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한국 고수와 일본 강수]

바둑과 정치와의 만남

오자와 대국 조훈현 9단 전화인터뷰

글/ 朴美靜 편집위원(전 조선일보 기자)

일본 정계 최고 실력자라는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과 조훈현 9단의 대국 장면 사진은 퍽 인상적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러 지난해 12월 내한했던 오자와 간사장은 청와대에서 이대통령을 만나기 직전 자청해서 조훈현9단과의 대국 자리를 가진 것이다.

‘외교’하러 온 일본 정상급 정치인이 프로바둑 기사와 한가하게 ‘수담(手談)을 먼저 나눈 것이 이채로웠다. 어쨌든 신문에 실린 그들의 바둑 대국 사진 덕분에 대한민국 바둑계의 ‘지존’ 조훈현 9단과 ‘기습’ 전화인터뷰를 했다.

열렬한 바둑 팬이라는 오자와 간사장은 한국기원이 조훈현9단을 추천해 마련한 이번 대국에서 4점 치수로 둔 ‘접전’ 끝에 245수만에 조 9단에게 7집 차로 승리(!) 했다고 한다.

<▲12일 오후 방한중인 오자와 이치로 일본 민주당 간사장이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
서 조훈현 9단과 바둑대국을 갖고 있다.>

오자와 간사장과 조훈현 9단 대국

내 손바닥 크기의 ‘대국사진’은 아주 진지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바둑 팬인 나로선 모처럼 ‘흐뭇한 상상력’과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었다.

정치와 바둑! 바둑과 인생! 이런 단어들이 뇌리를 스치자 신바람이 났다.

대한민국 최정상 바둑고수와 일본 정계 최고 실력자가 반상을 앞에 두고 진지한 ‘수담’을 나누고 있는 한 장의 사진에서 그야말로 ‘영감’을 얻은 나는 대번에 ‘생의 활력’을 얻었다.

조훈현9단은 56세 중년남성답지 않게 아주 맑고 정갈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순수한 20대 청년 같았다. 조9단의 바둑 스타일이 고려청자처럼 고고하면서 단아한 ‘귀족적 분위기’로 평가받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 역시 자신의 바둑스타일과 어딘지 비슷한 것 같다. ‘목소리는 마음’이라는 일본 속담이 떠올랐다. 50년 가까이 바둑 외길인생을 걸으며 ‘한국 바둑 최고 정상’에 도달했던 쟁쟁한 ‘바둑 황제’는 “지금도 바둑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 했습니다”라는 겸허한 소회를 말하기도 했다. 요즘 자신은 ‘승부’에서는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중이라면서 ‘후배’들의 활약을 대견해 하는 뉘앙스의 말도 했다.

“이번 대국은 조 국수께서 살짝 져 드린 거 아닙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유쾌한 어조로 “상상에 맡기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물론 나도 ‘대국의 승부’에 대한 심증은 확실하게 가지만 구체적 정황은 독자여러분들의 ‘즐거운 상상’에 맡기겠다.

조9단은 오자와 간사장의 인상에 대해 ‘장군감’ ‘보스 스타일’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바둑 스타일 역시 세력적이고 전투적이며 공격형이라고 소개했다.

조9단은 “바둑을 배운지 6년밖에 안됐다는데도 놀라울 정도로 잘 두시는 바둑 스타일이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꼬마들은 금방 늘지만 60대 후반 정도 연세에 그렇게 둔다는 것은 바둑에 소질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맥도 좋고, 행마가 상당합니다.” (오자와는 1942년생이다.)

대국을 마치고 조훈현9단은 이날 대국한 바둑판의 뒷면에 직접 글씨를 써서 오자와 간사장에게 전달했다. 한국기원에서는 공인 아마 6단증을 수여했다. 그는 “한국 제1의 프로 기사인 조훈현9단에게 바둑을 배워 감격스러웠다”는 답사를 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오자와 간사장은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만찬회동을 가졌다. 아마 낮에 둔 바둑 이야기도 화제에 올랐을 법하다.

