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99 말썽, 잡음, 추태들

새천년 햇살에 지다

모든 책임 대통령이 지고

나라 지킬 뜻을 세우는 해

국정의 중심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동남아를 다녀온 후 심중의 결단을 내 놓았다.

“국정의 중심에 내가 선다. 대통령이 확실하게 국정의 중심에 서서 국민이 원하는 국정을 펴겠다.”

구태여 필요없을법한 다짐과 각오를 대통령이 스스로 피력해야만 했다. 국빈 자격으로 해외여행길에 오르면서 곰곰 생각을 다지고 결행키로 했을 것이다. 국정을 확실하게 쇄신하지 않고는 새천년도 희망이 없노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국정쇄신을 들여다보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국쇄신이고 다른 하나는 민심수습이다.

정국이 진실로 말이 아니었다. 국회도 없고 여야도 없는 꼴이었다. 폭로와 대립의 난장판 속에 총선에만 집착하느라 체면도 책임도 다 버렸다.

민심이 가만히 있을 까닭이 없다. 터놓고 안 되겠다고들 했다. 국민의 정부가 이 모양이냐고들 함부로 말했었다. DJP공동정부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빈정거리기만 했다.

여론을 열심히 청취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아무런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여권 내부에서도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으로 들린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이 동남아에서 귀국하자마자 국정이 바뀌고 있는 느낌이다.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나에게 있다.”는 말이 귀에 들어온다. 대통령도 듣고 느끼고 있었음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신동아 그룹이 대통령에게도 로비를 시도했었노라고 김대중 대통령이 밝혔다. 그러니 99년 최대의 말썽과 추태로 기록된 옷로비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옷로비 사건이란 잔꾀 부리려다 들통나고 망한 사건이다. 권력을 믿고 권력을 과신하다 커진 사건이다. 사건이 커지면서 결국은 대통령이 자신에게도 로비를 시도했노라고 고통스런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국정의 중심은 처음부터 대통령 한 사람이거늘 누가 주변에서 권력을 빙자하여 그토록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는지 괘씸하다.

그러니 김대중 대통령이 원위치인 국정의 중심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껴안을 것은 감싸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특히 정국쇄신과 관련해서 “야당총재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존중한다.”는 말이 새바람으로 느껴지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권력 있는 곳에 로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신물이 나도록 야당생활을하며 권력과 투쟁했던 분이다.

여당과의 힘겨운 대결정치에도 이력이 쌓이고 쌓였었다. 그래서 집권하면 야당과의 관계가 사상 최고로 화목할 줄 믿었다. 그런데도 DJ의 국민의 정부에서도 정치가 거의 없어진 형국이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건 정치적으로 부딪치며 사생결단이다. 거리로 자주 뛰쳐나간 거대야당 한나라당은 마치 DJ의 야당시절 모습을 복사한 모양이다.

반면에 공동여당은 단독 국회로 최소한의 국정공백을 메우며 민심이탈을 막고자 안간힘을 쏟기에도 바빴다.

신동아 그룹이 이같은 정치적 환경을 읽고 생존을 위한 로비작전을 벌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정치는 없어도 권력만 있으면 통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과거의 체험으로 보나 권력주변의 상황으로 보나 방법이 문제이지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재벌그룹 총수가 행사할 수 있는 금력은 살아있는 시점이었다.

이 때문에 최순영(崔淳永)회장의 로비는 성공했었다고 볼 수 있다. 로비의 성패에 관해 이론이 있겠지만 대통령에게까지 로비를 시도할 수 있었다면 충분히 성공했었다. 정치적으로는 절반쯤 성공했다가 실패했다고 하지만 수사를 중단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성공이란 말인가.

때는 재벌개혁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IMF 특수상황이라고는 하나 거액의 외자유치를 명분으로 수사를 중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로비가 권력 가까이 까지 도달했기에 가능했던 성공이었을 것이다.

다만 사안이 워낙 중대하고 시운이 맞지 않아 완전성공에 이르기 전에 탈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권력을 매개해 준 사람

종교인 최순영 회장을 신뢰하고 걱정해 준 이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최 회장이 많은 이에게 베풀고 골고루 신경을 썼던 것으로 소문이 났다. 종교인 뿐만 아니라 정치권에도 신세를 주고 갚았기에 최 회장 수사를 둘러싸고 선처를 청탁하는 소리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외화 1억6천만달러의 밀반출 혐의라면 덮어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사건이었다.

