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원로정치부 기자의 종횡무진 세상보기]

민주주의는 숫자놀음?

혁명, 쿠데타도 성패 좌우

정권투쟁에서 러브호텔 추방까지

決死반대 인간철벽 민중의 소리


글/ 諸宰馨 (제재형 언론인)

민주주의는 가장 나쁜 정치제도다

민주주의는 한갓 숫자놀음이다. 산술(算術)이 엮어내는 조작(操作)예술이다. 정직하지 못한 애국자들이 고단수의 기술로 연출하는 ‘다수결의 미학’이기도 하다. 정치기자로 44년을 살아오는 가운데 30년 동안을 ‘국회출입기자’로 뛰어다니다가 백발의 고희(古稀)를 경영하는 노기자의 체험적 정의(定義)이다.

고려대학강의실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때 김상협(金相浹) 교수는 가르쳤었다. “민주주의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정치제도이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제도에 매달리는 것이다. 매우 낭비적이고 비능률적이며 많은 시간을 앗아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학생들은 ‘명강의’를 경청하면서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대망했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이상을 실천하는 정치방식이다. 데모크라시(democracy)란 말은 그리스어의 데모크라티아(democratia)에서 나온 것으로 데모스(demos, 인민)와 크라티아(kratia, 권력)의 합성어라 풀이된다.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자유권 평등권 및 법치주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삼권분립의 원칙으로 운용된다는 설명이다.

아브라함 링컨은 “민주주의란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치”라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고권적, 원론적 이론을 강의하던 김상협 교수가 5공 시절에 국무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괴리되었고 정치는 교과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물러났다. 임기를 채 못 채웠으니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음은 두 말할 나위없다.

지난 10월 6일 슬로보단 밀로세비치(59) 유고슬로비아 대통령이 13년이나 누려오던 무소불위의 권좌에서 물러났다. 아울러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56) 세르비아 민주야당(DOS) 가 새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정권을 인수했다. 온 세계의 매스컴이 큰 사진이 곁들인 1면 기사로 대서특필했다. ‘20만 군중’이 여러날 베오그라드 거리를 시위하며 독재자 밀로세비치의 퇴진을 외친 결과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세계 강대국들이 즉각 야당의 승리를 지지하고 새 정부를 승인했다. 신문들은 ‘유고시민혁명의 승리’라고 찬양했다. 11년전 그러니까 1989년의 일이던가.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이 붕괴되면서 ‘슬픈 종말’을 고했던 사실이 뇌리를 스쳐간다. 독재정권은 결코 영원할 수 없고 역사의 심판은 언제나 냉엄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정치적 변혁사건이었다.

김일성광장의 100만 군중

여기서 ‘숫자놀음’의 교훈을 잠깐 음미해보자.

군중시위의 힘은 걷잡을 수 없이 크다. ‘데모의 위력’이라고나 할까. “20여만 군중이 수도 베오그라드의 거리를 누볐다” “수십만 유고 시민이 제2의 도시 노비사드 시내를 가득 메웠다”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을 압도하고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니 보안군과 경찰의 시위대 합류로 종말을 고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환상적이다. 한 폭의 그림처럼 감동적인 운취를 풍긴다. 민의를 외면하는 철권통치의 종말은 슬프고 독재자의 말로는 처량한 비극이다.

지난 10월 30일은 국경일인 개천절 4332돌 기념일이었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는 4천여명의 시민이 모여 경축식을 올리고 단군 성조에 의한 ‘홍익인간’의 개국이념을 되새겼다. 추계 사직대제와 ‘개천절 한민족 대축제’도 펼쳐졌다. 신문마다 2면3단 기사로 몇 가지 기념행사를 싸잡아 보도했다.

