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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석(素石) 이철승(李哲承)] 건국과 호국의 현대사
  • 경제풍월
  • 승인 2011.07.09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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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호]

소석(素石) 이철승(李哲承)

건국과 호국의 현대사

반일 반공일생 ‘대한민국과 나’ 출간

‘아직도 건국 완성을 위해 할일이…’


2011-07-09_231302.jpg 대한민국 건국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살아있는 현대사’의 회고록 제목이 ‘대한민국과 나’이다. 올해로 90세인 소석(素石) 이철승(李哲承) 대한민국 건국기념사업 회장이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호국에 직접 참여한 현대사이다.

구세대의 막둥이, 신세대의 맏형

소석의 정치인생은 극히 짧은 집권당 체험을 제외하고는 줄곧 야당의 길이었지만 일제 식민지시대부터 해공공간 좌우대결과 대한민국 건국의 전위대 역할을 다했기에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게 실전 대한민국 역사를 당당히 증언할 수 있다.

지난 5월23일 국회 헌정회에서 가진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출판기념회에는 전 현직 유력 정치인들 다수가 참석했지만 모두가 그의 문하생쯤으로 비쳤다. 1·2권 합쳐 900쪽이 넘는 생생한 대한민국 현대사의 어느 대목엔가 그들 전 현직 정치인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렇지만 굴곡과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도중에 이름이 나오다가 사라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석의 현대사속에는 일제 총독에서부터 8·15후의 이승만과 김구가 나오고 5·16의 박정희와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몽땅 체험한 유일무이한 큰 정치인의 기록이다. 그래서 소석은 스스로를 ‘구세대의 막둥이, 신세대의 맏형’이라고 자부했다.

일제하의 항일투쟁기에 막둥이 역할하고 대한민국 건국과 반공전선에서 맏형 역할을 다해왔다는 강력한 자부심이다. 실로 소석의 90평생은 태생적으로 반일(反日), 반공(反共)으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의 삶이었다.

소석 앞에 무명의 YS와 DJ

소석은 회고록에서 식민지시대와 8·15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민2011-07-09_231354.jpg 족진영 애국선배들의 사랑방에서 밥상 나르는 심부름으로부터 애국애족을 느끼고 배웠다고 했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김병로,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등 당대의 애국지도자 밑에서 제대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배웠다는 뜻이다.

소석은 해방정국을 가지고 놀던 좌익세력의 투쟁에 호국학생운동으로 맞서 반탁과 반공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헌신한 것은 너무나 자랑스러운 기록이다. 좌우익이 격돌하던 건국기에 김일성의 초청으로 38선을 넘어가겠다는 백범 김구를 만류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아 김일성의 독재정권이 수립되고 남한에는 이승만의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국부 이승만은 김일성의 6·25 남침을 이겨내어 국토를 수호했다. 그 뒤 박정희의 5·16이 경제를 일으켜 나라를 반듯하게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소석의 정치인생은 굴절과 파란의 연속이었다. 4·19 학생혁명으로 수립된 장면정부는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기엔 역부족이었고 군부의 동향에 너무나 무관심했다.

소석은 장면정부의 소장파 실세로서 군을 잘 알고 있었고 6관구 사령관을 지낸 박정희도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때 소석이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떠나던 날, 김영삼(YS), 김대중(DJ)은 무명의 정치인에 지나지 않았다.2011-07-09_231448.jpg

소석이 5·16정부의 정치규제 하에 해외에서 7년간 망명하던 시기에 자라난 YS와 DJ가 대통령이 됐지만 그는 황색바람에 밀려 정계를 은퇴한 불운을 맞았다. 소석은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맹렬하게 투쟁했지만 소석은 늘 국가안보를 먼저 생각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했다.

정통 건국, 애국노선에서 나온 정치철학이었다. 그러나 중도통합론, 참여하의 개혁, 내각제 개헌 등 실용주의 소석정치의 첨단 지적재산권은 ‘사꾸라’라는 야권내부로부터 반란으로 너무나 여지없이 매도당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아무나’, ‘아무렇게’했던 대통령직

지나고 보면 국부 이승만을 제외하고는 ‘아무나’,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정치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였다. 소석 아래 무명에 지나지 않았던 YS와 DJ가 대통령을 역임하고 역시 무명의 노무현도 대통령을 지냈다.

소석은 비록 대통령 자리에 앉아보지 못했지만 이들 역대 대통령 못지않게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다했고 지금껏 대한민국의 안위를 걱정하며 호국전선에 앞장서고 있음은 온 국민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소석이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야당투사로서 집권한 대통령들이 ‘제2건국’이니 ‘역사 바로 세우기’를 들오나오자 정통 건국세력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소석은 헌법 전문이 임시정부에서 4·19로 건너뛰어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으니 “할애비 제사는 지내면서 애비 제사는 안 지내는 집구석 아니냐.”고 가장 실감나게 지적했다. 더구나 DJ와 노무현의 ‘도둑맞은 10년 세월’은 김정일과 야합한 6·15선언의 음모가 아니냐고 지적했다.

제주 4·3폭동, 5·18 광주사태 및 심지어 간첩까지 민주유공자로 포상하면서 건국절도 없고 건국유공자에 대한 예우도 없는 나라를 두고만 볼 수 있느냐고 무한 통탄했다. 이 때문에 소석은 비록 몸은 늙었으나 마음만은 젊은 ‘신노심불노’(身老心不老)의 심정으로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의 완결을 위해 지금도 노력한다고 말한다.

소석은 (사)대한민국 건국기념사업 회장과 대통령자문 원로회의 위원으로 여전히 애국애족 노선에서 건강한 삶을 보여준다.

