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호]

80년대 대학 운동권

‘주사파’에 놀아났다

우종창 취재기, ‘강철서신’ 김영환 이야기

김일성 면담 교시 받고 귀환 후 사상전환

80년대 대학가 2012-06-18_092651.jpg 주사파의 대부이던 김영환씨가 중국 단둥에서 ‘국가안전위해죄’로 구금되어 있다는 소식에 여러 가지 충격파가 느껴진다. 김씨가 북한을 다녀와 전향하여 지금은 북한인권운동을 열심히 벌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북측에서 보면 ‘강철서신’으로 김일성의 교시를 받은 김씨는 배신자로서 처단의 대상이다.

이 때문에 중국이 김씨를 구속한 배경에 북한 김정은 정권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의심될 수밖에 없다.

주사파의 교범 김영환의 ‘강철서신’

조선일보, 주간조선 기자 출신 우종창씨의 취재기 ‘권력의 역설’(2011.7) ‘김영환과 강철서신’ 편에 80년대 주사파의 행각이 자세히 나온다.

김영환씨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1982년 서울법대에 입학한 후 김일성 주체사상에 빠져 대학가의 주사파 대부로 암약했다. 그의 필명 ‘강철’서신의 글이 주사파들의 교범으로 위력을 떨치자 공안당국에게도 신비의 인물로 추적의 대상이 됐다.

김영환씨는 대학 1학년 때 일본 교과서왜곡을 규탄한 반일데모에 가담하여 관악경찰서에서 반성문 작성을 요구했을 때 거부하여 15일간 구류처분을 받고 정학됐다. 이때 구로공단 ‘노동야학’에서 노동관계법을 교습시키다가 복학하여 주체사상에 몰입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의 독재에 항거투쟁하던 운동권에서 김씨는 미국 식민지론을 제기하며 반미투쟁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민중과 지배계급간 투쟁을 연구하기 위해 단재사상연구회를 결성하여 사실은 북한을 연구하며 단파라디오를 통해 주체사상을 청취했다.

1989년 대학가에 ‘반제청년동맹’이 결성되어 반미 민족해방 투쟁을 위한 구국 성전(聖戰)을 선언했다. 반제청년동맹은 김일성이 중국 길림에서 결성한 지하 청년혁명조직 이름을 그대로 계승하여 ‘김일성주의 청년혁명조직’임을 강령에 담았다. 이때 반미 투쟁 유인물을 김영환씨가 작성했다.

거물간첩 윤택림 만나 거액 공작금

반제청년동맹은 김씨와 서울법대 동기인 하영옥씨가 주도했다. 하씨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김영환씨와 함께 고전연구회의 지하 서클 고정 멤버 단짝이었다.

하씨는 대학 3학년 때 성적불량으로 제적되어 방위병 근무를 마친후 반월공단에 위장취업하고 집에서 북한의 ‘구국의 소리’ 방송을 열심히 청취했다. 1987년 재등록하여 졸업한 후에는 속셈학원 원장, 수학 과외교사 및 고시촌 등으로 전전하다 반제청년동맹의 길로 나섰다.

이 청년동맹은 중앙위 산하에 영남위, 경기남부위(하영옥), 전북위(김영환) 등을 두고 반미구국 투쟁을 벌였다. 이때 북에서 거물간첩 윤택림을 남파하여 김영환씨와 접선했다.

윤택림은 북의 대외연락부 5과장으로 다섯 차례나 남파된 1급 공작원으로 영웅메달, 김일성훈장, 국기훈장 등을 받은 인물이다. 윤은 1989년 7월 한겨례사회연구소 연구원 ‘김철수’라는 위장신분으로 노량진 공중전화 박스에서 김영환씨를 만나 “나는 북에서 왔다”고 신분을 밝혔다. 이때 윤이 공작금 900만원, 무전기와 난수표 및 비상용 호출부호 10개를 부여한 후 매달 4일에는 북의 지령을 하달했다.

그 뒤 북은 방송을 통해 김영환에게 입북토록 지령하여 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 조유식을 대동하고 입북했다.

