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4월호]

명장의 병법

이순신과 손자병법

망국의 위기 때 명장 있었다

오는 428일은 이순신 장군 탄신 466주년이 되는 날이다. 노량과 한산도, 아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다채롭고 뜻 깊은 행사가 준비되어 있을 줄 알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면에서 장군의 뛰어난 모습을 살펴볼까 한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손자병법>을 얼마나 능숙하게 잘 활용했는가 하는 문제다. 이순신 장군이 실전에서 <손자병법>을 비롯한 병법서를 응용한 경우를 살펴보자.

혼인한 뒤 무과시험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다른 선비의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사서오경을 읽던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난중일기>에는 그 흔한 공자와 맹자의 말씀을 인용한 대목은 단 한 군데도 없다. 그 대신 병법에 이르기를하고 시작하는 대목은 흔하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순신이 병법에 통달한 명장이었음을 일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으로 병법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실전에 알맞게 응용하고 원용하여 해전마다 빛나는 승리를 기록한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이순신은 젊은 시절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술을 연마하는 한편 무경칠서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병법서를 읽고 또 읽어 훤하게 꿰뚫은 사람이다. 그렇게 하여 무과에 급제한 사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면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해전에서 <손자병법>을 비롯한 고금의 병법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병법을 육전(陸戰)이 아닌 해전에 응용하기란 한결 더 어려운 법이다. 이를테면 진법(陣法)만 해도 그렇다. 육상이라면 원진(圓陣)이니 방진(方陣)이니 일자진(一字陣)이니 장사진(長蛇陣)이니 하는 진형을 펼치기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파도가 치는 해상에서 전함을 움직여 진을 치는 것은 말과 같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진을 변화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이룩한 것은 저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성공적으로 펼쳤기 때문이다. 학익진은 이순신 장군의 독창적인 진법이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어떤 병법서에도 학익진이란 명칭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이 진법은 세계 해전의 역사를 바꾼 획기적 전법이기도 했다. 159278일 한산해전이 있기 전까지는 학익진이나 이와 비슷한 해전이 동양이건 서양이건 어디에서도 없었던 것이다.

학익진은 이름 그대로 학이 날개를 펼치듯이 함대를 늘어세운 뒤,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한가운데서 거북선이 적군 함대를 향해 돌격하는 전법이다.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에서 적 함대와 마주쳤으나 해협의 폭이 좁고 육지와 가깝기 때문에 왜선들을 보다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다. 당시 적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끈 왜 수군 70. 우리 수군은 이순신과 이억기의 전라 좌·우수영 52, 원균의 경상우수영 소속 7척 등 56. 이 가운데 3척은 거북선이었다.

이순신은 먼저 선봉함 5, 6척을 보내 적과 싸우는 척하다가 짐짓 퇴각토록 했고, 예상대로 왜적 함대는 유인책에 말려들어 좁은 견내량에서 빠져나와 넓은 한산도 해역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이순신은 모든 함대에 명령을 내려 학익진을 펼치도록 했다. 이에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일시에 선회하여 학익진을 펼친 뒤 거북선을 선두로 하여 그대로 왜적 함대를 향해 돌격했다.

이 싸움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는 미처 도주할 새도 없이 궤멸당해 59척이 격파, 침몰당하고 가까스로 달아난 것은 14척에 불과했다. 격침된 왜선의 대부분은 왜 수군의 주력 전함인 아다케후네와 세키부네였다. 반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다. 또 이 싸움에서 거둔 전과 가운데 왜적의 사상자 수는 전함 1척당 평균 50명으로 잡아도 3천여 명을 헤아릴 수 있다.

그때까지 해전이라면 전함과 전함끼리 뱃전을 붙이고 군사들이 상대방의 배로 건너가 단병접전, 즉 육박전을 벌여 승패를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이와 같은 해전의 양상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우리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은 선체가 튼튼하고 화포 등 무기체계가 우세한 반면 구조가 밑이 평편한 평저선이기 때문에 속도가 왜선에 비해 느렸다. 따라서 함 대 함이든, 육박전이든 접근 전에 능한 왜군과는 거리를 두고 싸우는 것이 유리했다. 이순신 장군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적함의 조총 사정거리 밖에서 보다 우세한 화약무기로써 포격전 위주의 해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처럼 탁월한 용병술 덕분에 임진왜란 7년 전 기간을 통해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함대는 단 한척의 전함도 왜군에게 격파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 유명한 거북선을 비롯하여 판옥선만 해도 200여 척에 이르는 우리의 막강했던 수군이 치욕적인 궤멸을 당한 것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고앉았던 용렬한 장수 원균의 칠천량 패전 뿐 이었다. 하지만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은 전멸하다시피 패망하고 남은 12척의 전함과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13척 대 133척의 열세를 기적적인 승리로 바꾼 명량대첩의 신화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1597915일 명량해전을 하루 앞두고 휘하 장졸들에게 훈시한 말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병법에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우리를 두고 이름이라.”