불법자금조성이나 횡령부문도 너무 거액이었다. 우연히 드러난 사건도 아니고 거의 명백한 고발을 통해 드러난 범죄행위로 지적되었었다.

따라서 권력의 힘으로라도 끝까지 덮어 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사용처를 밝힐 수 없다는 거액의 로비자금 때문에 자꾸만 소문이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최순영 회장의 로비는 성공하고도 끝내는 실패했었다는 결론이다.

최 회장으로서는 살아 남고자 구명로비를 생각한 것이 당연했다. 아무리 IMF체제라지만 선대가 창업하고 자신이 키운 거대기업의 경영권을 포기한다고 상상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거액의 외화 밀반출이나 공금횡령 등 경제범죄행위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꾸며내겠다는 생각은 망상이었다. 경영권에 집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해도 외화유출과 경영부실에 대한 책임마저 없었다고 로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마도 권력을 중계해 준 믿을만한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청와대와 검찰을 움직이거나 통할 수 있는 사람. 경우에 따라서는 최고 권력자까지 접근할 수 있다고 장담한 사람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로비사건의 전모가 들어나면서 권력의 중심에 최 회장의 구명로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김태정(金泰政) 검찰총장을 수시로 만나고 청와대를 방문하고 특별수사권을 행사해 온 세칭 사직동팀 보고서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최 회장은 감옥에서도 끝까지 고문 겸 부회장으로 영입한 박시언(朴時彦)씨를 믿고 예우하려 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박씨는 월 1천3백만 원의 급료에 저택과 차량을 제공받아 대외활동을 했었다.

만약 대외적으로 공표된것처럼 신동아 그룹의 외자유치가 성공했었지만 로비도 성공했을는지는 알 수 없다. 뒤에 최 회장이 구속되고 여인들의 옷로비사건이 터지고 보니 로비는 성공하지 못했었다.

다만 박시언 당시 부회장의 로비가 최순영 회장의 경영권을 끝까지 지켜주려 최선을 다 했었다는 사실은 그 뒤에도 밝혀졌었다.

금감위가 대한생명의 부실을 진단하고 관리인을 파견했을 때까지 최 회장은 옥중에서도 반기를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금감위의 구조조정 절차에 법적 하자가 있었다는 사법적 판단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최 회장의 구명로비는 권력을 매개해 준 사람이 만든 정치적 작품이 아니었을까.

여기에다 한때 최순영리스트가 있느니 없느니 했었지만 아직도 들어나지 않은 숨겨진 얼굴이 적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팔자좋은 여인들의 세상희롱

최회장의 로비가 성공하다 도중에 실패하려하자 안방마님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최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을 위해 나선 것은 하등 잘못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도리였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팔자 좋은 여인과 여인들이 수시로 어울려 다닌 행각은 추태였다. 세상을 희롱하고 민심을 비웃는 꼴이다.

여인들은 남편의 출세를 위해 내조라는 이름으로 로비에 익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스스로 좋은 팔자를 누리고자 열심히 뛰어 성공한 여인들이기도 했다.

지난해 TV 청문회를 통해 눈에 익었지만 하나같이 열심히 살았던 여인들로 여겨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쉬울 것 없고 부러울 것 없는 이들이다. 그런데 운수가 나빠 낭패를 당하고 하늘처럼 섬기던 남편들마저 낙마시킨 셈이다.

남편의 낙마는 사사로운 집안일이겠지만 문제는 나랏일을 망치고 세상인심을 더럽혔다는 점이다.

고관댁 마나님이나 재벌댁 사모님들은 다 저토록 세상물정 모르고 겁없이 나 다니는가. 이렇게 보면 아무 잘못없는 마나님들 명예마저 짓밟은 격이다.

라스포사를 운영해 온 정일순(鄭日順)이란 여인은 행동력있는 여걸로 비친다. 특별검사가 아무리 구속하려해도 구속될 죄가 없는 것으로 판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밖에서 보기엔 굳세기 짝이 없고 무서울 것 없어 보이는 인상이다.

그리고 옷로비 사건에서도 어떤 내용이건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분으로 여겨진다.

정여인이 검찰총장에게 보낸 편지내용이 공개된 적이 있었다. ‘총장님 전상서’로 소개된 편지에는 대통령 영부인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회사에서는 영부인을 A 사모님이란 암호로 부른다.”고 적혀 있다니 무슨 말인가. 영부인이 라스포사의 단골고객이라는 점을 과시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그리고 여인과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올라있다.

