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21C 기업인의 길②]

富는 국가사회의 은총

예나 지금이나 부자놀음 개탄

富의 뿌리는 剋己와 근검절약

글 / 裵秉烋 대표편집위원

富者을 향해 一言을 發하노라

일제하인 1922년 3월 9일자 동아일보 사설이 부자들에게 한마디했다. “부자(富者)를 향하여 일언(一言)을 발(發)하노라”라는 제목이다. 요샛말로 재벌에게 한마디 충고한다는 점잖은 표현이다.

“부에 은총이 따르고 세력이 붙는 것은 부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수용(需用)과 사람들 인식이 결합된 까닭이다.”

요즘의 사설로도 지적할 수 있는 정확한 말이다.

부자가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 지위는 사회가 인정하고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어야 마땅하다는 의미다.

이어 사설은 일부 부자들의 아니꼬운 행태를 실감나게 적시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위험을 보호해주고 문인재사(文人才士)가 지식을 공급해 주고 무녀가객(舞女歌客)이 교태를 보여주고….”

지금도 거의 틀림없는 부자들의 놀음이다.

부자에게는 권력있는 이가 안전을 보살펴 주고 재주꾼들이 듣기 좋은 말과 아름다운 글을 바치고 아리따운 여인이 몸짓으로 온갖 아양을 떠니 세상에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

또한 사설은 하인들에 둘러싸인 저택에서의 부자모습도 그려 놓았다. “집에 들면 아름다운 옷과 살진 고기가 입맛을 돋구고 사회에 나서면 모두가 받들기에 분주하니…”

무려 80여년전 논객들의 표현력이나 사실을 직시하는 문장력이 지금보다 뛰어나다는 소감이다.

실로 부자들이 거침없이 누리고 부리며 뻐기는 일상생활의 단면을 현장 중계하듯 표현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天運(천운)과 조상의 은덕을 받은 이

당시 조선반도에 세상을 희롱하듯 거들먹거리던 부자가 몇 명이었을까.

멸망해 가던 귀족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를 비롯하여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대지주의 후예가 아니면 극히 일부의 명상인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손에 꼽을 만한 부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언론인의 눈으로 비판하고 각성을 촉구했음은 그 당시 시대정신의 빈곤을 한탄했으리라.

세칭 갑부(甲富)로 불린 부자들이 민중과는 동떨어진 별세계를 살고 있었음은 문헌이나 구전(口傳)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 부자들은 하늘이 돌봐주고 조상의 은덕으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온 나라 식민지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을 때 일제관리와 어울리며 히히덕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꼴불견이었을까.

그러나 이 무렵 부자들의 마음이 태평세월이었을까는 의문이다. 그들은 거의가 희귀한 존재로서 일제의 눈총을 받기 쉬운 위치에서 식민지자본과 힘겹게 대항하는 처지는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비록 아쉬움 없이 배불리 먹고 즐길 수는 있었겠지만 그들도 세상을 보는 눈이 있었다면 마음 한구석에 맺히고 분통 터지는 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 시절의 우리나라 공업을 개탄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1921년 4월 28일자 사설은 공업자본의 86%가 일인이 지배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방직, 비료, 염료 등 당시의 대기업은 모조리 일인이 지배하고 있다고 썼다.

3·1운동이후 조선인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했지만 일인회사가 71%, 한일합작사가 9.3%, 순수 조선인회사는 불과 20%에도 미달했다. 그러니까 일본자본이 지배하고 있던 시절, 부자로 불린 이들은 선각자의 눈으로 민족기업을 일으킨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면서 민족주의 성향을 뿌리뽑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문화정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 민족기업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부자들의 행태는 꼴사나웠음이 분명하지만 그나마 빈약한 민족자본으로 보면 그들은 대사(大事)를 도모한 지사(志士)가 아니었을까.

妓房(기방)에서 가산을 탕진하게…

일제는 돈있고 지식있는 이들이 민족이나 독립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아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전국 팔도에서 기생을 끌어 모으고 일본기생마저 수입하여 밤낮없이 흥청망청 놀 수 있게 판을 벌여 놓았었다.

이 때문에 많은 지주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폐인으로 전락함으로써 일제의 문화정책을 뒷받침한 셈이었다. 반면에 기생집을 마다하고 민족기업을 세워 오늘날까지 그 뿌리를 남긴 이들도 있었다.

오늘의 삼성그룹을 일으킨 고 이병철(李秉喆) 회장은 대구에서 기생집에도 자주 들렀지만 사업에도 성공한 특례에 속한다. 그러나 두산그룹을 일으킨 고 박승직(朴承稷) 창업주는 끝까지 기생집을 외면했던 인물로 전해졌다.

그 시절 기생집에서 돈을 날린 이는 친일(親日)로 세월을 즐겼고 부자로서 행태를 비판받은 이들은 배일(排日)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마 친일도, 배일도 마음대로 선택하기 어려운 시절, 벼슬길도 막히고 민족운동가의 따가운 눈총도 받아야 했던 가시방석이 기업가들의 처지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동아일보 사설이 따끔하게 지적한 “부자를 향해 일언을 발하노라”는 백번 옳은 말이겠지만 그때 그 시절 부자나 요즘 민주주의 시장경제하의 부자나 나름대로 고뇌하고 번민해야 하는 사회적 지탄은 별다름이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자는 정녕 뻐기고 활개치는 멋과 재미가 없으면 신명이 나지 않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속성이라 믿기 때문이다.

