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갈등의 경제학

글/ 權和燮 편집위원(권화섭 전문화일보논설위원)

현대는 갈등의 증폭시대다. 세계가 다 그렇지만 한국만큼 그 정도가 심한 나라는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상황이 이처럼 심각한데 우리 자신은 그 갈등을 다스리는데 너무나 미련하고 우둔하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의약분업 파동과 금융노조 파업 사태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벼랑 끝 줄다리기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로가 아찔한 절벽 위에서 죽자살자 줄을 잡고 당기는 것이다. 쌍방이 그처럼 당기다 보면 그 줄은 필경 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둘은 전혀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80년대 미국경제와 ‘제로섬 사회’

오늘날 미국은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고 있는 나라다. 그렇지만 1970년대에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거치며 미국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의 인플레이션) 현상에 빠져있을 때 MIT의 레스터 서로우 교수는 ‘제로섬 사회’(1980)에서 다음과 같이 미국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미국의 경제문제는 해결 가능하다. 이들 문제의 대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결방안이 있다. 다만 이러한 해결방안에는 누군가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런 손실을 스스로 짊어지려 하지 않으며 또 미국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짊어지도록 요구할 수 있는 정치적 과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의약분업 파동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담보로 의사들과 약사들이 벌이는 벼랑 끝 줄다리기다. 금융노조 파업사태는 국가경제의 혼란과 국제신인도 추락을 담보로 정부의 고질적인 관치금융과 부실화된 금융기관들이 노동조합과 벌이는 벼랑 끝 줄다리기다. 국민들의 입장에서 두 가지가 똑같이 참으로 우둔하고 구역질나는 싸움질이다.

이것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우둔한 싸움이다. 또 싸우는 목적이 오로지 자기 잇속 차리기 위한 것이니 구역질나는 싸움이다. 그런데도 1970년대의 미국사회처럼 어느 누구도 조금의 손해를 보지 않겠다고 벼랑 끝 줄다리기에 열중이다.

벼랑 끝 줄다리기는 제로섬게임 중에 가장 어리석은 유형의 게임이다. 아무리 상대방이 못미더울지라도 벼랑 위에서는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십중팔구는 둘 다 벼랑 밑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그런 벼랑 끝 줄다리기를 연일 벌이고 있다. 의약분업과 금융개혁만이 아니다. 정치, 사회, 교육, 문화, 기업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우리는 그러한 극렬한 제로섬게임을 목격한다.

벼랑 끝 줄다리기

의약분업과 금융개혁에 관한 정부의 의지는 철벽처럼 단단하다. 또 최악의 의사파업도 수습되고 금융노조 파업위기도 잘 넘긴 만큼 정부는 스스로의 강경정책에 한층 자신감을 가질만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의약분업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의사들이 흔쾌히 참여하지 않는 의약분업은 그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들고 약국에 갔다가 헛걸음 친 환자들이 다시 병원에 와서 약을 달라면서 항의하는 모습은 의약분업 시행과정에서 정부의 과욕과 준비부족, 의사들의 억지와 약사들의 태만을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금융개혁은 한국경제를 건실하게 만드는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그 금융개혁은 금융기관 통폐합과 인원정리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관치금융을 당장 그만두고 금융기관들이 독자적으로 시장원칙에 따른 충실한 경영을 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한 과제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떠나 우리는 서로우 교수가 ‘제로섬 사회’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다음의 충고를 진지하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에는 진실로 단 한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것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누군가의 소득을 깎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로섬게임을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약 그것을 배우지 못하거나 혹은 제로섬게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한다면 이는 단지 몰락을 기다리는 결과가 될 뿐이다.”

제로섬게임의 해법

그러면 제로섬게임은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이를 위해서는 첫째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기본적으로 제로섬게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기적으로 사회적 발전은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혜택을 볼 수 있는 이른바 윈-윈 게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사회적 현상은 거의 대부분 제로섬게임의 형태를 취한다.

둘째 제로섬게임을 현명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나의 주장과 요구는 정당하고 상대방의 주장과 요구는 무리라는 이분법적 접근을 버려야 한다. 제반 사회문제, 특히 경제문제에는 정답이 없다. 정치경제학의 기본과제가 이해관계의 조정이며 소득분배의 문제인 것이다.

셋째 제로섬게임을 1회적 게임으로 하지 않고 연속적인 장기적 게임으로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회관계에서 어느 일방이 계속 손해를 강요당하는 게임은 지속될 수 없다. 그런 게임은 1회적 게임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계속 진다는 것을 알 때는 두 번 다시 게임에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제로섬게임을 지속하려면 한번 손해를 본 참여자는 다음 번 게임에서 필히 그것을 보상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즉 순차적 보상과 형평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우리사회는 이러한 원칙이 대단히 취약하다. 경험법칙상 한번 밀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통념이다.

제로섬게임을 할 줄 모르고 또 그 존재를 부정하는 우리사회는 수평적인 사회관계가 발달한 안정적 구조의 신뢰사회가 되지 못하고 수직적인 사회관계가 주류를 이루는 불안정 구조의 저신뢰사회로 남아있다. 이런 사회구조는 하이테크 신경제의 발전을 위해 결코 좋은 사회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신경제의 행동윤리는 신속성, 신축성, 신뢰성이다. 이것은 수직적 구조의 하향식 의사결정 방식으로는 도저히 소화해낼 수 없는 요건이다. 이 세 가지 요건 중에 우리가 가장 취약한 것이 신뢰성이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