조유식과 함께 잠수정편 월북

조유식은 경남 진해 출신으로 나중에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은 골수 주사파이다. 그는 82년 2월 특사로 풀려나와 울산 대성개발사 용접공으로 취업하여 현대중공업 노조원들의 의식화 교육을 시키다가 다시 검거되어 징역 1년6월,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은 중전과자이다.

그는 92년 3월에는 월간지 ‘말’의 기자로 ‘지금도 미 핵잠수함이 들어온다’, ‘북한이 동아시아 새로운 성장지대로 떠 오른다’, ‘북한군의 판문점 진입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대북보고용 기사를 계속 집필했다. 이 때문에 북측에서 “신분노출이 우려되니 보안상 조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김영환은 91년 5월 16일, 조유식과 함께 강화읍 건평리 해안에서 북한 잠수함 편으로 6시간만에 황해도 해주에 2012-06-18_093145.jpg도착했다. 호송 책임자가 대남테러부서인 사회문화부 공작원 김동식이었다. 김동식은 뒤에 체포되어 국정원의 대공부서에 근무하는 신분으로 역전됐다.

두 사람은 헬기편으로 모란초대소에 도착하여 ‘서울 불바다’를 협박했던 조평통 안병수와 통일방향에 관해 논의했다. 홍콩에서 최은희씨를 납치했던 사회문화부장 이창선은 반제청년동맹을 ‘지하 혁명당’으로 발전시키라고 지령했다. 그 뒤 김영환은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했지만 조유식은 별도로 사상교육과 통신교육을 받았다.

김일성면담 교시 받고 귀환

김영환씨는 당시 김일성으로부터 남조선 혁명을 어떻게 추진해야 하느냐는 훈시를 들었다. 김일성이 남조선 인민 1,000만명만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혁명을 이룩한다고 강조했다.

김영환씨는 입북 15일만에 남포항에서 공작선 편으로 제주도 서귀포 해안으로 귀환했다. 가명 ‘김영수’ 이름의 주민등록증으로 대한항공을 이용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김영환씨가 평양을 다녀온 후 주사파 내부에서 신분이 상승하여 반제청년동맹 총책에 올랐다. 이때 92년 대선 관련 북의 지령이 강력했다.

강화도의 무인함을 통해 공작금과 권총, 무전기를 보내와 조유식이 찾아왔다. 이때 공작금 40만 달러로 민혁당을 결성하여 조직을 관리하고 지방선거와 총선자금으로 이용했다. 95년도 지방선거 때 6명을 지원하여 경남도 의원 김창현씨가 간첩자금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이 무렵 김영환씨는 변심하여 전향의 뜻을 밝혔다. 운동권에서 한발 물러나 은둔하면서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선전은 거짓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말’지 인터뷰 후 민혁당 해체선언

김영환씨는 95년 4월 ‘말’지 인터뷰를 통해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볼 수 없다’, ‘북한 추종주의는 안된다’고 말했다. 계간지 ‘자주의 길’에는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꿔야 한다’고 기고했다.

김씨는 북한과 연락을 끊고 97년 9월에는 민혁당 해체를 선언했다. 이때 배신자라는 논쟁이 벌어졌다. 동지 사이인 하영옥씨가 반기를 들고 “북과의 연락망을 내놔라”고 졸라댔다.

이 무렵 안기부가 남한 고첩들을 검열하기 위해 내려보낸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을 검거했다. 부부간첩은 거제도로 상륙하여 경북, 경기 일대를 순회하다 울산 민족통일위원장 정대연을 만났다. 이때 정대연은 이 부부간첩을 안기부 공작으로 오인하여 당국에 신고한 후 기자회견을 통해 “안기부가 대선을 앞두고 간첩단으로 꾸며냈다”고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안기부가 부부간첩을 체포하자 여간첩 강연정은 화장실에서 청산가리로 음독자살했다. 이 부부간첩 사건으로 서울대 사회학과 고영복 교수가 고첩임이 드러났다. 또 김영환이 민혁당의 총책임이 확인되어 자택을 수색하자 김씨는 이미 중국으로 탈출했다.

