 곁을 떠나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3남에게 마음을 위탁하고 있던 시기에 그마저 회사운영을 잘못한다고 생각되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놈, 이게 무슨 꼴이야

지금부터 21년전의 사건이지만 낭패한 표정의 아버지 김창원 회장과 고개를 못 드는 아들 김준식씨의 얼굴이 생생히 기억된다.

여론은 세상에 이런 법도 있을 수 있느냐고 분노할 만 했지만 막상 부자가 함께 구속되고 신문에 대서특필되자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도 당황하여 명예회복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자간 옥중화해라는 진기하면서도 부끄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1984124일 상오 11시 서울구치소 변호인 접견실에서 아버지를 만난 김준식씨는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빌었다. 그러자 김 회장은 이놈, 이게 무슨 꼴이냐고 야단치고 이런 집안 망신이 어디 있느냐면서도 모든 것을 다 용서하겠다고 했다.

이때 김준식씨는 아버지의 외화 밀반출 사건에 관해 무기명으로 투서했다는 소문은 절대로 사실이 아닌 풍문이라고 해명 하면서도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라고 했으니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천만다행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업상 온갖 사랑을 받아 온 자식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부도덕이 있을 수 없었고 자식이 아무리 미워도 이길 부모가 없었다. 그래서 김 회장은 내가 모든 것을 용서해주마라고 금방 마음을 풀었던 것이다.

김회장은 아들 넷을 두었지만 장남 김남식(42), 차남 김흥씩(40)씨 등은 이런저런 이견으로 부친을 떠나고 3남이 후계사업을 경영하다 실패했을 때 바로 이 같은 불미스런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막내가 선친의 유지살려 성공

이 무렵 막내 김용식(金勇植·35)씨가 가족을 대표하2011-04-04_160302.gif 여 사회에 속죄한다는 인사말을 남겼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우애 되살려 훌륭한 기업인이 되어 사회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 뒤 실제로 김용식씨는 착실한 사업가로 성공하여 신진가의 명예를 되살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김용식씨가 부친을 면회 갔을 때 김 회장이 사회를 위해 뭔가 남기고 죽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인생이 너무도 허망하구나. 네가 내 대신 사회를 위해 뭔가 꼭 해내라고 당부했었다.

김 회장은 가족들이 준비해 간 솜옷을 마다하고 일반 수인들과 똑같이 추운 감방에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형을 받고자 했었다.

그리고 김용식씨는 일찍부터 자수성가 해 보겠다는 자세로 독립하여 10원짜리 동전부터 알뜰히 모아 성공해 보겠다는 의지로 동전개발(東田開發)을 설립하여 부지런히 노력하여 지금은 강남에서 대형호텔을 경영하는 중견 기업가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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