그러나 같은 날 드레스덴의 젬퍼 오페라하우스 앞에는 18개국 대통령·수상이 도열, 기념사진을 찍었다. 독일통일 1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였다. 이 컬러사진은 1면 머리에 4단 크기로 보도되었다. 수십억 인구를 다스리는 국가지도자들의 데몬스트레이션(시위)임에 틀림없다. 남의 집일은 앞쪽에 크게 알리면서 내집 행사를 뒤쪽에다 작게 보도하는 것은 무슨 심사인가? 겸손인가, 엽전의식인가, 사대주의 근성인가, 도무지 아리송하다. ‘아니야, 꼭 그렇게 고깝게 여길 일은 아니야’ 온 세상 사람들이 동서독의 통일절 10돌맞이를 경축하는 것에 뉴스밸류를 더 둔 것이라고 치부하면 마음이 편하다.

수의 많음을 좋아하기는 사회주의·공산주의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10월 10일은 북한의 조선노동당 창건 55돌이었다. 평양의 김일성광장에 1백만 시민이 운집했다. 신문들은 ‘백만명 가까운 주민들이 동원됐다’고 보도했다. 평양시의 인구가 2백50만 이하니까 그 절반 가량은 고운 옷 갈아입고 거리에 나온 셈이다. 3군 분열식과 퍼레이드 장면은 가관이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옛 스파르타식이요, 히틀러 유겐트가 재현된 느낌이었다.

군중은 뭉쳐진 민의, 단결된 힘을 과시하는 것, 김일성·김정일 부자에 대한 충성심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당원·군인·노동적위대·붉은청년근위대를 비롯한 백만 군중의 동원, 일사불란한 도열, 우레 같은 박수소리… 신나는 공연장면이다. 5년만에 열린 노동당 돌잔치에 웬 군인이 그렇게도 많이 등장하나? 북한 사회에서의 노동당 위상이 ‘최고’임을 웅변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이것을 구경한답시고 북쪽의 초청을 받은 사람 중에서 한완상·지은희씨 등 42명의 참관단이 평양을 다녀왔다고 한다. 과연 무엇을 보고 느끼고 왔을까 궁금하다.

프랑스혁명때도 파리시민이 몽땅…

‘백만군중’이란 실로 엄청난 숫자이다. 우리나라로서는 빌리 그레이험이 여의도 ‘5·16 광장’에서 전도집회를 열었던 1970년대에 ‘1백만 군중’이 모인 것으로 기억된다. 여의도로 통하는 다리는 자동차 아닌 사람의 물결로 가득차고 넘쳤었다. ‘종교의 힘’이 무엇인지를 웅변하는 군중시위였다. 40여년전쯤 미국에서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끄는 흑인들의 인권시위때 ‘백만인파’가 넘실거린 적이 있었다. 총칼로서도 통제하기 어려운 인간철벽-그것이 바로 ‘1백만 인파’였음을 증명한 역사적 사실들이다.

생각이 8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 2월 22일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났다. 지구촌의 북녘 2천2백만㎢의 거대한 땅덩어리가 흔들렸다. 분노에 찬 군중데모의 외침은 ‘먹을 것을 달라’ ‘전제정치 타도하자’였다. 모자라는 식량배급제도에 성난 노동자와 주부는 빵가게, 식료품상점을 습격한다. 수많은 시민들의 함성은 마침내 니콜라스 2세를 퇴위시키고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종말을 고하게 만든다.

직업혁명가 레닌이 소비에트의 민의(民意)를 휘어잡아 ‘10월 혁명’을 성공시키고, 스탈린이 ‘죄의 숙청’을 거듭한 끝에 전제·독재체제를 구축하여 철권정치를 강행한다. 그러나 독재정치는 영원할 수 없는 것. 1억8천만 백성은 2?3천명 공산귀족을 위한 노예생활을 탈출코자 발버둥친다. 70년 세월이 흐른 1987년 고르바초프에 의하여 소련 공산 독재체제는 무너진다. 개방·자유·민주화의 대로(大路)를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민중데모와 분노에 찬 함성의 역사적 증언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때도 파리시민이 몽땅 궐기했다. 민중은 약한 것이지만 건드리면 터지고 커진다. 민중은 마치 핑퐁과도 같아서 세게 치면 더 높이 튄다. 억압과 굶주림에 발끈 분기한 프랑스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왕궁을 포위한다. 마침내 루이 16세는 쫓겨나고 부르봉 왕조는 무너진다. 남자는 천하를 지배하지만 여자는 그 지배자를 주무른다던가. 정치 뒤에는 여자란 요물이 도사리고 있기 쉽다.