당시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延貞姬)씨는 억울하고 최회장부인 이형자(李馨子)씨는 자신을 통해 영부인에게 남편의 구명로비를 했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당시 통일부장관 부인 배정숙(裵貞淑)씨는 못마땅하게 표현되었다.

정여인은 옷로비사건과 관련이 없는 옷장사꾼 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옷을 팔다보니 고관댁이나 재벌댁과 만날 수 있었고 장사속으로 이런저런 말이나 행동도 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권력을 가진 고관댁이 정여인의 장사속에 휘말렸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나 실정법상 무사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판단이다. 또한 국가권력을 행사해 온 남편들은 책임이 없겠느냐는 말이다.

책임있는 이들의 피해 공방

옷로비 사건이나 그 처리과정을 두고 집권당도 피해의식을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한창 신당을 만들고 물갈이에 열중하고 있지만 옷로비 사건 때문에 총선을 망쳤다고 한탄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의 국정쇄신 방침도 이같은 집권당의 위기의식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모든 혐의와 의혹을 낱낱이 파헤쳐 엄정처리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씀 뒤에 서로 살겠다는 생존게임이 볼만하다.

최순영회장은 예상한대도 로비를 지시한 적도 없고 문건을 본적도 없노라고 주장했다. 비자금이나 로비자금도 모르는 일이라고 항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도 받았지만 최회장은 아직도 대한생명의 경영권 탈환의 환상을 버릴 수 없는 입장이다.

전 대한생명 부회장 박시언씨의 폭로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대검 기자실로 찾아온 박씨는 대한생명의 회생을 노려 보고서를 공개했노라고 밝혔다. 최회장의 구속과 대한생명의 처리방식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기에 보고서 공개가 사태를 반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김태정 전 검찰총장이나 박주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못 마땅했을 것이다. 한때 권력에 접근하여 로비를 했다가 이제는 무너진 권력에 도전하려는 뜻이 아닐까.

그러면서 최순영회장에 대한 신뢰와 의리도 보여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김태정 전 총장도 할 말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변호사를 통해 최회장의 외화도피 혐의 수사과정에 외압을 받았노라고 실토했다. 당시 정치권 등에서 수사를 중단하거나 불구속으로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었다는 주장이다.

또하나 최회장의 사법처리를 끝까지 주장한 사람은 김태정씨와 박주선 비서관뿐이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수사가 진행중일 때 대한생명이 10억달러의 외자유치를 추진중이니 수사를 보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누가 왜 실현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외자유입설을 수사와 연관시켰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부분이 바로 김대중대통령의 강력한 방침에 따라 앞으로 밝혀질 부분이 돼야 하지 않을까.

나라를 지킬 집단이 필요하다

새해는 묵은 말썽과 잡음을 잠재우고 나라를 지킬 뜻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를 한다.

명지대 안영섭(安瑛燮)교수는 지난 12월1일자 중앙일보 오피니언면 기고를 통해 “국가수호 집단이 없다.”고 한탄했다.

나라가 망하려는 데도 나라를 굳세게 지키겠다는 집단이 없다면 얼마나 심각한가.

안교수의 컬럼을 읽어보자.

나라가 참으로 부끄럽다. 바람 잘 날이 없다.

이 나라에는 플라톤이 강조한 국가수호집단이 없다.

선진국일수록 사회적 책임의식이 강한 파워 엘리트가 나라를 안정과 발전으로 이끈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과 검찰에서 일어나고 있는 추태를 보면 국가수호자 다운 파워엘리트가 몇이나 되느냐.

한국의 파워엘리트라는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육체는 현대에 있으면서 정신은 과거에 살고 있다. 자신들이 독재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과거의 산물임을 망각하고 있다. 또한 권력행사의 기본적 태도를 가치와 규범을 존중하려는 의지는 없고 권력유지의 확대방법에만 전념한다.

게다가 파워경쟁과 유지에서 핵심적 패턴의 하나는 배타적 연고주의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지연과 학연 등으로 상호간에 NO(거절)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개혁의 의지도 형식적이다. 개혁을 외치면서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에 더욱 집착하는 모습을 범한다. 따라서 권력행사의 정직성 공정성 투명성 효율성을 확보할 수가 없게 된다.

안영섭교수는 현 상태로라면 경제가 겨우 회복세로 돌아섰지만 위기는 언제라도 다시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파워엘리트는 이 나라의 장래를 책임지고 있다는 점을 새삼 통감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사진캡션 ; 99년은 추태와 잡음으로 얼룩진 한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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