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나는 생각한다

글/ 趙源林(조원임 CPA, P&L Korea 대표)

서양 철학에 큰 영향끼쳐

학교를 다니면 이 말을 누가 했는지 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돼도 이 말이 자주 쓰여진다.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준 말 한마디다. 그 결과 현대 서구 문명의 개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당연하게 수백년간 이 말 한마디가 서양이건 동양이건 유명한 말이 되었다. 유명해진 이 말이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대하게 되면, 그래서? 라는 의문을 불러온다. 또 이 말은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머리가 쉽게 끄떡여지는 말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다르게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정쩡한 말이다. 말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어도 느낌으로는 반드시 찬성만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 까닭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자리하고 있는, 늘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잠재의식에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기에 그렇다. 즉 완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잠재 의식은 영원하다.

이 말을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갓 태어난 아기는 생각 자체가 없다. 그저 본능,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능력으로 어머니의 젖을 빨게 된다. 배부르고 편안하면 웃고 배고프거나 불편하면 운다. 아기가 웃고 우는 것은 하나의 신호이지 감정과 이성에 따라 슬퍼서 울거나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 점차 말도 배우면서, 생각이 늘어가게 된다. 이때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차츰차츰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기에 잠재의식이라고 하고 후천적으로 배운 말과 지식이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이라는 형태로 현재의식의 세계를 이루게 된다. 아직 생각이 없는, 그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어린 아기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생각 즉 사고 능력이 없어도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우리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밤에 잠을 잘 때 우리의 의식은 꺼진다. 그리고 늘 쉬지 않는 잠재의식이 본격적인 활동을 하면서 우리 몸의 이상이 있는 부분을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며 호흡, 맥박, 소화 등을 현재의식과는 상관없이 원활하게 하여준다. 또한 꿈을 통하여 우리의 고민에 대한 답을 주기도 한다. 잠이라는 것은 현재의식이 활동을 멈추고 잠재의식이 활발히 움직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간에도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역시 생각이 없어도 우리는 존재한다.

나는 누구인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에 나가 자리잡고 있다. 이 말의 또 다른 핵심은 남이 아닌 나에 있다. 인생이나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궁금한 것들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나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나에 대하여 우리는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 나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묻기는 쉬워도 대답하기는 간단하지 않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생각하고 말한다면 나는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진정한 나란 누구인가? 부모의 몸에 있던 생명의 씨앗이 나인가? 어린 시절의 아기가 나인가? 지금의 내가 나인가? 훗날 늙은 모습의 내가 나인가? 내 몸 안에 있는 생명의 씨가 나인가? 또 내 생명의 씨앗으로 태어난 내 아들, 딸이 나인가? 이렇듯 나에 대한 의문은 꼬리를 물고 끊어질 줄을 모른다.

진정한 나는 나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바로 그 힘, 즉 잠재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잠재의식은 현재의 나가 있기 전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또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는 나인 것이다. 또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 몸은 당연히 흙 속에서 분해되어 물질로서 볼 수 있는 나는 없어진다. 그러나 나의 생각을 포함한 모든 의식은 남게 된다. 육체를 벗어 던진, 의식으로서의 나가 남아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지어낸 주인공은 잠재의식의 세계를 가볍게 지나친 것 같다. 잠재의식의 존재를 모르거나 부정하면 위의 말은 맞는 말이 된다.

그러나 잠재의식이 우리 몸 안에 있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앞의 말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은 되어도 전적으로 맞지는 않다. 죽음이 무섭기에 위안을 삼으려고 억지로 사후 세계를 설정하거나 삶이 허무하기에 영원한 삶을 가상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인생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영원한 존재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알 수 있는 능력 역시 우리 몸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생각하든 안하든, 영원한 존재

바쁘게 사는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장터 생활 그 자체이다. 그 바쁜 가운데 인생을 생각하고 나의 근본을 살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당장 급하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남에게 구걸을 하는 나이건 최고 경영자위치에 있는 나이건 상관없이 우리는 살면서 이 삶의 진리가 되는 나를 찾아내야만 한다. 늦기 전에. 철들자 마자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삶의 진리는 이해하기는 쉬우나 그 진리를 실천하여 나의 것으로 만들기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힘은 들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 다른 일에 앞서서 나를 바로 알아야 하고 인생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가? 동그라미를 그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중심을 바로 잡는 일이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점이 없이 정확한 동그라미가 나올 수 없다. 원만하고 편안한 인생 역시 나의 중심이 바로 잡힐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나와 인생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삶의 어려움이 닥쳐와도, 잠시 흔들릴 수는 있어도 힘차게 바로 회복할 수 있는 복원력이 생기게 된다.

나와 인생을 정확히 파악하여 새로운 마음의 눈으로 나와 남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본다면, 태어나서 이보다 더 값있는 성공과 영광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업가에게는 정당한 부가, 정치가에게는 올바른 권력이, 예술가에게는 무한한 영감이, 직장인에게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저절로 따라다니게 된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말은 생각을 하든 안하든, 나는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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