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JP를 생각한다

글 / 宋貞淑 편집위원(송정숙 전 장관, 전 서울신문논설위원)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JP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최근에도 우리는 그런 질문을 받았다. 자민련의 원내 교섭 단체문제를 다루는 국회 운영위원회에 즈음하여 JP가 보인 또 한번의 국면 탈출 능력을 보며 또 한번 한탄 섞인 의문이 들었다.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주변에서도 그 반응은, 그에 대한 논평은 각각이다. 혀를 차며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JP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 노회성에 “넌덜머리가 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의 핵심동지이며 인척이 되는 ‘JP’를 왜 그렇게 여러 번 몰아냈을까. 물론 그 때마다 표면적인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에는 표면에 드러내지 않은 숨은 이유가 있게 마련이고 더러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 어쩌면 ‘JP’가 가진 어떤 면모를 ‘박통’은 그 때 이미 본 것은 아닐까. 음흉하도록 노회(老獪)하고 무섭게 질긴 생명력의 진면(眞面)을 그 때 본 것은 아닐까.

명장(名將)끼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적군의 장수일지라도 병법에 탁월하고 존경할 만한 인품을 지닌 장수라면 그와 더불어 정정당당하게 한판 승부를 벌이고 격렬한 전투 끝에 장렬하게 전사하는 일을 영예로 알 것이다. 그렇게 겨루고 깨끗이 승복을 하는 전투는 바람직하다. 명장이라면 그런 충동을 끊임없이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번번이 깃털보다 가벼운 한줌의 병력을 뒷손 안에 감추고 예측할 수 없는 술수로 국면을 탈출하는, 이 살아남기에 도통한 이 느글느글하도록 능청스런 달인의 면모를 박정희는 진작부터 알아보았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는 교지(狡智)와 천연덕스럽게 두꺼운 비위를 지니고 이기적 행적을 보이는 이 ‘혁명동지’와의 관계에 회의가 들었던 것은 아닐까. 어느 모로 보나 金鐘泌과는 많이 다른 朴正熙이므로 일찌감치부터 그것에 경계심을 느낀 것은 아닐까.

어쩌겠어, 그렇게라도…

선거운동 기간 동안에 어울리지 않는 호언장담을 하며 온갖 험구를 하다가 급기야 참패의 몰골을 당하고는 한 줌도 못되는 자민련의 몸체로 햇볕아래 나타난 그의 모습은 연민을 느끼게 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말했다.

“두고 보라. 그는 ‘JP’다. 무슨 짓인가를 또 할 것이다.”

과연 그는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고 또 한번 국면 전환의 묘기를 연출했으며 사람들은 “그것 봐!!”하고 혀를 찼다. 그것은 결과의 긍정이나 부정과 관계없이 외경(畏敬)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숙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JP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잖아. 어쩌겠어. 그렇게라도 해서 살고 봐야 했겠지.”

통일문제의 급격한 발전과 그로 인해 몰아치는 격랑에 머리채를 내둘리는 것 같은 혼란에 빠진 우리는 지금 날마다 공황을 겪는 느낌이다. 그런 와중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과 만난다.

“나는 그래도 JP를 믿었거든. 그가 있는데 안보문제를 잘못이야 끌고 가겠나, 하는 일말의 신뢰감을 가졌었거든.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것 보아서는 J P도 못 믿겠단 말이야. 알 수 없는 일이란 말야.”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래도 그들이 믿어온 ‘JP’가 자신들의 신뢰나 그들이 믿는 방식의 ‘나라 지키기’를 위해서 그래도 ‘JP’가 마지막 카드를 가지고 있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고 있는 것 같다.

불명예스러워도 고결함

지난날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을 놓고 ‘불명예스런 일을 하면서도 고결함을 잃지 않는 사나이’라고 평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떤 더러운 짓을 해도 이른바 ‘스타일’이 있는 사람. 고전적 의미의 유럽인에게는 그것이 있었고 처칠은 그것을 지닌 최후의 유럽인이었다는 것.

처칠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소설 ‘제 2차 세계대전’을 남기기도 했다. 행동력을 가진 사람은 문장력이 약하고 문장력을 지닌 사람은 행동력이 모자라다는 것이 일반론이지만 행동력과 문장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 처칠이기도 했다. 진정한 의미의 정치를 아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사람중의 하나가 그였다는 평도 듣지만 그는 불우했던 젊은 시절에 ‘돈 때문에’유명인의 전기(傳記)같은 것을 쓰기도 했던 사람이다. 정치가가 안 되었으면 그는 붓 한 자루로 먹고 살수도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자기 동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영국국민은 때때로 십자군적인 감정의 물결에 휩싸이기도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예를 볼 수 없는 일인데 영국인은 그 전쟁에 의해서 물질적인 이득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의명분이나 주의주장 때문에 용감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다.”

더 늦기전에 어떻게 안될까

문학을 안다는 것은 인생을 주지하는 눈을 가졌다는 뜻이다. 붓 한자루로 생업을 이을 수도 있을 만한 문필력을 지닌 사람이면 불명예스런 짓을 할 때에도 고결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최근 일본의 어떤 영향력 강한 우익 정치인이, 자신이 가상으로 뽑힌 수상후보가 된 것을 계기로 인터뷰를 한 것에서 이런 말을 했다.

“유럽에는 괴테나 말로처럼 문학가이면서 정치가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작가적 상상력이란 정치가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일이다.”

결국 최고 통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력있는 말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논지가 그의 이론이다. ‘JP’는 때때로 우리에게 수사학의 즐거움을 던져주는 아주 드문 정치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황량하도록 불모한 우리 정치 풍토에서 가끔씩 레토릭을 행사할 줄 아는 JP에게 우리는 문학의 주지성 같은 것을 냄새 맡아 오기도 했다.

더 늦기 전에 ‘불명예스런 일을 할지언정 고결함을 잃지 않는 면모’를 그에게서 보았으면 좋겠는데…. 안될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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