콧수염 간첩 ‘진운방’과 하영옥

이 무렵 북한은 공작원 진운방을 말레이시아인으로 위장 남파했다. 진운방은 간첩 깐수식으로 콧수염을 길러 아내 종옥청과 딸과 함께 종로에 주소를 두고 논현동의 말레이시아 식당 ‘삿떼리아’와 명륜동의 ‘마크 인터내셔널’ 회사를 운영했다. 2012-06-18_093336.jpg

진운방이 신분이 안정됐다고 보고 ‘말’지 기자로 청와대를 출입하는 김경환씨를 포섭, 암약하고 있을 때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거물 여간첩 이선실 사건이 터졌다. 이에 놀라 진운방은 황급히 홍콩으로 탈출하면서 전세집 주인에게 가방과 서류 등을 DHL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진운방이 짐을 받은 후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이 죽고 자신도 다리를 다쳐 귀국 못한다고 전화한 후 연락을 끊었다. 이때 북은 김영환에게 안전을 위해 안락원(진운방)을 철수시켰다고 알려주고 교통사고로 위장했다고 귀띔했다. 그 뒤 진운방은 콧수염을 깎고 97년 10월 여수시 돌산읍 해안으로 침투하여 ‘원진우’라는 주민등록증으로 안양역 부근 여인숙에 은신했다.

그가 ‘말’지 기자 김경환에게 하영옥 연락처를 물어 97년 11월에 만나 민혁당의 재결속을 약속했다. 또 원진우는 김정일이 하영옥에게 ‘광명성’ 암호명으로 민혁당 총책으로 추인했다고 일러주었다. 하영옥은 자신의 연락책으로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88학번 심재춘을 소개했다.

잠수정 격침 인양으로 일망타진

심재춘은 서울대 총학생회 사무국 간부로 각종 시위에 앞장선 후 졸업후에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시간강사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간첩 원진우가 하영옥과 심재춘에게 무전기와 난수표 및 지령 송수신 방법을 가르쳐 주고 한국돈 500만원, 일화 50만엔을 공작금으로 전달했다.

하영옥이 원진우와 함께 97년 11월 강화도에서 월북하려다가 잠수정이 발각되어 실패했다. 다음달에는 하영옥을 대신한 심재춘이 원진우와 함께 여수 해안에서 월북하려다가 북한 잠수정이 해군에게 격침당했다. 이듬해 해군이 잠수정을 인양하고 보니 비닐에 싸인 대북보고 문건 속에 민혁당 관련 중요사항과 원진우, 하영옥, 심재춘 등의 신분이 완전 노출됐다.

이 사건과 별도로 이 무렵 부산경찰청이 민혁당 영남위원회 실체를 파악하여 울산 동구청장 김창현이 간첩으로 체포됐다. 이때 김영환씨는 중국에 은신하고 있었다.

월간조선 조갑제 대표가 99년 월간조선에 강철서신 김영환씨 등 주사파의 대전환을 보도함으로써 김씨가 귀국하는 계기가 조성됐다. 김영환씨가 2012-06-18_093629.jpg 서면 인터뷰를 통해 “김정일정권 타도를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면서 사상전환을 약속했다.

김영환씨가 귀국허용을 당국에 탄원하여 99년 7월 귀국하여 국정원 당국자와 만나 전향의 뜻을 밝혔다. 하영옥, 조유식, 심재춘, 말지 기자 김경환 등이 체포됐다. 민혁당 중앙위원으로 활약하다 사법고시에 합격했던 박 모 변호사는 자수하여 체포됐다.

그 뒤 김영환씨는 국정원의 심사 도중 심경변화로 탈출을 기도한 사건이 있었다. 황장엽씨의 설득으로 김씨는 반성문을 쓰고 전향했다. 그러나 하영옥은 끝내 전향을 거부했다.

김영환 스토리를 취재한 우종창 기자는 386운동권의 투쟁과 변신, 전향과 배신과정 속에 고뇌의 모습도 역력하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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