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일본의 쉰들러 후세를 아시나요?

글 / 柳子孝(유자효 SBS 라디오본부장)

일본에도 쉰들러 양심 있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세계에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때 독일인 쉰들러는 다수의 유태인들을 그의 공장에 고용했고 그들은 대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쉰들러가 있었다는 것은 독일을 도덕적으로 건져 내주는 엄청난 힘이 된다. 그 양심의 힘 덕분에 독일은 무서운 죄를 짓고도 오늘날 통일을 이룩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2차 대전때의 일본에도 쉰들러와 같은 양심이 있었다. 그의 행적을 보면 쉰들러보다도 더 고결하고 순수했다. 그의 이름은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 辰治, 1880?1953)이다.

일본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후세는 레오 톨스토이에 심취한 박애주의자였다. 그는 명문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조선인 학살 사죄문 발표

후세와 조선과의 인연은 1919년,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했던 ‘조선청소년독립단’ 재판에서부터 시작된다. 3·1 운동의 전조와도 같은 이 사건에 대한 재판에 후세가 자진 변호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3·1 운동이 발발하자 ‘조선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논문을 발표해 일본 검찰에 기소됐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일제는 민심 수습책으로 조선인 폭동설을 유포했다. 이 결과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됐다. 격노한 후세는 조선인들에 대한 유언비어를 일본 경찰이 날조했다고 정면으로 비난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에 의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문을 발표했으며 조선을 직접 방문해 사죄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의열단의 박열 의사가 일본 천황 암살을 기도함으로서 일본이 떠들썩했다.

후세는 박 의사와 일본인 아내 가네꼬 후미꼬의 변론을 자청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박열 부부는 첫 재판에서 대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후세는 ‘조선인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논리로 맞서 무기징역으로 경감시켰다. 후세는 박열의 아내 가네꼬가 옥사하자 유해를 문경 박씨 선산에 이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해방후 박열은 재일 조선거류민단을 창설한다.

1923년에는 또 김시현 등 12명의 의열단이 일본 고위 관리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중국 상해에서 폭탄을 들여온 후 체포되자 후세는 서울로 달려와 이들의 변호에 앞장섰다.

총독부 압정도 극렬 비난

이해 8월 1일에는 한국 최초의 인권운동 단체인 형평사(衡平社)가 서울 천도교 교당에서 창립됐는데 후세는 이 모임에 참석해 ‘조선 해방을 위한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924년에는 김지섭 의사가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났다. ‘천황 시해 미수사건’의 변호를 맡은 후세는 사형으로 몰아가려는 일본 검찰의 움직임에 대해 ‘폭발물 단속 규칙을 위반했다고 사형에 처한 일이 이제까지 단 한번이라도 있었느냐?’고 변론했다. 후세는 오히려 ‘조선인의 극렬한 행동에는 조선 총독부의 압정에 그 원인이 있다’며 조선인 차별에 대한 일제의 악정을 비판했다.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자 동양척식회사를 내세워 일본인들의 조선 정착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일본의 토지 수탈이 극에 달한 1926년, 동척이 전라도 궁삼면(지금의 나주 지역)의 비옥한 농지를 수탈하려 하자 궁삼면 농민들은 이에 항거했다. 이 와중에 일본 헌병의 발길에 채여 사망하는 사람이 나오자 농민들은 혈서를 써서 현해탄을 건너 후세 변호사를 찾아갔다. 후세는 조선을 방문해 조사 활동을 벌였다. 그는 동척의 행위를 사기 행위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자 총독부는 농민들과의 타협에 나섰다.

당시 조선 농민들이 그를 얼마나 구세주처럼 반겼던가는 후세의 강연회를 알리는 광고지의 문면에서 읽을 수 있다. 즉 ‘왔다,. 왔다,. 후세 선생. 일찍 가서 들어 보세.’

일본으로 돌아간 후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식민지 정책에 반대한다. 나는 식민지 동포와 함께 그 해방을 바라고 있다.”

끝내 일본은 후세를 투옥

이런 후세를 일제가 버려둘 리가 없다. 그는 1933년과 1939년, 치안 유지법 위반 등으로 두 차례나 투옥되었다. 그는 자신을 위한 변론에서 ‘나는 약한 자를 변호하는 해방운동가이지 맑스나 레닌을 표방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후세 사건을 6년여 동안 다뤘던 일제의 대심원은 후세를 가리켜 ‘인도적 정신에서 약자를 위해 분투한 고귀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 그는 일본의 변호사 1백인에 꼽히고 있다.

마침내 광복이 되자 후세는 한국 건국에 바치는 최대의 선물로 ‘헌법 초안’을 만들어 한국에 보냈다. 그의 초안은 유진오(兪鎭午) 박사 등 헌법 기초 위원들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후세 다츠지라는 일본인 변호사가 알려진 데는 정준영(鄭畯泳, 61세)씨의 노력이 크다.

그는 9월 6일 오후 1시, 국회의원회관 소강당에서 후세 다츠지 사망 47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를 연다. 이 행사에는 후세의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大石進)와 모리 다다시(森正) 나고야 시립대 교수 그리고 이형남 일본 중앙대 교수가 와서 그의 생애를 증언한다.

정준영씨는 이 모든 일을 사비로 해내고 있다. 그가 바라는 바는 한국 정부가 후세의 업적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훈장이라도 전달하자는 것이다.

남은 일은 가려져 있는 후세의 발자취를 역사 위에 드러내고 고마웠던 한 일본인에게 한국인의 감사의 정을 표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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