아마추어 강6단이라는 오자와 간사장은 그날 대국장에서 기자들이 바둑과 정치의 닮은 점을 묻자 “바둑이나 정치나 넓게 보는 대세관이 중요하다. 오늘 바둑에서도 상수의 대마를 잡으러 가는 나쁜 버릇이 나와 바둑을 망칠 뻔했다. 고수인 상대를 인정했어야 했다. 정치 역시 상대를 인정하면서 넓게 봐야 한다는 면에서 바둑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원론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 요즘 그가 보여주고 있는 ‘대외교관(對外交觀)’을 반영하는 듯하다.

쇼군 스타일의 뚝심 정치가

조9단이 받은 인상처럼 오자와 간사장은 일본 텔레비전 사극에 나오는 ‘쇼군(將軍)’스타일이다. 실제로 그는 일본에서 ‘야미 쇼군(暗將軍)’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막후 실력자라는 얘기다. ‘야미쇼군’답게 오자와는 특유의 뚝심정치로 일본 정계를 흔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보도에 따르면 오자와는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의 천황(天皇·덴노) 면담을 무리하게 주선해 일본 궁내청의 반발을 샀다. 일본 3대 메이저 신문인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신문들도 일제히 “덴노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쓸 정도로 강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오자와의 ‘정치적인 카리스마’가 대단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는 방한 중에도 “사죄해야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말하는 등 ‘친한파’적인 면모도 과시했다.

그러니까 ‘오자와 바둑스타일’처럼 ‘대세’를 읽고 그에 따르려는 것이 그의 정치 스타일인 것 같다. 어쩌면 그의 정치는 바둑에서 ‘지혜’를 공급받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자신 ‘바둑’이 유일한 취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그가 드라마에서처럼 바둑 두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흥미로워 보였다.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에서도 여주인공 아츠히메는 주요한 정치적 이야기를 할 때 상대와 반상을 마주한 채 의견을 나누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바둑과 정치는 1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미지 면에서 상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둑을 좋아한다. 바둑에 관련된 이야기는 청탁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나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챔피언 이야기도 좋지만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던 패자들의 이야기에는 더 관심이 간다.

승자와 패자 모두 ‘품격 있게’ 이기고 졌다는 소식이라도 듣는 날이면 왠지 뿌듯한 마음마저 든다. 이런 바둑이야기는 우리네 인생에 넉넉한 여유를 선사해주는 것 같다.

<▲장고하는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

<바둑은 무한한 우주와 같다는 반상의 세계위에 19줄 날줄 씨줄 속에 숨어있
다는 무수한 비기(秘技)가 매력적이다.>

바둑의 한판 승부에서 느끼는 감동

축구가 젊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뿜어대는 힘찬 야성미로 나를 매료시킨다면 바둑은 19줄 날줄 씨줄 속에 숨어있다는 무수한 비기(秘技)와 광대무변한 우주와 같다는 반상의 세계를 날아다니는 바둑 명인들의 비장미 감도는 운명적 스토리가 매력적이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바둑대첩’ 이야기 중 ‘라이벌과의 운명적 대국을 하던 명인이 마지막 돌을 던진 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비극적 스토리는 처음 듣는 순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감동을 느꼈다. 요새도 가끔 그 얘기가 떠오르면 뭉클해지곤 한다.

그야말로 운명을 건 한판 승부에서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명인의 마지막 모습이 서늘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작은 바둑판에서 펼쳐지는 혜성처럼 나타난 새로운 자객과 기존의 막강 무림고수들의 한판 필살기! 서로 몰래 연마해온 비법으로 서로의 칼끝을 겨누며 촌각을 다투는 사투를 벌인다는 자체가 어쩌면 우리네 인생살이의 축소판이지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대한민국 바둑계의 지존으로 꼽히는 조훈현이나 그의 제자로 스승을 이긴 이창호, 그밖에 유창혁이나 이세돌 같은 거의 대중 스타급 바둑 명인들은 물론이고 별 알려지지 않은 프로바둑 선수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즐겨 읽곤 한다.

그렇기에 ‘조훈현VS 오자와’의 대국(對局)사진을 보는 순간 ‘생면부지’의 조훈현9단에게 전화를 걸어 단걸음에 인터뷰를 마쳤던 것이다. 그도 ‘기습적인 전화 인터뷰’에 잠시 놀랐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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