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문제연구가 탁명환씨 유고 증언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보도에 대하여 다음의 통합 정정 및 반론보도를 게재합니다.


1.구원파가 오대양사건과 관련 있다는 보도에 대하여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은 1987년과 1989년 그리고 1991년 검경의 3차례 집중적인 수사를 통해 기독교복음침례회 교단 및 유병언 전 회장과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으며, 지난 5월 21일 인천지검에서 공문을 통해 관련이 없음을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2. 구원파의 교리 폄하 및 살인집단 연루성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은 기독교복음침례회 교리를 한번 구원 받으면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가르치며, 유병언 전 회장의 사업이 하나님의 일이며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구원이고 예배라는 교리를 가졌다고 보도하였으나 해당 교단은 그런 교리를 가진 사실이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3.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구원파 신도라는 보도에 대하여

세월호 사고 당시 먼저 퇴선했던 세월호 선장 및 승무원들은 모두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가 아니며, 다만 승객을 먼저 대피시키다 사망하여 의사자로 지정된 故정현선 씨와, 승객을 구하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구조된 한 분 등, 2명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4. 구원파의 내부 규율 및 각종 팀 관련 왜곡선정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의 “유병언은 금수원 비밀팀이 살해”, “투명팀이 이탈 감시했다” 등 기독교복음침례회 교단을 살인집단으로 호도하는 보도들과 관련하여 해당 교회는 출입이 자유로운 곳이고 이탈자를 감시하거나 미행하는 팀을 운영하였다는 보도는 사실무근임이 밝혀왔습니다 .

5. 기독교복음침례회에서의 유병언 전 회장 지위 관련 보도에 대하여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유병언 전 회장이 교주도 총수도 아니며, 유병언 전 회장은 1970년대 극동방송국 선교사들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사실은 있으나 목회활동을 한 사실은 없으며 기독교복음침례회는 평신도들의 모임으로 목사가 없음을 밝혀왔습니다.
6. 금수원 관련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은 금수원의 폐쇄성과 반사회적 분위기를 보도하였으나 기독교복음침례회 교인들은 금수원을 자유롭게 출입하고 있으며, 행사 때는 외부인들도 자유롭게 출입 가능하여 폐쇄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명백한 오보라고 밝혀왔습니다. 금수원의 땅굴을 비롯해 지하벙커 등 추측성보도 또한 검찰조사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7. 기독교복음침례회 및 유병언 전 회장의 5공화국 유착설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은 유병언 전 회장이 1980년대 전경환 씨와의 친분 관계와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과의 유착관계를 통해서 유람선 사업 선정 등 세모그룹을 급성장시킬 수 있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병언 전 회장과 기독교복음침례회는 5공화국과 유착관계가 없었으며 지난 5월 21일 인천지검에서 공문을 통해 이를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8. 유병언 전 회장의 50억 골프채 로비설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은 유병언 전 회장이 사돈을 동원하여 50억 상당의 골프채로 정관계 인사들에게 로비했다고 보도하였으나, 지난 10월 검찰이 해당 로비설은 사실이 아니고 세모도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회생하였음을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이에 해당 기사를 바로 잡습니다.

9. 유병언 전 회장 작명 관련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은 ‘세월호’의 이름이 세상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세월(世越)이 아닌 ‘흘러가는 시간’을 뜻하는 세월(歲月)이며, 유병언 전 회장의 작가명인 ‘아해’는 ‘야훼’가 아닌 어린아이를 뜻하며 기업명인 ‘세모’는 삼각형을 뜻하고, 안성의 ‘금수원’은 ‘짐승’을 뜻하는 ‘금수’가 아닌 ‘금수강산’에서 인용하여 ‘비단 금, 수놓을 수’의 뜻임이며 확인되었습니다.

10. 유병언 전 회장의 개인 신상 관련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에서는 유병언 전 회장과 다수의 여인들과 부적절한 관계인 것으로 보도하였으며, 신도들의 헌금을 착취하는 등의 검증되지 않은 다수 패널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여과 없이 보도하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도 법정 제재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또한 유 전 회장은 해외 망명이나 밀항 시도는 사실 무근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유 전 회장은 세월호 실소유주가 아니며 2400억 재산의 상당부분은 기독교복음침례회 영농조합 소유임을 밝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언론사에 다음과 같은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언론은 출연자들의 일방적 주장을 경계하면서 객관적이며 균형 있는 취재보도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한편, 이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언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 주기 바랍니다. 수사가 진척되고 사실이 밝혀지면서 법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보도와 선정적인 보도에 집중하며 여론을 호도하여 사건을 여론재판으로 끌어간 세월호 사고 관련 보도 행태를 돌아보고, 법치주의 국가로서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도록 노력해 줄 것과 또한 대형 참사로 온 국민이 비탄에 잠긴 이 시기를 자신들의 입지와 교권확보로 이용하는 세력들을 엄중 경계하는 현명함도 당부 드립니다.”

