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문광장관 화내다

글 / 盧癸源 편집위원(노계원 방송심의위원,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관 분노에도 이유있다

최근 문화관광부장관이 방송의 지나친 선정성과 폭력성을 개탄하면서 ‘장관직을 걸고’ 이를 없애겠다며 격앙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방송이 문광장관 소관이냐’, ‘월권이다’ 또는 ‘과민반응이다’ 해서 한때 세인의 입방아에 올랐다.

방송이 그의 소관이건 아니건, 그 이전에 이 ‘개판’ 만도 못한 프로그램들의 수용자일 수밖에 없고, 생각있는 국민이면 누구라도 벌써부터 터뜨리고 있는 분노를 뒤늦게나마 공식화했다는 데서, 더욱이나 일국의 문화정책의 주무각료라는 점에서 나는 오히려 만시지탄이 있으나 그의 분노의 정당성과 적절성을 옹호해 마지않는다.

물론 제도적으로는 독립된 소관기관인 방송위원회가 엄연히 존재하고, 프로그램 심의위원회의 기능이 가동되고 있으며, 수많은 민간 방송감시기구가 모니터활동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사들은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 내지 묵살하면서 여전히 퇴폐, 선정, 폭력, 간접광고, 전파낭비 등을 자행하고 있는 데에 문제가 있다. 프로그램 심의결과 해마다 수천건이 제재조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위반사례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입증하는가.

심의위원회가 ‘시청자에 대한 사과’ 이상의 제재를 방송위원회에 건의하려면 사전에 해당 PD나 책임자에게 진술·해명의 기회를 주게 돼있다. 그런데 진술인으로 나온 경력 10년 내지 20년의 베테랑 PD들이 고작 한다는 게 “심의규정을 모르고 한 일이니 잘 봐달라”는 식의 얼버무리기 읍소에 그치고 있다.

이는 폭력범이 수사기관에 붙잡혀 와서 “나는 폭력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줄 몰랐다”는 식의 시치미떼기에 다름 아니다. 폭력배가 우선 주먹을 휘둘러놓고 보는 범법과, 무조건 시청률을 올려놓고 보자는 방송사의 심의규정 위반은 고의적인 묵살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전파낭비 사례 들어보세요

그들은 폭력범이 사회의 안녕과 질서라는 윤리적 덕목을 외면하듯이 방송이 공공성·공익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민의 자산이라는 가장 기본적 원리를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시청률 제고를 위해서는, 까놓고 말해서 돈벌이를 위해서는 출연자의 옷을 벗기든, 음란한 율동을 시키든, 흉기를 휘두르든, 간접과오를 하든 무엇이든지 연출하는 철면피 상혼이 방송에 만연하다.

이에 못지 않은 것이 주로 연예인들이 출연해서 아무 의미없는 신변잡담으로 때우는 방송전파의 낭비다.

대표적 전파낭비의 사례를 하나만 들어보자.

서울에서 방송되는 어느 FM라디오의 5월 26일자 낮방송에서 진행자는 “플라스틱 주민증을 발급받아야 되는데, 건달(자신을 지칭한 듯)이 바빠 갖고 못 갔네. 마두1동 동장님! 우리 집에 좀 갖다 놔줘. 아이씨, 거 방위병이 있잖아. 민방위통신(통지서) 돌릴 때 슬쩍 갖다놔 주면 되잖아…” 가까운 친구끼리의 전화에서나 할 수 있는 잡담이다.

그리고 방송하면서 반말을 지껄인다는 청취자의 항의에 대해 이 진행자는 “반말을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말이 짧아, 그치? 그리고 내가 반말을 한다는 것을 내가 못 느껴요. 못 느끼기 때문에 어 경박한 방송, 경쾌하고 박력있는 방송을 추구할 때는 말이 길면 템포가 떨어집니다. 음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고, 어…”

방송에서는 어린이에게도 존댓말을 써야한다는 방송언어원칙을 무시한 무례임을 다그치는 심의위원들에게 담당PD는 “점심직후 나른한 시간엔 좀 튀는 파격적 진행이 필요해서”라고 고의성을 숨기지 않았다. 나른한 시청자에겐 휴식이 필요한 것이지, 무례한 헛소리로 청취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이 공익성을 우선으로 하는 방송이 할 짓인가.

작년가을 S-TV 모델 쇼에서의 국부 클로즈업이나, 지난 7월 30일 M-TV의 가슴노출 건 등에서 단적으로 노정된 방송의 과도한 선정성과 드라마의 폭력성은 이미 공공매체로서의 허용한계를 벗어난 지가 오래다.

연예인들의 출연이 주류인 이른바 교양·오락프로그램의 신변잡담들은 우리 방송언어의 건전성과 품위를 훼손하고 있으며, 국민정서를 연예인 선망의식과 과도한 소비주의, 선정주의의 일상화로 오도하면서 전파를 낭비하고 있다.

천박해야만 재미있나

근본적으로 시정해야할 것은 방송인들의 제작철학이다. 뭐든지, 심지어는 보도프로그램까지도 ‘재미’ 위주의 시청률 제일주의를 지양해야 한다. 시청자의 오락선호취향에 영합하고 부추기는 자세를 바꿔야한다. ‘천박해야 재미있다’는 제작태도를 근본부터 뒤집으라는 말이다. 방송인들은 프로그램에 대한 자기 소신과 철학을 바탕으로 제작에 임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제작자들이 방송심의규정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자기 소신을 억압하는 상업적 요구에 대한 굴복을 은폐하는 궁색한 변명 같아서 오히려 연민이 느껴진다. 시청률에 집착하는 제작자의 태도는 수익성을 최우선시하는 방송사의 압력의 결과이다.

방송위는 심의규정을 강화하여 제재조치 자체를 경시·외면하는 방송종사자들의 방자한 자세를 근본적으로 고쳐 놓아야 한다. 일정 횟수·정도 이상 반복해서 심의규정을 어기는 매체에 대해서는 방송허가 자체를 취소할 정도로 엄정한 방송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방송의 오락기능은 교육기능 못지 않게 국민의 레저수단으로서 중요한 몫이긴 하다. 그러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방송은 국민정신건강의 ‘보약’ 구실을 해야지 ‘사탕’에 그쳐서는 안된다. 비록 오락프로라 해도 건전하고 유익한 ‘재미’를 지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민주주의가 앞선 구미국가에서도 방송에 대해서만은 엄격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의 선별적 방송접근을 위해 가정과 사회, 정부가 세심하게 유의하고 있는 현실을 본받아야 한다. 소관을 따질 것 없이 우리 방송현실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높여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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