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비상 ‘끔찍’ 추억

▲ 필자 길무혁씨

IMF 외환위기로 한파가 몰아친 지 1년을 맞은 1998년 10월 22일, 4급직(대리) 신분으로 점포장을 발령 받은 감동을 잊지 못한다. 당시 41세의 젊은 혈기로 “시중은행 사상 대리(代理)에서 점포장으로 직상승한 전례가 또 있겠느냐”고 속으로 자부하며 부임했다.

[전직(前職)의 은행사랑 고백①]

제일은행 35년1개월
IMF 비상 ‘끔찍’ 추억
‘고객신뢰 잃으면 다 잃는다’ 교훈

IMF 금융비상기 마장동 출장소장

예기치 못해 사전 준비 없이 부임한 점포는 마장동 우(牛)시장에 있는 조그마한 출장소였다. 상가건물 2층에 청원경찰을 포함하여 직원 8명의 단출한 점포였다. 지점 규모라야 예금과 대출을 합쳐 160억원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IMF 한파로 종래의 우량은행 개념은 허물어지고 국제결제은행이 정한 BIS비율이 은행거래의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비율이란 은행의 위험자산(부실채권) 대비 자기자본비율로서 고객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맡긴 돈에 대한 지불보증과 같은 성격이었다.
당시 IMF 권고에 의해 각 부문의 구조조정 파동이 극심했다. 금융시장과 관련하여 고위 공직자들이 한마디 하면 각종 언론이 대서특필하여 은행고객들이 눈을 번쩍 뜨고 지켜봤다. 한마디로 금융비상 시국으로 확고한 정보가 부족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럴 때 고객들이 자신의 금융자산을 지키고자 긴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니까 첫 점포장 부임이 곧 비상근무일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신용상태가 의심되는 D그룹 직원들마저 “제일은행 형편이 어렵다”고 내다보고 봉급거래를 H은행으로 변경했다. D그룹은 회사 설립시기부터 은행자금 지원으로 급성장 했지만 금융비상시기라 하니까 금방 안면을 몰수했던 것이다.

모닝커피 준비하여 새벽시장 순회

설상가상으로 경쟁은행들마저 기회를 잡은 듯 제일은행 직원들의 거래(대출, 신용카드) 때는 가장 엄격한 평가기준으로 너무나 까다롭게 처리하여 마음고생이 더했다. 제일은행 직원들은 승진은 고사하고 20% 급여삭감에 각종 경비지출의 축소, 동결에다 대규모 명예퇴직 압박을 받고 있었다.
국민세금에 의한 공적(公的)자금 지원을 받았으니 이에 상응하는 뼈를 깎는 자구(自救)노력은 당연하다고 믿었다.
고객들의 입장에서 은행 신인도가 낮은 은행에서 높은 은행으로 옮겨가는 것은 당연했다. 이른바 Bank Rush 현상이었다. 과연 이럴 때 점포를 어떻게 끌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더 이상 망설이거나 주저할 여유가 없었다. 떠나가려는 고객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지성(至誠)을 다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점포영업 사상 처음으로 영업시간이 끝난 후 전 직원이 어깨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가 가두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탈고객이 다시 돌아오면 우대금리를 적용하겠다고 약속하며 필사적으로 고객 붙잡기에 전심전력했다.
어느날엔 새벽 4시에 눈을 떠 급히 승용차를 몰고 지점으로 달려가니 은행문은 굳게 닫혔지만 시장상인들은 분주하게 새벽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주일 내내 새벽 4시에 출근하며 상인들의 소중한 말씀들을 듣고 메모했다. 한방차, 녹차, 커피 등을 준비하여 ‘모닝커피’를 대접하며 시장 곳곳을 순회하니 얼굴이 익숙해 졌다. 이때 대출금리를 연 18%에서 14%로 4%를 인하해 드린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마장동 우시장 고객들께서 마음을 열고 제일은행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비록 외국계로 넘어갔지만 아직까지도 계속하여 제일은행 고객으로 은행발전을 도와주고 계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말할 수 없다. 잊은 수 없는 은인들이다.
당시 은행이 국민혈세인 공적자금 지원을 받은 것은 분명 은행경영상의 책임이었다. 이 때문에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구노력과 함께 고객을 하늘처럼 섬기는 자세로 다가간 것은 너무나 마땅했노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되돌아보면 은행의 본질이란 단순한 돈장사가 아니고 사람장사 일뿐더러 고객의 믿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는 값진 교훈이라고 가슴에 새겼다.

38년전 답십리지점 첫 출근 회고

필자 길무혁(吉武赫·56) 씨는 1977년 선린상고를 나와 재학 중인 76년 11월에 천직인 제일은행에 입행하여 35년 1개월간 근속했다. 길 씨는 선린상고가 장기영(張基榮) 전 경제부총리를 낳은 명문이라는 자부심으로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은행 근무 중인 1982년 3월에는 세종대학 영어영문과에 진학하여 85년 6월 3년 중퇴하기까지 모자라는 학업을 계속했다.
길 씨는 상업학교에서 배우고 은행에 들어와 실습한 방식 그대로 성실 근면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1990년 2월 대리로 승진하여 여의도 광장지점에서부터 98년 10월 축산물시장 출장소장, 2001년 8월 여의도 지점장, 2004년 1월 충무로역 지점장, 2006년 5월 양재동 지점장, 2008년 2월 서초동 지점장, 2010년 6월 돈암동 지점장 등을 두루 거친 후 2011년 35년 근속을 마감했다.
길 씨는 선린상고 졸업을 앞둔 1976년 11월 15일, 첫 답십리 지점 출근길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지점은 영화촬영소 입구에 있다가 얼마 뒤 ‘김일체육관’ 옆으로 이전했다. 첫 직책은 돈을 세는 출납(出納)업무로 온종일 ‘돈냄새’를 맡았다. 6개월가량 돈 냄새를 맡으니 지겨울 정도였다. “돈을 돈으로 보지 말라”는 사전교육을 많이 받았기에 돈에 대한 인식이 무너져 단순한 업무상 도구로만 비쳤다.
그렇지만 첫 월급봉투는 너무나 값지고 소중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10개월 월부로 장만한 양복 월부값을 물고 나머지를 어머님께 드린 기분이 너무나 즐거웠다. 용두동 집에서 신흥교통 56번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발길이 너무나 가벼웠다. 퇴근길에는 양복 차림으로 몇몇씩 함께 두꺼비 소주(진로) 한 잔 나누고 귀가했다.
야근, 숙직(宿直)도 중요한 일과였다. 선임자와 함께 둘이 밤을 새워 지점을 지키는 업무이니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당시 연말연시에는 은행 문 앞에 “무장 경찰관 엄중 입회”라는 경고문을 붉은 글씨로 써 붙여 놓았다.
야간 비상망은 지점장, 차장, 대출계 등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숙직 비상근무 중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지금 되돌아보니 벌써 38년 전의 일이다. 당시 지점장으로 모셨던 최광민님 께서는 고인이 되셨다. ‘일은(一銀 )동지회’가 월 1~2회씩 모임을 가져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나눈다. 길 씨는 전직 제일은행 출신들의 “은행사랑은 영원하다”면서 틈틈이 옛 일을 기록하겠다고 다짐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0호(2014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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