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취재반세기 … 묵은 기자 수첩⑤

종군기자가 겪은 6.25

글 / 李蕙馥(이혜복 대한언론인회 명예회장)

피난못가 인민재판 목격

6·25남침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를 잊을 수 없다. 불과 사흘만에 서울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 꼬박 석달남짓 적치하에서 숨어살던 모든 사람들도 꼭같은 심정이 아닐까?

6·25그 날 낮 나는 전선출장명령(당시 京鄕신문기자)을 받고 즉각 동두천으로 떠났다. 전선 지휘관이 초전에 사로잡은 인민군 병사와 노획무기를 보여주며 전황을 설명하는 자신있는 모습에 크게 고무됐고 편집국에 돌아와서 “이 기회에 북진통일해야 된다”는 주관까지 곁들여 단숨에 써낸 기사가 그 날 일면톱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악화, 28일 새벽 집(명륜동)앞 큰 거리는 인민군 탱크부대가 이끄는 침공부대로 꽉차 있었다.

27일밤 ‘서울을 사수한다’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육성방송(대전에서 녹음된 것)을 철석같이 믿고 “유엔군이 참전한다”는 소식도 들려와 설마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하룻밤 더 머문 것이 실책이었다.

당시 국군은 탱크 한대, 전투기 한대도 없는 경장비의 8개사단 병력뿐.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인민군은 2백여대의 탱크와 중포, 전폭기까지 갖춘 10개 사단에 해방전사 수만명까지 편입되어 있었으니 김일성(金日成)이 군사모험에 나선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물밀 듯 서울도심으로 향하는 침공부대를 바라보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살펴보려 그 날 낮 나는 시내를 한바퀴 돌아 저녁 무렵 집 근처 성균관 앞 광장에 왔을 때 “인민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중속을 비집고 지나갈 수도, 되돌아설 수도 없는 묘한 분위기속에서 나는 재판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반동’으로 지목된 40대 남자(鄕保團 간부)를 몇 마디 심문한 끝에 ‘재판장’이 “이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물어보자 군중속의 한 젊은 여자가 “총살에 처하라”고 크게 외쳤고 여기저기서 “옳소”하는 고함과 박수가 터지자 아무런 변론도 없이 ‘총살형’ 판결이 선고됐고 그 자리에서 형은 집행되었다. 재판이란 허울뿐,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이는 요식행위일 뿐이라고 느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나는 치가 떨렸다.

머슴이 인민위 부위원장으로 상전

공비토벌작전 등에 자주 종군했던 나는 “반동기자”로 지목될게 뻔하였다. 며칠은 약수동(고모댁)에 피했다가 7월 초순 나는 옷 몇 가지만 자전거에 싣고 시골(양평군 옥천면 향교마을)로 떠났다.

10여년전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하신 후 고향에 형수님과 어린 조카들만 살고 있어 의지할 만 하였다. 그 집은 산밑에 외따로 있어 멀리서도 누가 드나드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위치였다. 간혹 누가 찾아오면 뒤미쳐 “지금 누가 다녀갔느냐?” 확인하는 것으로 보아 내가 감시대상인 것을 알 수 있게 됐고 그래서 집안에 박혀있거나 논물을 댈 때 피를 뽑을 때 말고는 대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머슴은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라 밥만 먹으면 “회의한다”고 가버리고 서툴지만 농사일은 내 몫이 되었다. 주객이 전도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고 그처럼 죽어지내는데도 인민위원회 사람이 불쑥 나타나 내 동정을 살피기도 했다.

한번은 分駐所(파출소격)에 불려 나가보니 “당신 大東신문(해방후 극우신문) 기자 아냐?” “왜 시골 내려와 있소?”하고 다그쳤다. 누군가 내가 신문기자였다고 알려준 모양이었다. 나는 “맹장염수술자리가 덧나 힘을 못쓴다”고 넌즛이 수술자리(8·15직후 급성맹장염 수술시기를 놓쳐 복막염이 겹쳐 帝王切開한 것처럼 흉터가 컸음)를 보여주었다. 마큐롬을 바르고 반창고까지 붙여 합창안된 것같이 보였으니 의사가 아니고서는 판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행정계통이 바로서면 알게될 터이니 지시를 기다리라”며 풀어주었다. 내가 염려한 것은 시골에 내려올 때 종군기자증과 군복, 군화까지 옷보따리에 숨겨온 것을 벽장 깊숙이 두었지만 혹시 “집을 뒤지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태산같았으나 요행 그런 일만은 없었다.

국군 6사단 19연대 수색대 보고 만세

피난생활은 불안과 초조였다. 아침 저녁으로 인민군 노래가 들리고 반동이라는 소리도 들렸다. 그렇지만 집회장소나 영화감상모임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8월초쯤 B29의 잇따른 폭격으로 중앙선 양수리 철교가 완전히 끊기자 인민군은 뗏목으로 부교를 놓고 낮에는 돌로 지질러 물속에 잠기게 했다가 밤이면 다시 떠올려 양주쪽까지 실어온 군수물자를 양평쪽 철로까지 옮기는 작업에 주민들을 강제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몸이 아프다고 빠졌지만 결국 면인민위원회까지 불려나가 “무조건 나가 일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틀에 한번, 왕복 60리를 오가면서 밤새도록 군량미와 포탄을 등짐으로 저날러야 했다. 공습 때문에 밤에만 일하고 날이 새면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국도를 따라 북상하는 인민군 부상병의 대열과 자주 마주쳤다. “동무들은 어데로 가시오?”하고 물으면 “북녘으로 갑네다” 꼭같은 대답이었고 “야전병원에 왜 입원하지 않느냐?” 물으면 “약이 있어야 되오”하고 한숨짓는 모습이 처량했다. “그런데 어디서 다쳤소?”하면 “영천전투”(※ 인민군 15사단이 괴멸된 전투)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경북 영천에서 큰 전투가 있었고 “보급이 엉망이구나”하는 짐작도 들어 국군이 머지 않아 북상할 것으로 짐작했다.

