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4월호]

1,300년 전 신라고승 혜초

옛 인도 오천축국여행

생전에 다시 못 볼 역사전시감동

/張洪烈 (장홍렬 한국기업평가원 이사회 회장)

경주를 처음 본 것이 햇수로 따져보니 지금부터 55년 전인 1956년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든 10월 중순 수학여행 갔던 때로 기억된다.

그때 내 머리 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 왕릉 입구에 서 있던 무인석상(武人石像)이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길게 드리운 구레나룻, 움푹팬 큰 눈과 우뚝 선 매부리코, 우람한 몸통의 사람모양이다.

우리생전에 다시 못 볼 역사전시

신라역사와 관련된 논문이나 칼럼, 자료를 읽을 때마다 그 무인석상의 수수께끼 같은 의문을 하나씩 풀어보고 있다. 지난 연초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기획전시(2010.12.18-2011.4.3) 되고 있는 세계문명전 실크로드와 둔황(Silk Road and Dunhuang)을 보고 나니 내 나름대로의 석상에 대한 의문이 거의 다 풀렸 다고 하겠다.

이번 전시회에서 둔황의 수많은 보물을 다 볼 수는 없었지만 실크로드 길목에 위치한 중국 신장(新疆), 간쑤(甘肅), 님샤(寧夏) 3개성의 박물관 11곳에서 소장하고 있는 진기한 유물 220점을 볼 수 있어 단편적이나마 실크로드의 숨겨진 역사의 비밀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 최고인기 (High light)는 뭐니 뭐니 해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과 신라고승 혜초(704-780)와의 만남이다. 우리들 세대에겐 두 번 다시 못 볼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사시간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라고 막연히 듣고 배워 그 내용도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역사 시험에 왕오천축국전과 관련이 있으면 혜초라고 썼던 기억만 남아있었을 뿐이다. 이번에 그 실체를 직접 보았으니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왕오천축국전의 탄생과 기록상으로는 1283년만의 조국 땅 귀향이고 세계 최초의 공개 전시회가 서울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울 나들이 3개월 만에 지난 317일 프랑스로 다시 돌아갔다. 우리 생전에 한국 땅에서는 영영 다시 보기 어렵게 되었다.

왕오천축국전이 전시된 12호실 코너에 들어서면 발길이 자연 늦어지게 된다. 설명이 기록된 자료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어보고 중요한 부분을 기록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흐른다. 그곳에 기록된 자료를 통해 왕오천축국전을 한번 정리해 본다.

1,300년 전 혜초의 2대장정 기록

한마디로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723-7274년간에 걸쳐 40여개의 나라 약 2km의 대장정을 두발로 걸으면서 보고 느낀 단상을 기록한 견문여행기(見聞旅行記).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한국 사람들이 무전여행 좋아하고 배낭여행 즐기는 DNA를 혜초를 통해 발견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위대한 한국인이 1300년 전부터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음을 체감했다. 혜초가 찾아간 구체적 여행 경로가 지도상으로 잘 표시되어 있다.

신라의 수도 경주를 떠나 뱃길로 중국의 광저우(廣州)를 거쳐 인도에 도착한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인도를 오천축국(五天竺國)이라고 불렀다.

인도를 동···북과 중앙으로 나누면 동천축·서천축·남천축·북천축 그리고 중천축이다. 혜초는 먼저 불교의 성지인 동천 축에서 석가의 탄생지인 룸비니,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달은 부처가 그 진리를 처음 설법한곳 사르나트(녹야원)등에 있는 4대탑을 순례하고 중천축국의 급고원과 암라원 등에 있는 4대탑을 둘러봤다 .

그 뒤 3개월을 걸어서 남천축(데칸고원), 서천축, 북천축을 지나 토화라국(토카리 스탄)으로 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역으로 넘어가 대식국(아랍)의 지배를 받고 있는 파사국(페르시아)까지 돌아보고 중국 땅 장안에 와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대작을 남겼다. 본인의 상상이지만 만약 경주까지 돌아와서 기록을 남겼다면 왕래(往來) 오천축국전이라는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왕오천축국전은 책으로 되어있지 않고 두루마리 필사본이다. 227, 5893, 총 길이 358cm의 한지마리인데 60cm만 펼쳐놓은 상태로 전시되고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은 소유자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다.

문화재를 빌려올 때 소장자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 대여기간 3개월, 60cm이상을 전시하지 말아달라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이유는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단독 500냥에 구입 프랑스로

이 귀중한 문화재를 둔황 막고굴(莫高窟)에서 처음 발견한 사람을 프랑스 동양학자 폴펠리오(1878-1945). 1905년 그 당시로는 동양학의 최고 권위자이며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고 위그러어, 러시아어에도 능통하여 프랑스 중앙아시아 탐험대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중국의 서북지방 간쑤성 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오아시스라고 불리는 둔황에는 막고굴이 집산되어있다. 1900(날짜미상) 막고굴 장경동(藏經洞)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필두로 수만 점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둔황 유물이라고 한다.

1908225일 이 수많은 유물 중에서 왕오천축국전이 탐험대장 폴펠리오 눈에 띄었다고 한다. 최초의 발견자가 된 것이다.

그의 해박한 동양학 관련지식과 동양문화에 대한 열정이 이 유물을 그냥 둘리 없었다. 막고굴 관리자로부터 선별한 중요문서 6,000여점과 왕오천축국전을 단돈 500냥이라는 헐값에 구입해서 프랑스로 보냈다.

그런 사유로 중국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고 우리 한국에도 소유권이 없는 프랑스 문화재가 된 것이다. 그때 이래로 지금까지 공개전시 된 적이 한 차례도 없었다고 한다.

이번 한국 전시가 처음이라고 한다. 훌륭한 우리 조상의 개척정신(開拓精神: Pioneership)을 엿볼 수 있는 뜻 깊은 전시라고 하겠다.

특히 전설 같은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체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다.

신라 경주에서 볼 수 있는 아랍 여인

이번 전시회를 조명하면서 1,300년 전 동서 문명의 교차를 실감할 수 있었고 특히 신라경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2011-04-09_195551.jpg 중동사람 서역 아랍여인들의 흔적에 대한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 보게 되었다. 경주시 구정동 석실분(石室墳:돌방무덤)의 모서리기둥 (통일신라 9세기경: 경주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조각돼 있는 방망이 하나를 어깨에 걸친 무인상도 그 하나이다.

방망이 끝이 구부러져 있다. 전문가들은 격구(擊毬) 스틱으로 해석하고 있다.

당시 신라 사람들이 격구를 좋아했다는 근거를 제시하는 유물이다.

황남 대총, 천마총(4~6세기) 고분에서 출토된 25점 유리그릇 가운데서 로만 글라스와 페르시안 그라스도 동부지중해의 유리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신라 경주에 들어본 것으로 입증된다.

유리는 세월이 지나도 변색 되지 않고 깨지지만 않는다면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상징성 때문에 상류층 지배층 사람들에게 금은보석보다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이 유리 문화가 일본 나라(奈良) 지역까지 건너가 나라 유리 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또 하나 있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국도변으로 자동차를 몰고 가다보면 괘릉(掛陵)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도 한국인이 아닌 서역인의 무인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고문국어(국어)시간에 배운 신라향가 처용무(處容舞)를 기억할 것이다.

그 처용설화의 주인공인 처용의 실체가 바로 바다를 통해 신라에 온 아랍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크로드를 통해 일찍이 한국은 국제화 되었고 동서 문화 교류의 중심에 위대한 선각자가 있었다는 자긍심을 깨닫게 해주는 뜻 깊은 전시회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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