2011-07-09_232317.jpg

고이소 총독 앞에서 학병거부 발언

소석은 뿌리 깊은 양반혈통에서 기개와 충정을 타고났다. 선친 이석규(李錫圭)는 한말 망국을 한탄하던 지식인으로 6·25때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퇴각하던 인민군들에게 피살됐다. 중부 이석주(李錫柱)는 제헌의원으로 김성수, 김병로 등과 한민당 주류로서 소석을 민족진영으로 이끌었다.

소석이 전주고보를 거쳐 보성전문(고대)에 입학한 것은 조선총독이 영어를 적국의 언어라는 이유로 입시과목에서 삭제하고 수학으로 대체하여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당시 보성전문 교장 김성수가 운동장을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베를린 올림픽경기장을 모형으로 만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보성전문 1학년 담임이 안호상(安浩相) 박사로 일어가 서툴러 모윤숙(毛允淑) 시인이 번역한 교과서를 읽다가 “창문을 닫아라.”고 지시한 후 우리말로 강의했다고 한다.

일제말기 고이소 총독이 학병거부 운동하던 학생대표들을 만났을 때 보전대표 이철승이 “조선민족을 독립시켜야 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겠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벌이겠다.”고 당돌하게 덤볐다. 이때 고이소 총독이 ‘동조동근’(同祖同根) 논리를 내세워 조선과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라며 아시아 10억 인구의 해방전쟁으로 공영권을 건설하겠다고 강변했다.

그 뒤 일제는 교장 인촌과 장덕수, 유진오 교수 등을 앞세워 설득하여 1944년 초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했으니 일제하의 항일 학생운동을 가장 정확히 증언할 수 있는 것이다.

‘오, 대한민국 누가 지키리’

소석이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이 극렬하게 대립할 때 반탁, 건국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사실은 너무나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현대사이다.2011-07-09_232531.jpg

6·25당시 남로당 지하총책이던 박갑동(朴甲東)씨가 당시 학생운동 대표 이철승의 활약상을 잘 말해준다. 지금은 일본에 거주하는 박갑동 씨가 낮에는 미군정에 무상출입하는 기자이지만 밤에는 남로당의 우익인사 저격을 지휘하던 위치에서 어느 날 이철승 명단이 첫머리에 올라있기에 “그 녀석은 살려두라”고 지시했다. 행동대원들이 “악질분자를 왜 살려 두라느냐.”고 항변하자 박갑동이 “그자가 잘생기고 행동력이 뛰어나니 나중에 공화국이 수립되면 크게 써먹을 수 있지 않느냐”고 변호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꿈같은 이야기를 듣고 소석에게 사실여부를 물어봤더니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확인해줬다. 소석은 그 뒤 박갑동 씨와 함께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는 책을 출판한 적이 있다.

소석의 정치일생에 관한 저서는 5·16 정치망명 이후 귀국하여 집필한 ‘절망에의 도전’, ‘한국학생건국운동사’, ‘중도통합론과 나’가 있고 DJ 좌파정권시절 친북 좌익들의 난동이 극심해지자 ‘오, 대한민국 누가 지키리.’라고 절규한 구국, 호국 명저를 내놓기도 했다.

소석은 7선 의원으로 맹활약했지만 ‘40대 기수론’의 YS와 DJ의 ‘바람정치’에 걸려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이를 ‘작은 정치’의 졸업이라고 표현할 만큼 대범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것이 본연의 ‘큰 정치’라는 설명이다.

YS와 DJ의 대통령을 향한 집념은 88서울올림픽 유치마저 저지코자 했다. 박정희 타도를 위해 주한미군 철수를 지지하고 미국이 “박정희의 엉덩이를 걷어차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틈에 반미와 친북의 주사파가 나라를 뒤흔들고 다니자 소석은 큰 정치로 자유민주총연맹을 결성하고 자유전선, 민족정론지를 발간하고 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 등을 출범시켰다.

DJ와 노무현 시절 소석이 비상 국민회의를 통해 ‘대한민국이 망해간다’고 강조하여 ‘아스팔트 우파’가 거리로 나와 기어이 좌파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일생동안 선대의 뜻, 애국의 삶

소석이 대통령은 못했지만 정계와 사회단체 등에서 활약한 60여 년간의 발자취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너무나 뚜렷하다. 야당대표, 국회부회장 뿐만 아니라 대한체육회장, KOC위원, 역도연맹 등 스포츠계, 서울평화상 문화재단 이사장, 월드컵 조직위원, 국군포로 및 납북자, 탈북자문제 해결을 위한 대유엔 인권외교, 유엔평화군 성전추모회 등 각계에서의 뛰어난 활약은 영원히 빛날 큰 정치인의 족적이다.

소석은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조문해야 한다는 일부 친북노선의 주장에 강력대응하기 위해 대남적화 음모에서부터 장기 권력세습 등 김일성의 12가지 죄악을 제시했다. 또 DJ가 김정일과 연방제 통일방안에 합의하고 김의 서울답방을 이야기하자 “6·25남침 사죄를 먼저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아마도 김정일은 소석과 같은 대한민국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애국세력이 무서워 서울답방의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는지 모른다.2011-07-09_232726.jpg

소석은 지금 대한민국 건국기념사업 회장으로 8·15 건국절 제정과 건국유공자 예우를 관철시키기 위해 국민운동을 꾸준히 벌이고 있다. 골수에 심어진 민족주의, 반공정신에다 자유와 민주주의 정신이 소석의 일생을 영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소석은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를 마무리하면서 ‘매일생한 불매향’(梅一生寒 不賣香)이라는 깊은 감회를 밝혔다. “매화는 일생동안 추운 곳에 살지만 매화의 향기만은 팔지 않는다.”는 뜻이다. 청년학생시절부터 선대의 유지, 애국선배들의 가르침을 한 치 어김없이 살아왔음을 자부하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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