4·19, 5·16의 민중시위, 육사시위

‘용의 눈물’에서 보듯이 우리 조선왕조 시대에도 그러했듯이 프랑스 왕정 때에도 그러했던가보다. 사치·향락의 대명사인 ‘마리 앙뜨와네트의 치맛자락이 한치만 더 짧았더라도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 혁명사를 강의하던 이세구(李世求) 교수의 말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거라는 말도 연상된다. 멀리 남미 페루에서는 장기집권을 노려 부정선거를 자행한 후지모리 대통령을 축출하려는 군중시위가 일어나고 인도네시아에서는 동티모르 자치권 문제로 분쟁이 거듭되고 있다.

종교적 갈등으로 평화공존의 길을 찾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중동의 화약고’란 오명(汚名)을 씻지 못하고 지금껏 으르렁대며 총을 맞쏘고 있다. 안와르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는 평화협정을 체결한 공적으로 1978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또 아세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지도자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도 ‘중동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런데도 황금의 신권과 요셉의 무덤을 에워싼 이·팔간의 싸움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노벨평화상과 평화공존은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군중시위나 민중데모는 생사결단의 운명을 지닌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데모를 두고 자유당 정부는 ‘폭도들의 난동’이라 규정, 강력 진압작전으로 나왔었다. 만일 4·19혁명이 실패했더라면 주동자들은 ‘만고의 역적’으로 처단됐을 것이다. 다행히 성공하여 자유당 독재정권이 무너졌기에 희생자들은 성역화된 4·19 묘지에서 영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면 역사기록도 바뀌어진다. ‘4·19 의거’는 ‘4·19 혁명’으로 바뀌고 ‘5·16 군사혁명’은 ‘5·16 군사쿠데타’로 전락되었다. 20년 전에 일어난 ‘5·18 폭동’은 ‘5·18 민주항쟁’으로 그 역사적 정의(定義)가 달라지는 걸 우리는 목격했다. 사실이지 5·16 군사쿠데타는 애시당초 성공할 수 없는, 또 성공해서는 안될 군사반란이었다.

매그루더 8군 사령관과 매카나기 주한미군 대리대사가 ‘반란군의 원대 복귀’를 사흘동안 방송했으니 수녀원에 숨었던 장면(張勉) 국무총리가 나와서 도장만 찍었더라면 쿠데타 음모는 일장춘몽으로 끝났을 것이다. 사태를 기정사실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은 5·18 육사(陸士) 생도들의 시청 앞 데모였다.

경찰 2만명, 주최측 20만명

5·16 새벽잠을 깨운 방송에서 당시 박종세(朴鍾世) 아나운서가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육군 중장 장도영’의 명의로 포고문을 낭독했을 때 시민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반신반의했었다. 육사생도들이 보무 당당하게 가두시위를 벌일 때 임택근(任宅根) 아나운서가 무개차를 타고 달리면서 실황중계를 했었다. 아직도 그 장면은 기자의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아마도 혁명이나 쿠데타의 성패는 방송국 장악 여부에 달려있는가 보다.