▲ 당시 오대양 사채의 세모그룹 유입 의혹 관련 기사.

세월호 참사 수사가 확대되면서 청해진해운 등 많은 계열사들의 실질적인 오너가 유병언 전 세모회장과 그 일가라는 사실이 벗겨지고 있다.

이와 함께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과 사이비종교 연구로 구원파와 논란을 벌인 고 탁명환(卓明煥) 종교문제연구소장의 ‘의문의 대상’ 사건까지 들춰지고 있다.

종교연구가 탁명환씨 장남의 말

탁명환씨의 장남 탁지일 부산장신대 부교수는 지난 5일과 6일 모 종편에 출연하여 선친이 구원파의 정체에 관한 저서와 종교단체 모임에서의 여러차례 강연으로 구원파의 끈질긴 비방, 협박, 테러위협을 받았다고 밝혔다.

탁교수는 선친이 남긴 저서, 칼럼 등 구원파와 관련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면서 구원파가 상명하복의 조직체제로 신도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거나 종교와 기업을 엮어 세모그룹을 일으켰다가 오대양사건이후 부도가 나고 그뒤 법정관리 과정을 거쳐 ‘얼굴없는 오너’로 재기하여 세월호 참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탁교수는 종편방송에서 지난 91년 7월 언론보도와 어느 서독 간호사 ‘오빠의진정편지’를 소개했다. 이 편지에서 간호사 오빠는 “외국 나가서 외롭게 생활하다 광적으로 정신이 쏠려 사이비 종교단체가 검은 마수처럼 도사리고 있지 않나 싶다“고 했다. 이어 ”그로인해 일체 송금이 없어졌다. 개인,가정,국가도 파탄으로 몰고 간다. 정부와 언론이 나서달라“고 진정했다.

탁교수는 6공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호한 후 선친이 청와대에 진정한 사실도 소개했다. 이때 9개월간에 걸쳐 전화도청, 사무실 방문 업무 방해, 새벽녘 납치기도 등 신변위협을 받고 있다고 진정했다는 요지다.

구원파가 끈임없이 비방,협박하자 탁명환씨는 91년 3월 13일, 뜬 눈으로 밤을 세운후 유언장 성격의 ‘양심선언서’를 작성했다. 이 양심선언서에서 탁소장은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유병언씨의 소행”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뒤 탁소장은 지난 94년 끝내 괴한의 테러로 숨지고 말았다.

‘세칭 구원파의 정체’ 폭로 저술

탁명환 소장은 피살되기에 앞서 91년 7월 ‘세칭 구원파의 정체’를 통해 유병언씨의 구원파 내력을 자세히 설명했다.

▲ 1991년 10월 24일 유병언 세모 사장이 오대양 사건 관련 첫 공판을 받기 위해 대전 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구원파 교주 권신찬 목사는 한국평신도복음 선교회 이름으로 기성교회와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다가 1981년 기독교복음침례회로 간판을 바꿨다. 그는 장로교 목사로 “기성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로부터 1962년 12월 목사직이 면직됐다. 그로부터 독립교회 생활하다가 1966년 인천복음주의방송(극동방송전신) 전도과장으로 ‘은혜의 아침’ 설교시간을 통해 구원파 교리를 전파했다.

이 무렵 탁소장이 연사로 방송국을 출입할때 권신찬씨는 전도부장, 그의 사위 유병언씨는 부국장이었다. 탁소장은 1973년 전도부장실에서 권신찬 목사를 만나 인터뷰하면서 무서운 이단이라고 인식한다.

이 무렵 목포, 임실, 안동, 포항 등 곳곳에서 구원파가 가정을 등지고 섬기던 교회를 떠나 기성교회와 마찰하는 물의를 빚었다. 구원파는 ‘깨달음파‘,’골방파‘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극동방송국을 장악하려다가 실패하여 추방되고 말았다.

