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호]

[원로 정치논객칼럼]

가발에서 세계 제일 큰 배까지

朴正熙(박정희) 執念(집념)의 貿易大國(무역대국)

MB는 역사에서 길을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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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鄭在虎 (정재호 헌정회 대변인, 9·10대의원, 전 경향신문 정치부장, 논설위원)

헐벗은 산하. 춥고 배고픈 백성의 나라였다. 오죽하면 꽃피는 봄이 그렇게도 원망스러웠을 고.

춘삼월(春三月)은 오랜 세월 춘궁(春窮)의 대명사로 통했다. 보릿단 태질 할 시점 아직 멀었는데 곳간은 벌써 텅 비어 있었다.

보릿고개의 악몽에 가위눌린 삶이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는 속담을 받아들이는데 길들여진 민초들. 자학(自虐)의 늪은 깊었다.

박충훈 장관에게 1억달러 특명

박정희 장군의 5·16은 수수백년 대물림의 ‘빈곤한’(貧困恨)을 떨쳐버리려는 사생결단의 ‘무인봉기(武人蜂起)’다. 1964년 초봄 대통령 박정희는 “돈이 될 만한 것은 죄다 내다팔자”고 경제 각료회의에서 독려한다. 지하자원 볼품없는 나라의 살길은 오직 ‘수출’밖에 없다는 게 대통령의 흔들림 없는 생각이었다. 상공부장관 박충훈(1964-1967재임)을 따로 불렀다.

“대통령으로서 내가 임자를 책임지고 밀어 줄 테니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올해 안에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라”고 엄명한다.2012-01-19_171740.jpg

며칠 뒤 박정희는 박충훈에게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면 화살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을 담은 ‘일념통암(一念通巖)’이라는 친필 휘호를 보냈다. 상공부 고위관리들 집무실에 미군들이 사용하던 야전 간이침대가 마련됐다. 밤샘 근무를 하기 시작한 그때 그 무렵의 야근풍속도다. 그해 11월 30일 1억 달러 수출이 달성된다. 박정희는 이날 ‘수출의 날’로 선포한다. 박충훈은 훗날 경제부총리로 중용된다. 이땅의 수출사(史)는 한마디로 땀과 눈물로 점철된 겨레의 애환을 고스란히 각인하고 있다. 아낙네와 낭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밖으로 내다팔았다. 등푸른 살찐 생선, 듬실하게 잘도 생긴 송이버섯, 싱싱한 빛깔 삭을세라 서둘러 부자 나라로 실어 나르기 바빴다.

우리네 밥상은 온통 ‘풀밭’이었다. 고기반찬은 과욕이었다. 허리띠 졸라맨 사람들의 야윈 얼굴은 그래도 밝았다. 내일에 희망을 걸쳐 놓았기 때문이었다.

수출 100억달러...임자의 덕분이요

귀하디 귀한 달러, 생김새도 낯선 돈이 신기했다. 접고 펴고 하니 심히 구겨져 다림질했다는 우스갯소리들이 돌았다. 2012-01-19_171753.jpg

서양(西洋)돈에 반가움과 서러움이 비빔 되어 끝내 울어버린 가발공장 시골소녀의 이야기는 사람들 가슴 한가운데에 진하게 박혔다. 본디 한국인은 한(恨)을 신명으로 승화시키는 역전(逆轉)의 기질을 품지 않았던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근성을 체질화시킨 본보기들을 역사에서 익혔다.

모두가 맨주먹 맨발로 앞만 보고 달렸다. 박정희의 수출드라이브가 탄력을 받았다. 1977년 11월 마침내 100억 달러 수출이 달성됐다. 제13회 수출의 날 기념행사장에서 박정희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를 토해낸다.

“국민여러분, 오늘은 민족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날이 될 것입니다. 누가 우릴 못사는 민족이라 했습니까”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장충체육관 장내에 울려 퍼졌을 때, 사람들의 얼굴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날 밤 박정희는 조촐한 자축행사를 파한 뒤 청와대 가족식당에 걸려있는 故 육영수 여사 초상화 앞에서 말한다. “임자 우리가 드디어 100억 달러 수출을 해냈소. 자랑스럽소. 저승에서 굽어 살펴준 임자 덕분이요…” 3년 전 부인과 사별한 60세의 홀아비 박정희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옆자리에는 25세의 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서 있었다.