가까운 예를 살펴보자. 4·13 총선으로 뽑힌 2백73명의 선량들은 지난 5월말 제16대 국회 개원식을 갖고 정상적인 의정활동에 착수했었다. 15대 국회에서 52석을 차지했던 자민련은 냉엄한 표의심판으로 그 3분의 1인 17석으로 줄어들었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인 20석에 세 자리가 모자란다. 노회한 ‘정치 9단’ JP(김종필 명예총재)의 표석에 말려든 민주당이 국회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교섭단체 구성요건을 ‘10석’으로 낮추려했다. 이것이 동티가 되어 국회는 파행·식물국회로 전락하고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은 장외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회창(李會昌) 총재는 1백33명의 소속 국회의원과 당원을 이끌고 9월 하순 부산과 대구에서 장회 군중집회를 열고 대여투쟁의 포문을 열었다. ‘의회민주주의를 포기한 오만한 정권’을 규탄하고 ‘무대응·무대책·무책임한 무능력 정권’의 잘못을 낱낱이 비판했다. 이 총재는 역설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눈을 감고 귀를 막아 국민의 분노를 보지 못하고 통곡을 듣지 못한다. 대통령을 정신 차리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궐기밖에 없다”

정창화(鄭昌和) 원내총무는 ‘나라를 거덜낸 정권’이라 비난했고 ‘옹졸한 정권’(姜在燮 의원) ‘총체적 부실정권’(安澤秀 의원)이란 욕설도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도 숫자 시비가 일어난다. 부산 역권광장과 대구 두류산 공원에 각각 ‘5만 군중’이 운집한 모양인데, 신문들은 이 사실을 뚜렷이 보도하지 않는다. 사실 외면인지, 보도기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본시 정치집회에 모인 사람수의 다과(多寡)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어느 유력지에 보도된 대구집회의 설명을 본다. ‘공원내 400m 길이의 4차로를 가득 메운 참석자들’이란 기사와 함께 경찰추산 ‘2만여명’여, 주최측은 ‘20만명 이상이 운집한 대구 역사상 가장 큰 집회’라고 주장한다고 소개했다. 기자가 본 숫자는 아예 쓰지도, 밝히지도 않았다. 주최측과 경찰의 숫자 사이엔 10대 1의 오차가 있다. 2만명은 20만명의 10%에 불과한 숫자다.

申翼熙(신익희)의 한강인파 30만명

신문에 보도된 컬러사진을 독자의 눈으로 보더라도 2만명은 넘는다. 경찰의 숫자집계는 인색하다. 화재 현장의 피해액을 줄여 잡는 것 이상으로 정치집회에 모인 사람을 축소집계하는 버릇이 있다.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는 군중이다. 사람이 꽉 들어차서 발들여 놓을 틈이 없으리만큼 빽빽한 상태를 말한다. 운동장 1평에 30명이 들어차면 송곳 끝도 들어갈 틈세가 없다. 400m 4차로의 넓이와 길 주변 공원 가장자리에 선 사람까지 계산해보니 줄잡아 5만명은 된다는 것이 기자의 계산이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을 뽑은 5·15 총선거때의 일이다. 한강 백사장에 ‘30만 인파’가 운집했다고 신문들은 대서특필했다. 민주당 후보 신익희(申翼熙) 선생은 의기양양해졌다. 경무대(청와대의 옛이름)가 저만치 보이는 시점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선거 열흘전 광주행 열차속에서 신 후보는 급서(急逝)하고 만다. 그래서 자유당 대통령(李承晩)·민주당 부통령(張勉)이 선출되는 비극이 일어난다. 이때 모든 신문이 역사상 초유의 ‘30만 인파’를 보도하는데, 유독 H일보만은 딴 목소리를 낸다. 집회가 허가된 한강 백사장의 면적에 곱하기 1평당 12명씩으로 계산하니 ‘15만 군중’이란 답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수학적 근거를 대어 계산한 숫자니 아무도 이의(異議)를 달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쉽사리 생각지 못한 발상이다. 신문보도의 신뢰성에 무게가 실리는 사건이었다. 기자에겐 사실을 사실대로 써야 할 사명이 있다.