事業報國(사업보국) 위한 민족기업가

우리나라 첫 민족기업으로 꼽히는 경성방직은 1919년 당시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기업을 창업했다. 전국 유지들의 참여를 받아 창업했지만 경제상황에 비춰보면 요즘의 벤처 창업과 다를 바 없었다.

경방은 설립 취지문에서 “빈곤한 조선인에게 직업을 주고 조선경제의 독립을 목표로 삼는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이 무렵 터놓고 독립운동을 입에 담을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경제독립을 대신 주창했는지도 모른다.

경방을 설립한 자본주들은 나라 없는 백성이 굶주리고 배탈이 날 때도 약 한첩 쓸 수 없는 형편을 눈여겨 보아왔을 것이다. 일하고자 해도 일거리가 전혀 없었으니 기아와 절망속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당시의 창업은 기업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고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충정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일제를 살았던 거의 모든 기업인들이 해방 뒤 사훈(社訓)을 정할 때 사업보국을 내세운 것도 이 시절 한(恨)의 표현이었으리라 믿는다.

아울러 일제하나 해방후 기업을 일으켜 성공한 이들은 어떤 전력과 상관없이 나라건설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돼야 옳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본다.

절약위해 부부 合房(합방)도 마다했다

조선조 부자들의 근검절약 정신은 거의 맹목적이자 사교의 광신도처럼 비춰질 수 있다.

만석꾼 황부자의 구두쇠 이야기는 코미디 소재로 다뤄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때 그 시절 구두쇠 아니고서 만석꾼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부부가 황무지를 개간하여 9천석을 모으고도 싸라기 한 톨마저 아꼈으니 어찌 부자 인심이 그럴 수 있었을까.

황부자는 만석을 채우기 위해 노심초사했지만 끝내 실패하고서야 “조물주가 만석을 채워줄 의향이 없으신 모양”이라며 뒤늦게 한탄했었다.

결국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뒤늦게 많은 재물을 풀어 가난을 돕는 좋은 일을 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부부가 결혼하고도 절약을 위해 합방(合房)하지 않았다는 부부이방(夫婦異房)이라는 한문소설이 있다.

경상도 상주땅에 서른을 훨씬 넘긴 노총각이 비슷한 처지의 노처녀를 만나 냉수 한 그릇 올려놓고 둘이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첫날밤을 맞은 노총각의 가슴이 하늘을 찌를 듯 펄적펄적 뛰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새색시 노처녀의 굳은 마음이 지엄(至嚴)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 부부가 됐지만 초가삼칸도 장만 못한 채 합방하여 아기를 생산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평생 가난을 못 이기고 이웃에 짐이 될 것이 뻔한 이치이니 웬만큼 사람 구실할 때까지는 각방(各房) 쓰기를 소원합니다.”

이 말에 노총각이 무슨 대꾸를 할 수 있었을까.

이날부터 부부는 통문을 사이에 두고 남편은 새끼를 꼬고 아내는 길쌈을 하다 밤을 지새고 새벽이면 들에 나가 밭을 일구며 청춘을 보냈다.

세월이 지나 대청마루 있는 집도 장만하고 곡간도 풍성해졌을 때 속이 탄 남편이 때가 왔노라며 아내에게 졸랐다.

“여보, 이제사 우리가 언약한 그 날이 왔으니 오늘이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길일(吉日)이 아니겠소.”

그러나 천성이 부지런한 아내의 말은 달랐다.

“비록 내 집은 장만했지만 우리를 돌봐주신 분들과 어려운 이웃들 신세를 갚지 못했으니 서둘러 합방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왕 늦었으니 좀더 참아 사람노릇을 다하고 보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부부는 다시 10여년을 열심히 일하여 인근 마을까지 가난을 추방하고 태평세월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야속하여 이미 부부는 합방할 나이가 지나고 혈육도 갖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부모 잃은 고아들을 모아 훌륭히 양육하여 출세시키고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다.

이러니 어찌 부자가 스스로 번돈을 헤프게 쓰고 기생방을 함부로 출입할 수 있었겠는가.

천시 속의 신념과 행동규범

결국 옛적부터 명상인의 길은 극기와 인내 그리고 현실적 처신으로 목표를 성취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상인에 대한 비판과 거부감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은 확고한 행동규범과 신념을 실천하려 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의 우리사회 기업인들의 뿌리가 조선조나 한말 그리고 일제를 거치기까지의 험난하고 고달픈 우리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타협과 흥정도 필요했고 위장과 은신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특히 조선조 양반사회에서부터 천직으로 분류되어 내심으로 반골(反骨)과 저항에다 현실에 영합하는 생존술이 아니고는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을 까도 생각된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최고의 덕목으로 칭송되는 시절이다. 우리네 기업인들의 양심은 천박하고 행태는 조악한 것으로 비판되고 있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업의 생성과정과 역사와 문화의 차이를 외면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된다. 미국의 총잡이들이 서부를 개척하고 대형화물선과 군함을 앞세워 인천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통상을 교섭했을 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시절이었다.

일본의 부랑패들이 왕궁을 짓밟고 국권을 앗아간 뒤에도 그러했다. 결국 일인자본이 경제를 수탈하고 산업을 지배하고서야 기업이 무엇인지 눈뜨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사를 생각하면 오늘의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한 것이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럽지 않느냐고 추켜세우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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