전세계 9번째 1조달러클럽

그로부터 34년만이다. 2011년 12월 5일 세모의 문턱에서 대한민국은 엄청 큰 또 하나의 놀라운 기념탑을 세운다. 가발에서부터 세상에서 제일 큰 배를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무역총량 1조 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수출 5,153억 달러 수입 4,855억 달러 2012-01-19_171801.jpg 흑자규모 298억 달러. 한 나라의 살림살이 이만하면 보기에도 넉넉한 부윤옥(富潤屋)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 미국 독일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네덜란드에 이어 아홉 번째로 무역규모 1조 달러 클럽에 합류했다. 말이 쉬워서 1조 달러다. 얼마나 큰돈인가. 어떻게 생겼는가. $1에 동그라미 12개를 나란히 세워놓고 보라. 그 덩치를 어렴풋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1조 달러 돌파소식에 무역협회로 달려가서 “기업을 했던 사람으로서 감개무량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무역대국’ 실현을 노래하는 잔치 한마당을 펼쳐 한 아름 신바람을 가슴으로 들이마셔도 시원찮은 마당이다. 이럴 때 시도 때도 없이 흔해빠진 그 ‘촛불’ 켜들고 광화문 시청광장으로 쏟아져나가면 어떤가. 한국인에게 신바람은 고단한 삶을 지탱해 온 심지(心志)의 버팀목이다. ‘신바람나면 여염집 아주머니도 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가뜩이나 신명과 감동이 얼어붙은 세밑이다. 나라에 경사 났는데도 축제분위기가 제대로 뜨지 못하고 냉랭한 것은 정치판을 덮친 찬바람 탓이다. 집권 한나라당은 지휘탑이 무너진 채 환골탈태의 아픔과 씨름하고 있다. 언필칭 야권의 맏형을 자처하는 민주당도 뿌리 깊은 내분으로 고달픈 앞날이다.

하나같이 대의(大義)는 실종되고 잔꾀 굴리는 ‘신모술(身謀術)’만 형형색색이다. 싫든 좋든 공동체 안정의 기둥뿌리는 정치의 몫이다. 그 중심에 대통령이 있다. 난세(亂世)일수록 대통령의 리더십을 목말라 하는 소이다.

대통령 정치는 달라야 한다

한국 사회는 칭찬에 인색하다. 신명에는 후하되 칭찬에 짜다는 것은 ‘어기여차’의 추임세가 부실한 사회적 풍토가 까닭일 수도 있다. 2012-01-19_172029.jpg

‘고래도 칭찬하면 춤춘다’고 했던가. 대통령도 희 노 애 락의 상정을 지닌 사람이다. 박수 받고 싶을 때 쓴 소리 나오면 맥 풀릴 수도 있을게다. 억울한 삿대질에 심기가 불편하여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경우도 있을게다. 칭찬이 푸짐할수록 소통의 숨통은 넓어진다. 겉으로 보기에 오늘의 대통령은 만만한 자리다. 대통령을 향해 팔을 걷어붙이는데 여야의 구별이 모호할 정도다. 대통령을 걸고 넘어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돌림병’이 창궐한다. 딱히 유권자의 시선 끌기 경쟁이다. 책잡아 퍼붓는 비난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비평은 사뭇 다르다. 선진국의 조건은 비평문화가 비난문화보다 한수 위에 있다는 점이다. 비난에도 최소한의 품격을 가공(加工)해야 한다. 정치인은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달라야 한다. 조석으로 춤추는 지지율에 집착하노라면 큰일을 그르치기 쉽다.

자질구레한 소절(小節)에 매달리지 말고 대국(大局)과 맞짱뜨는 통 굵은 ‘배포’가 아쉽다. 우선 국법과 맞서는 거리의 폭력부터 제대로 다스려야 한다. 앞이 캄캄하면 역사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허허벌판에서 무역 대국에의 길을 뚫고 판을 넓히고 틀을 굳힌 박정희 리더십을 읽어서 손해 볼 것 없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나무를 보기보다 숲을 보겠다. 나무는 오늘이요 숲은 내일이기 때문이다”

오늘에 되살려야 할 뜨거운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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