데모는 어제도 오늘도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1960년 7·29 총선으로 들어선 장면(張勉) 총리의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이 이듬해 5·16 쿠데타로 붕괴되는 9개월 사이에 매일 4백70건씩의 데모가 방방곡곡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최루탄 한방 쏜 일이 없었다. 군사정부는 ‘무능한 정부’ ‘정쟁만 일삼는 정권’이라고 민주당 정부를 매도한다.

오늘날은 3백명이 데모하면 1천명 이상의 경찰관이 동원되는 세상이다. 하루 5백건 가까원 데모 속에서도 최루탄 한방 안 쏘고도 9개월을 지탱한 민주당 정부야말로 ‘역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정부’라고 평가한다면 부질없는 허풍이라고 매도할 것인가?

민주주의의 장점은 의사표시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 과부가 과부사정 안다는 속담과도 같이 야당시절 데모와 극한투쟁을 많이 해본 ‘국민의 정부’는 야당이나 노동자들의 집단이기주의적 집회·데모까지도 너그러히 용인하는 편이다.

노벨평화상은 자랑스런 시위돼야

일산 분당 등 수도권 위성도시 주민들의 ‘러브호텔 추방데모’가 잇따른다. 10월 10일엔 강원도 도계 주민들의 2천7백명이 영동선 철길 점거농성을 벌이면서 삼척 도계광업소 사업장 축소를 반대한다. 김일동(金日東) 삼척시장을 비롯한 50여명이 삭발하고 삼베옷에 상주차림을 하고 ‘결사반대’의 뜻을 나타낸다. 일꾼 3백여명이 일자리를 잃게 해서는 안된다는 ‘백성의 소리’다. 이 바람에 기차는 멈췄고, 그 승객 50여명은 버스로 실어나르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서울 여의도 고수부지 한강공원에서는 대한노총과 민주노총이 4만명 노조원들을 동원, 합동시위집회를 열고 공기업의 해외매각반대, 구조조정반대 구호를 외친다. 그래도 주모자가 잡혀갔다는 소문이 없으니, 확실히 ‘자유’는 좋은 것이다.

아무튼 민주주의는 진실에 살고 진실에 죽는 정치제도이다. 진실이란 공정한 선거에서 이기고 진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숫자의 위력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야당시절 데모하고 단식투쟁하기를 자주했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민주당 총재자격으로 지난 10월 9일 여야 영수회담을 갖고 ‘상생의 정치’ 복원을 다짐했다. 국회는 그 이튿날로 정상화되고 대정부질문·국정감사·예산심의에 들어갔다. 한나라당이 바깥에서 장외투쟁을 벌이는 동안 시간에 쫓긴 민주당은 자민련·무소속까지 불러 겨우 의결정족수(1백39명)를 채우고는 동티모르에의 국군파견연장안을 가까스로 통과시키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맡은 일을 충성껏 잘하면 복은 줄줄이 오는 법. 이윽고 10월 13일 오후 6시 군나르 메르게 노벨상위원장은 “2천년도 노벨평화상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준다”고 발표했다. 서울 하늘에 축하의 불꽃이 빛난다. 민주화·인권신장·남북화해에 기여한 공로를 평가한 상이라니 크게 축하할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영광과 기쁨을 국내 정치와 민생안정에 쏟아서 역사에 길이 남는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길 빌어마지 않는다. 노벨평화상패가 60억 지구촌 사람들에게 ‘자랑스런 시위’가 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필자 소개>

* 국회출입 30년, 현역 44년

영원한 정치부기자 諸宰馨은 언론계활약 44년의 현역이다. 1957년 한국일보 기자로부터 정치부 차장 편집위원, 국민일보 논설위원 등을 거쳤으며 현재도 대한언론인회보 논설위원등 여러 지면에 사설과 컬럼을 쓰고 있다. 그러나 정치부 기자로서 국회출입 30년이 諸 기자의 특징이자 경쟁력이다. 경제풍월에 연재하는 그의 ‘ 종횡무진 세상보기’ 도 국회출입 취재 비화와 풍자와 논평이 될 것으로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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