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월호]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산업화 민주화 성공국민

100년전 웃음거리 왕국으로 묘사

/林春雄 편집위원(임춘웅 전 서울신문 논설주간, 이사)

현직에 있을 때는 외국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신문사에 찾아오는 외국인, 서울에 주재하는 외국인들, 세미나 등으로 서울을 방문하는 학계 인사들이 그들이었다.

외국인들을 만나게 되면 다소 진부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대한 인상을 곧잘 묻게 된다. 대답이야 대동소이하지만 본론이 끝나고 대화가 궁하게 되면 그런 얘기가 자연 화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서울의 역동적인 모습에 대체로 감동을 받는듯했다.

전후 산업화, 민주화 성공 사례

필자가 만난 사람들은 일반 관광객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이 한국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론적으로 한국이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의 배경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서울에 와서 직접 보게 되면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커 보이는 모양이다.

전후 독일과 일본이 잿더미 속에서 기적적인 부흥을 이룩했으나 그들은 이미 세계대전을 일으킬 만큼 산업화 됐던 나라들이었고 신생국가들로 싱가포르나 대만 같은 나라들이 있으나 그런 나라들은 경공업 중심의 작은 나라들이다. 때문에 전후 진정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 뿐 이라는게 그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한국에 왔기 때문에 다소 과장해서 칭찬을 하는 립서비스 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런 점을 감안해도 우리가 이룬 오늘의 한국모습은 실로 장하고 대견스럽지 않을 수 없다.(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 놓은 나라를 다른 일부가 지금 다 망쳐놓고 있다고 아우성이지만 필자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은 아직도 건강하고 발전적이다)

100년전 조선은 타락, 게으름

그런데 며칠전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100년전 영국 사람들이 평가한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을 고찰한 일그러진 근대라는 책을 사게 됐다. 서울대의 박지향 교수가 쓴 책으로 영국에서 모은 각종 자료를 토대로 쓴 탄탄한 책이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책에는 100여년전 영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견해가 비록 사적이고 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간 돌아본 것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이 나라의 외양, 우리 선조의 모습이 과연 이 정도였을까.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그런 느낌을 받았을 때 요즘의 젊은 세대가 그 책을 읽게 되면 몹시 황당해 하지 않을까 짐작된다. 아마도 젊은이들은 당시 조선에 온 영국 사람들이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들일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어떤 필요에 따라 지극히 악의적으로 그렸거나 아니면 그들의 시각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선 그들의 조선관찰기부터 살펴보자. 그 책에 등장한 영국 사람들이란 당시의 외교관, 상인, 선교사, 여행가들이 망라돼 있다. 사람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인 인상은 비슷한데 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을 요약해 보면 조선은 그저 타락하고 구제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조선 사람들의 게으름을 지적한다. 한마디로 조선민족은 도무지 고칠 수 없을 만큼 게으르다고 했다. 조선 사람들의 게으름은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만큼 지독하고 치유가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도 양반들은 담뱃대 하나도 움직여서는 안될 만큼 극도의 무력감에 빠져 있다고 쓰고 있다.

다음으로는 더러움이다. 진흙과 짚풀로 된 더러운 오두막에서 사는 한국인은 전적으로 무지하고 미개한 사람들이었다. 어떤이는 중국의 베이징을 보기 전까지는 서울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서울은 눈과 코가 다 같이 괴로운 곳이었다. 너무나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독립 유지 어려운 부패 나라

조선은 또 세상에서 가장 미개하고 무기력하며 생기 없는 나라였다. 조선사회는 생명력이 부재한 사회로 묘사된다. 1911년 서울을 방문한 영국인 부부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한 예술품 전시회를 관람하고 나서 어리둥절해진다. 그들이 직접 본 조선과 전시회에 나타는 조선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은 문명퇴화의 전형적인 본보기란 결론을 내린다. 전시회를 돌아보니 조선에도 예술이 있었고 미개하지 않은 취향도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수준의 문명국이 왜 이제는 야만국으로 전락했느냐는 것이다.

커즌이란 사람은 이 작은 나라는 독립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부패했고 독립을 통해 이득을 얻어내기에는 너무나도 쇠약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조선은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가장 무능한 웃음거리 왕국이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잘못 통치되고 있는 나라였다. 조선은 왕궁으로부터 저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부패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따라서 조선은 스스로 일어서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외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백성들을 위해서는 더 나을 나라였다. 때문에 그들의 눈에 조선의 일본 통치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들의 견해가 편견이고 잘못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의 눈은 정직했고 사실이었음을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그런 나라가 어떻게 해서 100여년 만에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나라로 변신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문명국에서 무기력국으로

문명국이었던 조선은 후기에 들면서 온 나라가 부패해 더 이상 스스로 유지될 능력을 갖지 못한 무력한 국가가 됐다. 지배계층은 철저히 부패했고 악랄해 백성들은 더 이상 일해야 할 동기가 없었다. 일해 봐야 관리들이 다 착취해 가는데 왜 일을 하느냐고 한 농민은 영국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영국 사람은 언제나 점잖은 신사이고 영국은 신사의 나라다. 그러나 영국도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의 정치사회학자 토크빌은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영국을 돌아보고 저윽이 놀랐던 모양이다. 영국 사람들이 어찌나 바쁘게 사는지 마치 내일까지는 부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 사람들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도 있다. 요즘에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이민 1세대도 장관이 될 수도 있고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래서 미국사회는 유럽과 달리 항상 활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옭아매는 전통질서라는 것이 없거나 그 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어서 사회에 계층변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계층상승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밑바닥으로 전락할 수도, 상류사회로 껑충 뛰어 오를 수도 있는 기회가 다 같이 주어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1970년대 초 미국에 갔다가 우리 교포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필자도 놀랐다. 이런 국민이 어떻게 그동안 그처럼 못살았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00년 전 조선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게을렀던 것은 일할 아무런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지금의 한국 사람들이 눈코 뜰새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은 바로 이런 기회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열심히 일할 동기부여 아쉽다

일그러진 근대의 저자는 민족성이란 것이 따로 정립돼 있는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로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국민일수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백성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런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위정자들은 바로 이점에 유의해야 한다. 국민들이 열심히 일할 동기가 부여돼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돌아오는 것이 있는 사회, 누구나 노력하면 사회의 계층사다리를 한계단 한계단 오를 수 있는 사회여야 국민이 신명이 나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도 기득권 사회라는 것이 형성돼 가고 있다. 그들의 이기심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으니 세금을 더 내라고 하니 똑같은 집에서 사는데 왜 세금을 더 내야 하느냐고 따진다. 일정 수입이 끊긴 노년층은 세금 때문에 10년 동안 살아온 집을 팔아야 할 처진데 그것은 좌파 정책이 아니냐고 항변한다.

참으로 슬픈 현상은 그동안 반듯한 개혁론자로 행세해온 사람들도 자기문제에 부딪치면 앞뒤가 꽉 막힌 이기심 덩어리로 돌변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기득권층이 가진 것을 움켜잡고 아무것도 내놓지 않으려 들면 세상이 불안해진다. 세금이 부자들을 보호해 주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나 열심히 해서 부자 됐고 너희들 보다 세금 엄청나게 더 낸다그래야 부자가 당당해 지는 것이다. 세상이 지나치게 잘못되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종국에는 한국 사람들도 다시 일하려 들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영국 사람들에 투영된 조선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불과 일백년 전 우리 할아버지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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