이순신의 이 말은 <손자병법>이 아니라 오기의 <오자(吳子)>에 나온다. <오자> 3편 치병(治兵) 4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원용한 말이다.

오자가 말하기를, 모름지기 전쟁터는 시체를 두는 땅이라,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요행으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장수는 마치 물이 새는 배 안에 앉은 듯, 불이 타는 집 안에 엎드린 듯하여, 적의 지혜로운 자도 그 꾀가 미치지 못하게 하고, 적의 용맹스러운 자도 그 성냄이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에 적과 맞서도 좋을 것이다

(吳子曰 凡兵戰之場 止之地 必死則生 幸生則死 其善將也 如坐漏船玄中 伏燒屋之下 使智者不及謀 勇者不及怒 受敵可也)

또 한편 이순신 장군이 1592614일에 올린 장계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있다.

왜적의 위치는 높은 곳이며 우리는 낮은 곳으로서 지세가 불리하고, 또 날도 저물어가므로 신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저 적들이 매우 교만한 태도이므로 우리가 짐짓 물러나는 척하면 저들은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와 서로 싸울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적을 바다 한가운데로 끌어내어 힘을 합쳐 공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하고 단단히 약속했습니다.

이 장계는 한산도싸움이 있기 전에 있었던 당포해전과 당항포해전 등 제2차 출동시의 싸움을 가리킨 것이다. 대체로 적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면 아군이 불리한 것은 병법의 기본이다. 적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아군이 쳐들어가서 싸우기에는 불리하기 때문에 적을 유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이순신의 전법은 유리한 위치의 왜적을 내가 원하는 장소로 끌어내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싸워 무찌르는 것이었다. 이는 <손자병법> ‘시계편에 나오는 적이 강하면 피한다.”, 또는 작은 이익을 주어 유인하고, 낮게 하여 교만하게 만든다.”는 말을 그대로 원용한 것이다.

한편 이순신 장군이 웅천과 부산포의 왜적을 무찌르지 못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손자병법>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손자병법> ‘구변편에는 궁한 적을 쫓지 않는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 당시 웅천과 부산포에 웅거하고 있던 왜군이 바로 궁지에 몰려 고양기라도 물만큼 절박한 상태에 빠진 쥐와 같았던 것이다.

급할 때는 도망치는데 앞장섰고, 군대가 싸울 때는 무엇 하나 도와주지도 못했던 무능한 국왕과 조정은 서울에 앉아서 하루바삐 왜적을 무찌르라고 호령이나 할 줄 알았지 병법이라고는 병자도 모르는 자들이었다.

뒤에서는 국왕과 대신들이 적을 치라고 성화였지만 이순신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륙합동작전을 요구했던 것인데, 이마저 육군 장수들이 깔고 뭉개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원균이 뭐라고 했던가. 자신은 불과 수백 명의 군사로 배를 끌고 부산포 앞바다에 가서 무력시위를 하고 적을 물리치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저렇게 하여 이순신이 잡혀 올라가고 그 자리를 차지했으나 원균은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여름이 다 가도록 부산포를 공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30만 육군을 동원하여 가덕도의 왜군을 치면 부산포로 진격하겠다고 요구했다. 30만 대군이라니! 임진왜란 당시 30만 대군을 동원할 능력이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그렇게 만만히 침공을 당하지도 않았고, 전쟁도 훨씬 빨리 끝났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까지 맞고 할 수 없이 출전했다가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조선 수군을 전멸에 빠뜨렸던 것이다.

이는 전략과 전술에 무지무능한 장수가 군대를 이끌면 얼마나 위험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역사의 교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원균이 용렬한 장수였던 반면, 이순신은 병법에 통달한 불세출의 명장이요 절세의 병법가였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인류사에는 수많은 명장이 등장하지만 이순신 장군처럼 성인 같은 분은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가 망국의 위기를 당했을 때 이순신이 없었다면 나라는 바로 그때 거덜 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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