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법과 경제의 충돌

글 / 權和燮 편집위원(권화섭 세계일보 객원편집위원)

마이크로소프트 사건의 재음미

뉴욕타임스 보도(‘마이크로소프트의 독금법 소송 방어작전의 실책 재조명’, 2천년 6월9일)에 따르면 연방지법 토머스 펜필드 잭슨 판사는 당초 마이크로 소프트의 회사 분리는 생각지도 못했고 미법무성의 요구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 2월 잭슨 판사는 재판을 진행중인 주심 판사로서는 이례적으로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심중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회사(마이크로소프트)를 구조조정 한다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크고 중요한 회사이며 여러 측면에서 혁신적이고 칭찬할 만 하다. 그리고 이 회사는 미국 경제의 엔진이다. 정말이지 그것은 내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일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로부터 3개월이 지난 5월 하순 잭슨 판사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과 스티븐 볼머 사장의 발언에 깜짝 놀랐다. 나는 점차 그들의 옹고집으로 인해 회사분리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지난 4월 마이크로소프트가 “약탈적이고 반(反)경쟁적 방법으로 되풀이하여 독금법을 위반했다”는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게이츠와 볼머가 전혀 뉘우치는 기색없이 계속 자신들은 전혀 잘못이 없으며 인터넷 기술발전을 선도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잭슨 판사의 이러한 심리적 변화는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의 회사분리라는 최악의 판결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과정은 다분히 게이츠와 볼머의 자업자득인 측면이 짙다.

현대그룹은 이러한 마이크로소프트 사건에서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 비록 정치와 경제적 의식 수준이나 시장경제의 성숙도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마이크로소프트 독금법 사건에 피고의 이름만 현대그룹으로 바꿔 넣으면 사건의 전개가 이상하리 만치 현대사태와 닮았기 때문이다.

사후약방문이긴 하지만 현대그룹은 애당초 정부와 충돌 코스를 취하지 말고 정부가 요구하기에 앞서 서둘러 시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충분한 자구책을 취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한국 최대의 재벌그룹으로서 현대의 위상이 그처럼 손상되지 않고 한국경제의 한 중심축으로서 재벌그룹들의 역할도 좀더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재벌그룹들의 우둔함

현대그룹은 그렇게 현명하지 못했다. 한국재벌들이 모두 그렇다. 하기야 정보통신의 신경제를 리드해온 마이크로소프트조차 그처럼 우둔했으니 한국재벌들이 달리 행동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椽木求魚)일 것이다.

그러나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회사분리가 미국 대법원에서 확정될지라도 그것이 미국경제나 미국민들의 승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전혀 확실히 않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사건은 미국 정부와 게이츠의 대결이자 시대착오적인 독점금지법과 신경제의 충돌이다.

현대그룹의 자동차 계열분리와 오너가족의 보유지분 정리 등 자구계획은 앞으로 현대그룹의 모습을 바꾸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정부와 은행과 기업 3자관계를 정부우위의 지시경제방식으로 확실히 재정립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에서는 재벌그룹을 비롯해 어떠한 기업도 정부의 개혁요구에 저항하거나 늑장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 모두가 정부의 지시에 순종하고 눈치를 살펴야 하는 정부주도의 경제운영구조가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현대사태의 이러한 결말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우리는 이것을 현대를 비롯한 전체 재벌그룹들에 대한 정부와 서민대중경제의 승리로 간주할 수 있는가? 외견상 대다수 국민들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정부의 개혁 압박에 현대그룹이 미온적이거나 버티기 작전을 하는 기미를 보일 때면 언론과 여론이 한목소리로 “시장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치는 모습이 너무나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괴기한 논리의 비약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사건은 정부와 시장의 대결, 즉 법의 논리와 경제의 논리의 충돌에서 후자의 패배를 의미한다. 한국의 재벌그룹 역시 한때 세계적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개발시대 한국경제”라는 엄연한 시장의 산물(産物)이다. 정부와 기업, 언론, 소비자 할 것 없이 모두가 시장의 논리를 외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시장의 논리는 정부와 언론이 독점하고 기업과 소비자는 단순히 그 논리의 수용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이것을 시장의 논리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 시장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논리학에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으로 치부된다. 재벌과 대기업이라는 부정적 가치를 척결하는 경제정책은 중소기업의 활성화와 경제정의를 창달하는 효과적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정책 논리의 근거이다.

공정거래위의 역차별

그런데 경제현실에서는 이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다. 특히 국경과 지역을 넘어 전개되고 있는 글로벌 시장통합과 그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다국적 기업들의 총체적 경쟁은 국내적 관점의 공정거래와 경제정의의 개념을 전혀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 바로 세계화라는 이름의 신경제의 논리다.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세계화 물결을 거꾸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그것도 한국으로 밀려들어오는 세계화의 물결은 그대로 방치한 채 국내적으로만 공정거래와 경제정의를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내 기업들을 역차별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98년 8·15 기념사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재벌개혁을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2천년 8·15 기념사에서는 지식경제와 첨단 벤처산업을 중심으로 한국경제를 세계 일류 경제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 기념사를 들으면서 필자가 떠올린 궁금증은 과연 절대적인 정부우위의 지시경제체제로 그러한 세계 일류경제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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