탁소장은 이를 계기로 ‘세칭 구원파의 정체’를 발간하여 사이비 이단 시비와 논쟁 18년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 탁소장은 권신찬, 유병언씨의 고소를 받고 맞고소하는 사태로 ‘얼굴없는범인’과 끝없는 투쟁했다는 이야기다.

오대양사건 수사결과와 남은의혹

▲ 당시 오대양 사채의 세모그룹 유입 의혹 관련 기사.

1987년 8월 29일, 용인 오대양 공장에서 32명의 집단변사사건이 드러나 세상이 깜짝 놀라게 했다. 수사 당국은 빚에 쫒겨 극약으로 집단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탁소장은 타살이 아닐까 의심했다. 공장, 식당의 천정과 서까래에 목매어 죽은 시신들이 다른 곳에서 옮겨와 매달은 것이 아닐까 싶어 ‘자살아닌타살’이라는 심증을 가진 것이다.

당시 경찰은 중간수사발표에서 “거액의 빚에 쫒겨 3박 4일간 은신하면서 슬레이트 지붕 아래 밀폐된 공간에서 탈진상태에 이르자 박순자 대표의 지시로 그의 두 아들과 이경수가 목 졸라 죽이고 이씨는 마지막으로 목매어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뒤 최종발표에서는 “오대양교 박순자 교주의 지시로 이경수씨 혼자 31명을 죽이고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탁소장은 사건 이틀만에 서둘러 시신을 집단화장한 사실부터 의혹이라고 여겼다. 탁소장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을 여러차례 방문하면서 많은 제보를 받았다. 그 중에 당일 새벽 하늘색 봉고차가 한시간 간격으로 오대양 공장을 드나 들었다는 제보에 미뤄보아 어디선가 시체를 옮겨와 천정에 쌓아 놓은 것으로 추정할만 했다.

탁소장은 이같은 심증으로 각종 종교집회에 참석하여 오대양 사건의 타살의혹을 제기함으로써 구원파로부터 온갖 비방,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탁소장은 오대양 박순자씨가 사채를 조달한 방식이 유병언씨의 삼우트레이닝과 세모가 구원파 신도들의 헌금을 모금한 방식과 똑같다고 판단했다.

그 뒤 오대양 암매장범의 자수사건이 나오자 탁소장은 한국교회100주년 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오대양사건과 구원파가 관계있다고 폭로했던 것이다.

‘오대양,세모,구원파 관계있다’

탁소장은 구원파와의 18년간 시비와 논쟁 및 오대양사건 추적 5년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오대양,세모,구원파 간 관련이 있다”고 기자회견에서 주장했다.

탁소장은 기자회견에서 국회 김현의원, 박찬종의원 등이 오대양사건 관련 발표한 견해와 같다고 강조했다. 사채 피해자들과 현장에서 발견된 서적 등에 미루어 보면 구원파와 연계됐음을 직감할수 있었고 수사당국이 서둘러서 자살사건으로 종결처리한 점도 의혹이라고 제기한 것이다.

탁소장은 1986년 강남 세모타운의 ‘엄마모임’을 통해 송재화 여인의 꾀임으로 거액을 빌려 주었다가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유병언씨와 송재화씨를 고소한 사실을 제기했다. 이때 치안본부 특수 수사대가 수사에 착수했지만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수사중지를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었다고 말했다.

탁소장은 이 무렵 유병언씨가 구원파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송재화 여인과는 모르는 사이라고 했지만 여럿 증언과 자료에 의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탁소장은 1991년 7월, 송재화씨가 부산 구원파 교회에서 강연한 녹음테이프를 등기우송으로 받아보니 그 속에 유병언씨와 송재화씨가 밀접하다는 사실이 들어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무렵은 유병언씨가 ‘개발비’라는 명목으로 모금하던 시기로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송여인의 강연 현장에는 오대양 사건 때 죽은 문씨나 권씨 등도 참석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탁소장은 또한 당시 언론이 ‘오대양교’나 ‘여교주 박순자’등으로 보도했지만 신흥종교 25년을 연구했는데도 오대양교나 박순자 교주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신변이상 생기면 유병언 소장..양심선언서

탁소장은 1990년 11월 서울 중랑경찰서 조사계로부터 출두요구서를 받고 갔더니 세모의 고창환(44) 상무의 고소였다. 탁소장은 그동안 50여 차례나 고소 고발을 경험했기에 세모의 유병언씨를 대리한 고소사건이라고 느꼈다.