한 1주일후,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인민군이 온데간데없이 싹 사라졌다. 동네사람말로는 북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때쯤 “국군이 수원 가까이 왔다”는 귓속말이 퍼졌고 서울쪽에서 은은한 포성이 들리더니 서쪽하늘 높이 치솟는 섬광도 보였다. 그때가 아마 인천상륙작전이 끝나 9·28 서울수복작전이 진행되던 무렵이었을 것이나 정보가 단절돼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 무렵 하루는 벼를 베어 탈곡한 다음, 물방앗간에서 벼를 찧고 있는데 가까이서 총성이 들렸다. 뛰쳐나가 보니 국군부대가 마을 어귀까지 와 있었다. 모두들 만세를 부르며 다가가 반겨 맞았는데 그 부대는 국군6사단19연대 수색대, 당시의 수색대장은 이 소위였다. 숨어있던 사람들 모두가 뛰쳐나와 국군만세를 외쳤다. 그동안 반동으로 점찍혀 인민위원회에 잡혀간 사람들이 학살당한 후 “한강 모래밭에서 수없이 불태워졌다”고 울부짖는 유족들이 나타났고 미쳐 도망 못간 부역자들이 보복당하는 유혈참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평양탈환 제1보의 감격

내가 신문사에 복귀한 것은 10월 중순, 그때는 이미 사원들이 모두복귀, 신문이 발간되고 있었다.

그런데 요행 피난갔던 ‘도강파’ 중에는 뒤에 처졌던 ‘잔류파’를 “그동안 부역이나 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눈빛이 따가웠다. 나는 빨리 전선에 종군, 멋진 보도활동을 하려고 미리 출장명령을 받아 연일 국방부정훈국에 대기하게 되었다. 그러던 10월 17일 오후 국군 1사단 정훈부장 안중식(安重植) 소령이 정훈국에 들려 “평양에 가려면 이차를 타라”고 하지 않는가?

京鄕에서 박성환(朴聖煥) 기자는 사리원쪽으로 북상하는 부대를 따라, 이시호(李始鎬) 기자는 원산쪽으로 북진하는 부대를 따라 함정편으로 전선으로 떠난 터였다. 나는 운이 좋았다. 그날 1사단정후부 짚차에는 안 소령, 노영서(盧永瑞) 소위, 그리고 두 기자(서울신문 金禹鎔, 동아일보 金鎭燮)도 동승, 일로 북으로 달렸다.

해질 무렵 고랑포에서 38선을 넘어 市邊里 경유 新溪까지 짚차로 줄곧 달리는 동안, 지나는 마을마다 태극기를 흔들며 우리를 환영하는 북한동포, 치안대들, 그리고 따발총 등 무기를 한아름씩 안고 손들고 나오는 인민군 귀순병사들, 북진부대가 밀고 올라간 진공지대에 아직도 인민군 패잔부대가 웅성대고 있었지만 이미 기세가 꺾여서인지 홀로 북진하는 우리 짚에 도전해 오지는 못하였다.

19일 상오 10시 40분쯤 제 1사단 주력이 선교리에 도달, 본평양쪽에 포격을 시작했을 때 총탄사이를 뚫고 “국군만세”를 부르며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평양시민들의 모습에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큰 길목 건물마다 걸려있던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 그리고 독전구호를 주민들이 달려들어 뜯어내 팽개치고 짓부수는가하면 길목을 가로막은 바리케이드를 걷어치우기도 하고 학살당한 가족들의 유해를 가리키며 울부짖는 모습, 그 모두가 역사적인 장면이었으나 그것을 담을 카메라도 비디오도 없던 시절, 현지에서 송고할 방법이 없었다.

국군 1사단 주력이 대동강 도강에 나설 무렵 황주쪽에서 북상한 미제 1기갑사단장 ‘게이’ 소장이 선교리에 도착, 백선엽(白善燁) 1사단장과 역사적 악수를 나눴을 때 UN종군기자들이 평양돌입 첫 모습을 우리에게 묻기로 했다. 백 장군의 특명으로 짚차 한 대를 배정받아 어둠이 다가올 무렵, 나는 서울로 향해 달렸는데 그 차에는 정국은(鄭國殷)씨도 동승하였다.

김진섭, 김우용 기자는 남아서 본평양 돌입기사를 추가 취재, ‘풀’하기로 하고 나는 평양을 입제 1보를 서울에서 ‘풀’하기로 약속했다. 밤새도록 달려 20일새벽 서울에 도착한 나는 그날낮 ‘평양돌입 제1보’가 실린 경향신문을 싣고 되짚어 북상, 38이북 우리동포들에게 8·15이후 처음 남쪽의 민간신문을 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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