중랑경찰서 조사과정 중에 제보를 통해 세모측이 미리 경찰에 로비하여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임을 짐작했다. 그러나 탁소장은 구속을 면했다.

▲ 탁명환 소장의 아들들인 탁지원, 탁지일, 탁지웅 씨(왼쪽부터)가 탁 소장이 피살 당시 입고 있었던 셔츠를 보이고 있다.

이후 탁소장은 밤이면 괴전화 협박이 오고 터무니 없는 여성문제를 제시하는 모함편지와 녹음테이프도 날라왔다. 탁소장은 정보기관의 능력이 아니면 안될 수준의 도청과 협박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탁소장은 ‘얼굴 없는 범인들’이 신변을 위협하자 1994년 3월 13일, 뜬 눈으로 밤을 세운후 유언장을 쓰는 심정으로 ‘양심선언서’를 작성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자살을 택할 이유가 없으니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세모 유병언의 소행임을 밝혀둔다”는 요지다.

탁소장이 검찰에 불려 다니는 사이에도 세모측 사람들이 찾아와 “오대양과 세모와 관련증거를 대라”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양심선언서를 작성하기 직전인 1990년 8월 6일에는 세모 직원명의로 일간지에 탁소장을 비방하는 5단 광고를 게재했다. 이에 유병언씨를 중랑경찰서에 고소했더니 믿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됐다.

고소사건이 중랑경찰서에서 마포경찰서, 대구남부경찰서로 이관되어 돌고 돌아 다시 중랑경찰서로 돌아왔다. 경찰은 피고소인 유병언씨가 소환에 불응하여 사건 관할지역을 따져 이곳저곳으로 이관했다고 말했지만 수사를 기피하려 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하는수 없이 경찰이 세모를 찾아가 유병언씨의 조서롤 작성하면서 ‘혐의없음’이란 의견을 붙여 북부지청으로 넘겼다는 이야기다.

탁소장은 경찰의 편파적 수사의 배경이 무엇일지를 의심한다고 말했다.

유병언씨의 탁소장 고소...명예훼손

한편 세모 유병언씨는 탁명환 소장이 ‘세청 구원파의 정체’를 발간한 후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혐의로 탁소장을 고발했었다.

▲ 고 탁명환 소장.

1991년 6월,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에 제출한 고소장을 통해 유병언씨는 탁소장이 일방적으로 구원파와 자신을 비방한다고 주장했다.

소장에 따르면 유병언사장은 1976년 2월, 직물, 전자, 유지, 완구, 페인트 등을 생산하는 삼우트레이딩을 설립하고 1982년 10월에는 ㈜세모를 설립, 운영하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있는 기업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종교문제연구소 탁명환 소장은 종교잡지 월간 현대종교를 창간하여 인신비방을 계속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유병언씨는 1974년 11월, 탁소장이 ‘세칭 구원파의 정체’를 통해 자신과 구원파가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지만 사실이 아니기에 무시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1980년 10월 제주도 종교인모임 강연에서 “삼우트레이딩의 유병언이 신도들의 돈으로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방하고 같은해 11월에는 주간 크리스찬신문 기고문에 같은 내용을 게재했고 12월에는 목포 종교인모임 강연에서 “구원파의 교주는 사실상 권신찬이 아닌 유병언이다”라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지적했다.

또 명예훼손부문에서는 유병언이 구원파의 실력자라거나 헌금을 사업자금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한 것이 출판물 등에 위한 허위내용 적시라는 주장이었다.

유병언씨는 탁소장이 상습적인 허위사실 유포와 비방으로 많은 친지들과 회사 직원등에게 마치 사이비종교 실력자인양 오해시키고 오대양 사건과 관련된 기사가 계속 보도되면서 온갖 소문과 문의전화가 걸려와 정신적 고통 위자료 1억원, 회사에 대한 피해보상 1억원을 청구한다고 밝혔다.

유병언씨와 탁소장간의 구원파 시비와 고소 고발은 사법적 판단의 영역이 되고 말았지만 여러차례 협박과 테러를 겪은 탁소장이 끝내 1994년 의문의 피습사건으로 사망한 것은 구원파와 직간접 관련이 있지 않느냐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78호(2014년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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